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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16 (일)

전 부치던 며느리 집나갈라… 명절 대세 된 ‘차례상 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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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수 침체에도 업체들 호황

울산 거주 자영업자 A(38)씨는 3년 전부터 명절 때마다 ‘차례상 대행 업체’를 이용한다. 그는 “아내가 제사 음식 준비에 버거워해 처음 이용할 때는 집안 어르신 반대가 많았다”며 “음식 품질이 만족스럽고 가격도 합리적이라 이제 어르신들도 만족스러워하신다”고 했다.

계엄·탄핵 사태 여파로 내수 침체가 장기화하고 있지만 ‘차례상 대행 업체’는 대호황(大好況)을 누리고 있다. 명절 음식에 부담을 느껴온 MZ세대 젊은 부부들이 “빨리 차례 지내고 해외여행 가자” “고물가로 직접 음식 준비하는 것보다 대행 업체가 싸다”며 대행 서비스를 찾고 있기 때문이다. 업계에선 3년 전보다 차례상 대행 업체가 20%가량 증가한 것으로 보고 있다.

포털 사이트에 ‘설날 차례상’을 검색하자 ‘설날 음식’ ‘설날 상차림’ ‘제사 음식’ 등의 키워드가 붙은 상품 수십 개가 나왔다. 상차림에 제기(祭器)나 음식을 추가할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구성을 정해 주문하면 제주(祭酒), 식탁보, 향, 초 등과 더불어 일회용기에 담긴 음식들이 박스에 담겨 집으로 배송되는 식이다. 시기가 여름이거나 상하기 쉬운 나물류가 있는 경우에는 아이스박스 포장도 한다고 한다. 30만원 초반대 가격에 생선·과일·전 등 음식 약 20가지가 준비된다.

조선일보

그래픽=이철원


젊은 부부들은 만족스럽다는 반응이다. 30대 직장인 B씨는 “직접 음식을 하면 50만원 가까이 나오는데, 대행 업체는 30만원대에 해결된다”며 “집에서 음식을 하면 꼭 남는데 대행 업체는 인원에 맞춰 음식을 준비해 주니 남는 음식도 거의 없어 편리하다”고 했다.

‘대행 차례상’ 등장에 60대 이상 부모 세대는 처음엔 “차례 음식을 직접 만드는 것도 조상님들에 대한 정성”이라며 꺼리는 분위기가 상당했다고 한다. 온 가족이 모여 송편을 빚거나 전을 부치는 것도 일종의 ‘가족 집단 문화’로 전승돼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2020년대 들며 명절 연휴를 ‘휴가’로 여기는 분위기가 확산하면서 “그래도 차례를 안 지내는 것보단 대행 업체를 이용하더라도 지내는 게 낫다”며 ‘가족적 합의’를 이루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고 한다. 연휴 첫날 대행 업체를 이용해 간단히 차례를 지내고 “얼굴 봤으니 다음 명절 때 보자”며 국내외 관광지로 떠나는 가족도 적잖다.

고물가 여파로 직접 장을 봐 음식을 준비하는 비용과 대행 업체를 이용하는 가격도 거의 차이가 없어졌다. 서울시농수산식품공사가 지난 20일 발표한 ‘2025년 설 차례상 차림 비용’ 통계를 보면, 대형 마트에서 6~7인 가족 차례상을 차릴 때 드는 비용은 25만8854원이었다. 온라인에서 판매되는 명절 차례상 가격은 4~8인 기준 30만원대였다. 직접 차례상을 차리는 시간·노력을 고려하면 오히려 대행 업체가 저렴하다는 의견이 다수다.

연휴를 앞둔 차례상 대행 업체는 분주했다. 24일 서울 강서구의 차례상 대행 업체 ‘바른제사’ 직원들은 닭과 조기 수백 마리를 찌고 있었다. 조리가 완료된 후에는 포장을 위해 열을 식힐 목적으로 대형 선풍기 2대에 에어컨까지 틀었다. 음식이 다 식자 용기에 랩을 씌우는 작업이 이어졌다. 업주 고재효(48)씨는 “평소에는 오전 8시부터 오후 6시까지 직원 5명 정도만 일을 하지만, 명절 성수기에는 주간에만 20~30명이 일하고 야간(오후 8시~다음 날 오전 6시)에도 5~6명이 근무해야 수요를 맞출 수 있다”고 했다.

울산 중구에서 차례상 대행 업체 ‘정성제사’를 운영 중인 박종현(40)씨도 “지난달 중순부터 명절상 주문을 받고 있는데, 지금까지 대략 200개 정도가 팔려서 명절 전까지 270~280개 정도가 나갈 것 같다”며 “우린 경남 지역 대상으로만 주문받는데도 명절마다 꾸준히 200~300개가 나가고 있고, 주문자의 절반 정도가 2030″이라고 했다.

설 당일 약 3주 전에 차례상 주문이 모두 마감된 경우도 있었다. 경기 파주에서 차례상 대행 업체를 운영 중인 장모(47)씨는 “지난 2일부터 산적, 나물, 떡, 전, 한과 등 20여 메뉴로 구성된 차례상(28만9000원) 약 200개가 일주일 만에 완판됐다”고 했다.

차례상 대행 업주들은 “인터넷에서 검색한 뒤 문의하는 남편들이 많다”며 “주로 30대 남성들이 부모와 아내 눈치를 보다가 우리 대행 업체를 ‘설루션’으로 생각하고 찾아온다”고 했다. 서울의 대기업 회사원 권모(39)씨는 “차례상 대행 업체를 이용한 뒤 가정의 평화가 찾아왔다”고 했다. 아내는 명절 차례와 각종 제사 음식 준비에서 해방돼 홀가분하고, 부모도 “다 남겨서 버릴 음식 만들려고 뭐 하러 고생하느냐”며 받아들였다는 것이 권씨의 설명이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고물가가 고착화되는 상황에서도 대행 업체는 재료를 대량으로 사들이기에 원가 절감이 가능하고, 그간 명절 음식 마련에 지쳤던 가계는 합리적인 가격으로 차례상을 마련할 수 있게 된 것”이라며 “명절 노동, 가정 불화를 ‘비용’으로 생각하고 외부에 적극적으로 위탁하겠다는 인식 변화가 본격화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김병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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