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가 선정한 ‘2024 올해의 책’. 김진수 선임기자 jsk@hani.co.kr, 촬영 협조 교보문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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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저물어가고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은 한 해를 마무리하는 ‘나만의 루틴’이 있으신가요? 매주 새 책을 검토하고 책 기사를 쓰는 텍스트팀 기자들은 ‘올해의 책’을 정리해야만 그 해가 마무리됩니다. 한 해 동안 지면에서 주요하게 다룬 책들 가운데 국내서 10권, 번역서 10권을 골라 ‘한겨레 올해의 책’으로 소개합니다. 모든 기자가 자신만의 ‘올해의 책’을 꼽고, 가장 많이 호명된 책 위주로 선정합니다. 가급적 출판사가 중복되지 않도록, 특정 분야에 쏠리지 않도록 안배합니다.
올해는 저자들이 오랜 기간 공들여 쓴 책들이 눈에 띄었습니다. 12년 들여 7권으로 집대성한 ‘한국 여성문학 선집’부터 10년 동안의 집필 기간을 거쳐 완성한 ‘장일순 평전’, 또 철학자 이정우가 세계철학사 시리즈 1권을 펴내고 13년 만에 완성한 마지막 권 ‘세계철학사 4-탈근대 사유의 지평들’까지, 저자들의 열정과 탐구심, 인내심이 빛나는 책들이 많았습니다. 이 밖에도 전쟁의 광기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책, 기후위기 관련 책, 돌봄 의제 관련 책까지 우리 시대의 문제를 직시하려는 책들도 쏟아졌습니다.
‘한겨레 올해의 책’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온 국민이 ‘올해의 책’으로 꼽을 만한 책도 있습니다. 한국인 최초이자 아시아 여성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한강 작가의 책들입니다. ‘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 등 한강 작가 책은 수상 이후 엿새 만에 100만부가 넘게 팔리기도 했지요.
“가장 어두운 밤에도 우리가 무엇으로 만들어진 존재인지 묻는 언어가 있습니다. 이 행성에서 함께하는 사람들, 살아 있는 존재들의 관점에서 상상하도록 요청하고, 우리를 서로 연결해주는 언어가 있습니다. 이 언어를 다루는 문학 작품은 필연적으로, 일종의 체온을 갖고 있습니다. 문학 작품을 읽고 쓰는 행위는 생명을 파괴하는 모든 행위와 반대되는 것입니다.”
한강 작가가 노벨상 시상식 연회에서 한 말입니다. 올해도 많은 작가와 독자들이 책을 통해 연결됐고, 이 행성에서 함께 살아가기 위한 고민을 나눴습니다. 연말에 발생한 비상계엄 사태와 직무정지 당한 대통령이 보여주는 한심한 행태로 많은 국민이 ‘캄캄한 밤’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강 작가가 말한 대로 “가장 어두운 밤에도 우리가 무엇으로 만들어진 존재인지 묻는 언어가 있습니다”. 언어의 힘을 믿고, 연결의 힘을 믿고, 내년에도 읽고 쓰며 ‘우리가 바라는 세상’으로 함께 걸어가면 좋겠습니다.
한겨레 텍스트팀
영화로 더 입증된 ‘키건처럼 소설다운 것들’
이처럼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지음, 홍한별 옮김, 다산책방 |
작가·독자 설문 등 여기저기 ‘올해 베스트’로 호명한 데가 많아 꼽기 저어될 정도다. 그러나 마침 개봉한 동명 영화를 보면, 소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의 매력은 더 분명해진다. 그냥 ‘좋다’가 아니다. 킬리언 머피의 연기(빌 펄롱 역)조차 결결이 과장되어 보이는 데에선, 소설로밖에 전할 수 없는 서사의 존재가 증명되는 듯하다. 첫 단락 “곧 흑맥주처럼 검은 배로강이 빗물에 몸이 불었다” 문장 한 줄로 종교의 이름 아래 국가와 이웃이 방조하는 폭력의 기운을 불러 암시하는 작가의 농밀한 필치, 내부에서 요동하는 소시민의 ‘정의’가 마지막 결행의 감동으로 이어지기까지 가만하되 집요한 전개…. ‘맡겨진 소녀’에서도 그랬듯, 키건은 결미를 향해 사력으로 기어간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일본 학자가 쓴 북한 언어학자 평전
북으로 간 언어학자 김수경 이타가키 류타 지음, 고영진·임경화 옮김, 푸른역사 |
일본인 학자가 이런 책을 썼다는 사실이 놀랍고도 부끄럽다. 분단 이후 북의 말글 정책에 토대를 놓은 잊힌 언어학자 김수경(1918~2000)의 생애와 업적이 충실하게 정리되어 있다. 일제강점기에 ‘언어 천재’로 불렸던 김수경은 분단 뒤 북으로 올라가서는 두음법칙을 없애고, 한글날을 훈민정음 해례본 반포일인 10월9일이 아닌 정음 창제일 1월15일로 바꾸었으며, 북한 최초의 문법서인 ‘조선어 문법’(1949)의 초고를 집필했다. 그런 업적과 함께 전쟁통에 아내 및 자녀들과 생이별을 하고 김일성 유일 체제에서 남쪽 출신으로서 숙청 대상이 되어 공식 활동에서 배제되는 등의 개인적 고초와 곡절도 두루 서술해 인간 김수경의 입체적 면모를 확인할 수 있게 했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우에노 지즈코의 ‘복지다원사회론’
돌봄의 사회학 우에노 지즈코 지음, 조승미·이혜진·공영주 옮김, 오월의봄 |
일본의 대표적 사회학자이자 여성학자인 우에노 지즈코의 돌봄 이론과 실천을 집대성한 저작이자 900쪽 넘는 대작이다. 인권과 페미니즘의 시선으로 고령자 돌봄의 실태를 분석하고 현장의 노력들을 탐구했다. 그 ‘치밀한 여정’의 끝에서 가족과 시장, 국가, 시민사회의 돌봄에 모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그는 각자가 서로를 받치고 보완하는 ‘복지다원사회론’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당사자의 필요에 화답하는 돌봄의 길을 질문한다. 2000년대 중후반 잡지에 연재한 글을 묶어 2011년 일본에서 출간한 책이 올해 5월 국내에서 번역돼 나왔다. ‘초고령화 한국’의 미래를 앞서 걸어간 일본에서 사회적 난제의 해법을 찾으려는 저자의 학문적 고투가 13~20년의 저술·출간 간격 탓에 오히려 한국 독자와 시간차 없이 만난다.
이문영 기자
역사까지 왜곡해 전쟁 정당화하다
이스라엘에 대한 열 가지 신화 일란 파페 지음, 백선 옮김, 틈새책방 |
이스라엘 출신 역사학자 일란 파페의 일목요연하면서 통렬한 이스라엘 비판서. 이스라엘이 어떻게 역사를 왜곡해 자신들이 벌이는 전쟁과 학살을 정당화하고 있는지 조목조목 짚는다. 또 지금과 같은 비극의 기원은 서구의 ‘반유대주의’와 ‘시오니즘’이 결합해 벌어졌음을 분명히 한다.
저자는 이스라엘이 ‘신화적-성서적 복음주의’를 근거로 팔레스타인의 땅을 가로챘으며, 자신들의 부당한 점령을 정당화하기 위해 ‘팔레스타인은 빈 땅이었다’라는 식으로 거짓말까지 하며 역사 조작도 서슴지 않고 있다고 전한다. 복잡하고 기나긴 역사적 맥락을 핵심만 추려 압축적으로 설명을 해주니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양선아 기자 anmadang@hani.co.kr
책의 과거로 책의 미래를 묻다
옥스퍼드 책의 역사 제임스 레이븐 등 지음, 홍정인 옮김, 교유서가 |
책장을 열면 책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다양한 시각 자료들과 함께 장대하게 펼쳐진다. 점토판, 양피지, 파피루스, 종이, 디지털 텍스트 등 형태를 달리해온 책의 5000년 역사를 고대·중세·근현대 시기와, 르네상스·종교개혁·계몽주의·프랑스혁명·산업화란 세계사적 전환, 서유럽·남아시아·한중일 등 지역을 종횡하며 풀어낸다. 서지학, 필사, 인쇄, 미디어 연구자 등 16명의 저자가 ‘책은 무엇’인지, ‘무엇이 책을 책이게 하는지’ 질문한다. 유사 이래 어느 때보다 많은 사람이 책을 쓰고 어느 때보다 많은 책이 출간되고 있는 지금은 어느 때보다 많은 책이 폐기되고 어느 때보다 종이책의 위기가 가시화된 시대이기도 하다. 종이가 퇴장한다고 해서 책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란 사실이 책을 사랑하는 사람에겐 슬프지만 위안을 주는 ‘책에 대한 책’.
이문영 기자
동성애 작가가 토해 낸, 작은 ‘대륙’의 깊고 오랜 슬픔
귀신들의 땅 천쓰홍 지음, 김태성 옮김, 민음사 |
작은 ‘대륙’의 문학적 면모를 여실히 보인 소설. 2024년 국내 소개된 대만 작품이 적지 않다. 그 가운데 천쓰홍 역시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작가다. 그의 고향은 대만 애호가에게도 낯선 곳. 이 두 조합이 증폭한 물음표는 소설 ‘귀신들의 땅’에서 곧 느낌표가 될 것이다. 억척스러운 어머니 아찬, 유약한 남편 아산, 이 부부에게 환영받지 못한 다섯 딸, 마침내 얻어진 장남의 말로, 그리고 온 가족의 사랑을 받은 막내아들 톈홍의 반전적 진실 등이 펼쳐지니, 근현대를 견딘 대가족 수난사이면서도 가족조차 옹글게 포용하지 못하는 슬픈 인간사다. 작가의 실제 삶이 반영된 작중 무대가, 작가에게 “울음에 관한 소설을 쓰고 싶”게 만든, 애증의 시골 마을 용징이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블랙홀로 빨려든 물질들이 환생한다고?
화이트홀 카를로 로벨리 지음, 김정훈 옮김, 쌤앤파커스 |
이탈리아의 이론물리학자가 블랙홀의 반대 개념이자 이론으로만 존재하는 가상의 천체 ‘화이트홀’의 생성과 작동 원리를 양자중력 이론에 기대어 설명했다. 블랙홀은 엄청난 중력으로 빛까지 포함한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천체로, 실제 관측으로 존재가 증명됐다. 그렇게 빨려 들어간 물질들은 어디로 갔을까? 블랙홀 속에서 끝없이 압착돼 사라질 것 같던 물질은 공간과 시간의 양자적 구조에 의해 더는 작아질 수 없는 공간의 최소 크기에 이르러 압착을 멈춘다. 블랙홀의 특이점이다. 여기서 물질이 양자터널을 통해 화이트홀이라는 다른 세계로 옮겨간다. 그렇게 화이트홀의 지평선을 빠져나온 물질들이 제자리로 ‘환생’한다는 논리는 시공간의 경계를 허물며 우주에 대한 인간 인식의 지평을 넓힌다.
조일준 선임기자 iljun@hani.co.kr
일본에 쌀 빼앗기고 키 작아진 조선인
음식조선 임채성 지음, 임경택 옮김, 돌베개 |
1910년 강제병합 무렵 조선의 1인당 쌀 소비량은 0.9석이었는데 1930년대 전반기에는 0.5석으로 떨어졌다. 반면 일본은 1930년대까지 1.3석 안팎을 유지했다. 한반도에서도 쌀이 부족했음에도 지속적으로 쌀이 일본으로 유출된 결과였다. 통계에 따르면 1900년대부터 1920년대 중반에 걸쳐 조선인 성인 남자의 키가 2㎝ 커졌지만, 1920년대 중반부터 1945년까지는 약 1~1.5㎝ 작아졌다. 식민 지배가 음식과 건강에 미친 영향을 단적으로 알 수 있다. 일본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학자가 쓴 이 책은 식료의 생산에서 유통과 소비에 이르는 전 과정을 가리키는 ‘푸드 시스템’의 측면에서 음식을 매개 삼아 식민지 조선의 실태를 재구성해 보여준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탄소 배출량 외주화를 고발하다
재앙의 지리학 로리 파슨스 지음, 추선영 옮김, 오월의봄 |
캄보디아 프놈펜 변두리 벽돌 공장의 가마에서는 세계적인 유명 브랜드를 포함해 오로지 옷가지들만을 땔감으로 삼아 벽돌을 굽고 있었다. 연료가 되어 불타는 옷가지들의 상당수는 폐기물 무역을 통해 유입된 쓰레기 더미에서 수거해 온 것이었다. 이렇게 생산된 벽돌들은 세계 각지로 팔려 나가 도시의 건물들을 세우는 데 쓰이지만, 그 과정에서 나오는 온실가스 배출량은 벽돌 생산지인 가난한 나라들의 몫으로 돌아간다. ‘재앙의 지리학’은 이런 불합리한 구조를 겨냥한다. 지은이는 자신의 조국인 영국을 비롯한 부유한 나라들이 자국에서 소비되는 재화의 생산에 필요한 탄소 발생량을 가난한 나라들로 ‘외주화’하는 현실을 고발하며, 소비자들의 혜안과 적극적 개입을 촉구한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국가는 합리적 행위자’ 가설의 명암
국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존 미어샤이머·서배스천 로사토 지음, 권지현 옮김, 서해문집 |
미국의 대표적인 현실주의 정치학자들이 “국가는 합리적 행위자”라는 가설을 20세기 초부터 최근까지 한 세기에 걸친 국제정치의 실례들을 들어 논증한 책.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의 소련 침공과 일본의 진주만 공습, 미국의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 확전, 미국의 쿠바 침공과 이라크 침공 등 흔히 ‘비합리적’이라고 여겨지는 결정들이 당시 해당 국가로서는 합리적인 결정이었음을 하나하나 논박하고, 국가의 합리적 판단을 위한 조건들을 제시한다. 여러 국가가 참여하는 국제정치라는 무대는 정보가 부족하고 매우 불확실한 세계이므로, 국가는 늘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도록 강제될 수밖에 없다는 논리다. 강대국 중심의 힘의 논리를 정당화한다는 반론을 피하기는 어렵다.
조일준 선임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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