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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11 (화)

파독 간호사 모시려 “아파트, 남편 비자도 줄게”... 60년전 독일서 배우는 돌봄의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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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고령사회, 돌봄 대전환해야] [1] 우대받은 파독 간호사들

조선일보

1960년대 독일 병원 수녀들과 한국 간호사들 - 1960년대 독일 현지 병원에서 독일인 수녀(가운데)와 한국 간호사들이 찍은 단체 사진. 당시 독일은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돼 간병 인력이 부족하자 한국 간호사들을 유치해 의료·공백을 메웠다. 독일인들은 이런 한국 간호사들을 ‘극동의 천사’라 불렀다. /한국 파독 광부·간호사·간호조무사 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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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1월 31일 당시 스물넷 김삼순씨는 서독으로 가는 일본항공(JAL) 전세기에 올랐다. 대구에서 간호대학을 졸업하고 대구동산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던 김씨는 미국 유학을 꿈꿔 왔다. 그러다 “독일에 간호사가 많이 부족한데, 미국 대신 독일에서 일하면서 공부도 하면 좋지 않겠느냐”는 한 의사의 제안에 친구와 독일행을 결심했다. 김씨와 같은 비행기를 탄 20대 초·중반 간호사는 총 128명. 다음 날 곧바로 독일 전역의 병원에 배치됐다. ‘파독 간호사’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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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양인성


김씨도 다음 날 프랑크푸르트 한 병원의 외과병동에 배치돼 환자를 돌봤다. 주사 같은 의료 행위도 했지만, 한국에선 간병인의 업무로 여겨지는 환자 대소변 처리, 침대 정리 같은 업무도 했다. 독일인들은 그런 한국 간호사를 ‘극동의 천사’라 불렀다.

당시 독일은 급속한 산업화로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됐고 전쟁 후유증으로 간병 인력이 크게 부족했다. 이에 ‘남편 일자리’까지 마련해주면서 한국 간호사들을 모셔 갔고, 독일인과 똑같이 대우했다. 독일 의료 현장에서 파독 간호사들은 없어선 안 되는 존재가 됐다. 동시에 이들은 최빈국 한국 경제를 떠받치는 외화벌이의 주역이었다.

그로부터 60년 후, 한국은 당시 독일보다 훨씬 더 심각한 돌봄 인력난을 겪고 있다. 작년 12월 한국은 노인 인구가 전체의 20%가 넘는 ‘초고령 사회’에 진입했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다. 2045년엔 노인 인구가 37%가 넘을 것으로 전망된다. 더 늦기 전에 국가 차원의 돌봄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는 요구가 높다.

고령화로 인한 돌봄난은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다. 세계 주요국들도 각자의 돌봄 체계를 만들어 가고 있다. 역사와 문화, 국력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형성되는 사회 정책에는 정답이 없다. 본지는 파독 간호사·조무사 20명을 인터뷰해 과거 독일 사례를 살펴봤다. 우리보다 앞서 돌봄 체계 구축에 힘 쏟고 있는 호주·대만·일본 사례도 취재했다. 인력을 파견하던 국가에서 60년 만에 인력 부족 국가가 된 한국의 돌봄 정책 해법을 모색하는 시리즈를 시작한다.

◇독일, ‘극동서 온 천사’들에게 어학연수 제공하며 정착 도와

지난달 20일 서울 서초구 ‘한국 파독 광부 간호사·간호조무사 연합회’(연합회) 건물에 아리랑이 울려 퍼졌다. 이날은 파독 간호사·간호조무사와 파독 광부로 구성된 ‘글뤽아우프 합창단’의 연습이 있는 날이다. 파독 간호사와 간호조무사 20여 명은 각자 집에서 가져온 찰밥·어묵국·도토리묵 같은 한식을 차려 놓고, 독일에서의 생활을 회상했다. 김순희(73)씨는 “향수병이 생기니 병원에서 한국인들끼리 같이 방을 쓰게 배려해줘 함께 한식도 해 먹었다”고 말하자, 다른 이들도 “행운이었다” “힘들긴 했어도 우릴 좋아하지 않았느냐”며 맞장구를 쳤다.

◇1960년대 독일, 지금 한국과 판박이

파독 간호사들이 본 당시 독일은 돌봄 인력난이 심각한 상황이었다. 산업화로 늙어가던 독일은 간병과 요양이 필요한 환자와 노인이 넘쳐나는데 간호 인력은 매우 부족했다. 전쟁 미망인이나 질병에 시달리는 전역 군인도 많았다고 한다. 병원에는 원칙적으로 보호자나 간병인이 출입할 수 없어 간호사·간호조무사가 간병인이 할 돌봄 업무까지 모두 도맡아야 했다.

고된 업무라는 인식 때문에 독일인들은 기피했다. 1973년 독일에 간 오경숙(76)씨는 “간호 인력이 대소변 처리나 청소 같은 허드렛일까지 다 하다 보니 ‘3D’ 업종으로 취급되며 젊은 사람들이 기피했다”고 말했다. 연홍순(73)씨는 “1972년 독일에 가서 결핵 환자 병동에서 일했는데, 침대 정리, 소독뿐 아니라 환자와 함께 탁구를 쳐주고, 목욕시키는 일까지 모두 내 몫이었다”고 했다.

가장 큰 장벽은 언어였다. 1971년 함부르크 한 병원 외과병동에서 일한 간호사 김혜선(75)씨는 “당시 우리처럼 돈을 벌러 왔던 필리핀 간호사들은 영어를 했지만, 우린 독일어·영어를 다 못해 더 힘들었다”면서 “영어를 몰라 마트에서 밥 대신 개 사료를 사거나, 치약 대신 딸기잼을 산 적도 있었다”고 했다. 1970년대 파독 간호사 일부는 한국에서 독일어 듣기와 회화 교육을 받기도 했지만, 현지에서 적응하는 데는 턱없이 부족했다. 이정숙(73)씨는 “일하던 베를린 시립병원에서 공짜로 3개월간 독일어 교육을 시켜줬다”고 말했다.

◇실력으로 인정받은 파독 간호사

한국 간호사들은 실력과 근면함으로 독일 사회에서 인정받았다. 조순례(73)씨는 “한번은 병원장이 ‘한국 음식에서 냄새가 난다’며 한국 간호사들을 혼냈는데, 그게 소문이 나자 베를린 다른 병원들에서 너도나도 ‘그럼 우리가 데려가겠다’며 나섰다”면서 “그러니까 병원장이 사과하면서 내 손을 붙잡고 ‘잘해줄 테니 나가지 말아 달라’고 사정하더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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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초구 한국 파독 광부·간호사·간호조무사 연합회에 있는 1960년대 독일 어린이 병동 모습을 담은 사진. 한국인 파독 간호사(왼쪽에서 셋째)가 다른 의료인 등과 함께 아이를 돌보고 있다. 당시 독일은 심각한 돌봄 인력난을 해결하기 위해 한국인 간호사들을 적극 유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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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독일인 직원들은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요양보호사·간병인 수준이었다. 그들과 비교하면 고등학교를 마치고 3년간 간호사 교육을 제대로 받은 한국 간호사들은 전문 인력이었다. 이 때문에 “환자들이 ‘킴(김) 어디 있느냐’며 한국 간호사만 찾고, 병원에선 ‘한국인에게 기술을 배우라’며 한국인과 외국인을 팀으로 짜주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독일 언론은 한국 간호사들을 ‘극동에서 온 천사’라고 칭했다.

파독 간호사 중에는 의사가 되거나 다른 전문 자격을 취득하는 등 독일에서 새 기회를 만든 이들도 있었다. 엑스레이 전문사 자격증을 딴 홍영순(70)씨는 “이방인이라 독일인보다 3배 더 공부해야 했고 울기도 많이 울었는데 끝내 80명 중 13명 안에 들어 시험에 합격했다”며 “독일 의사들이 매번 나를 찾아 ‘홍, 네 의견은 어때?’라고 물을 때 말로 다 못할 성취감을 느꼈다”고 했다.

이들은 독일인과 차별 없이 동일한 대우를 받으며 일했다고 입을 모았다. 전국 병원에서 국적과 상관없이 같은 임금을 줬다고 한다. 사람들이 기피하는 시골 병원이나 감염병 병동에선 20~50%씩 추가 수당도 지급했다. 이무경(79)씨는 “당시 한국에서 간호사들은 2교대 근무였는데 독일은 3교대였고 여러 면에서 간병 인력에 대한 대우가 좋았다”며 “한국에선 없이 살다 갔는데 독일에선 한겨울에 뜨거운 물도 펑펑 나왔다. 임금과 복지 같은 모든 것을 동등하게 보장받았다”고 했다. 독일 병원들은 직접 돈을 내 간호사들이 무료로 3~6개월 과정 어학 코스를 밟을 수 있도록 했다.

◇“아파트, 남편 비자도 줄게” 한국 간호사 모셔오기

간호사들의 처음 계약 기간은 3년이었다. 그런데 3년을 채운 뒤에도 “더 있어 달라”는 병원 부탁에 계약을 연장한 경우가 많았다. 병원 측은 월급도 올려주고, 병원 내에 남편 일자리도 주겠다고 하면서 이들이 독일에 남아 있길 바랐다. 당시 파독 간호사·광부 커플이 많았는데, 간호사 아내 덕에 광부 남편은 계약이 끝난 뒤에도 독일 병원에서 더 일할 수 있었다. 박해순씨는 “병원에서 일만 해주면 아파트도 주고 애도 다 키워준다는 도시가 많았다”고 했다.

독일 병원이 한국 간호사들에 대한 대우가 좋아지자 독일에 가려는 간호사가 늘며 한국 병원이 인력 부족 사태를 겪기도 했다. 한국 간호사의 수요가 급증하자 1970년대 들어선 간호조무사까지 독일로 파견했다.

당시 독일뿐 아니라 유럽 선진국들도 전쟁 후유증과 고령화 등으로 돌봄 인력난을 겪고 있었다. 이에 스위스·캐나다에서도 한국인 간호사를 모셔가기 위한 쟁탈전이 벌어졌다. 김삼순씨는 “독일에서 하도 ‘한국에 들어가지 말라’고 잡아서 6개월 더 계약을 연장해 일하고 있었는데, 캐나다에서 ‘하루 만에 비자를 내줄 테니 캐나다로 오라’고 했다”고 말했다.

[강다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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