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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6 (월)

“이젠 부활해야죠”…‘명인’ 타이틀 거머쥔 박정환 9단의 ‘야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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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초 진출했던 주요 세계 기전서 잇따라 고배
슬럼프의 순간, 생애 첫 ‘제47기 명인전’ 우승
분위기 반전 꾀한 박 9단, ‘춘란배’서 선전 다짐
신진서 9단 이을 차세대 주자 부재는 아쉬워
K바둑계에 선순환적 생태계 위한 대책 필요
한국일보

지난 13일 서울 성동구 한국기원에서 만난 박정환 9단은 “그 어느 때보다 힘들었던 올해였지만, ‘제47기 SG배 한국일보 명인전’ 우승을 통해 전환점을 마련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한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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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도 간절했습니다.”

오랜 가뭄 끝에 내린 단비를 연상케 했다. 예상 못했던 슬럼프 기미에 분위기 반전이 절실했던 순간, 어렵게 거머쥔 우승 트로피였던 터였다. 프로 입단 이후, 꿈꿨던 생애 첫 타이틀 획득이란 측면에선 짜릿함도 더했다. 국내 최고 권위의 프로 바둑 기전인 ‘제47기 SG배 한국일보 명인전’(우승상금 7,000만 원)에서 우승한 박정환(32) 9단이 “그 어느 해보다 올해는 정말 힘들었다”며 내비친 뜻밖의 속내였다.

지난 13일 서울 성동구 한국기원에서 만난 박 9단은 ‘명인’ 반열에 오른 소감보단 그동안 남모르게 겪어왔던 마음고생 귀띔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평소 내성적 성격의 박 9단이었기에 인터뷰 초반부터 그가 전한 가려졌던 속사정엔 호기심도 발동했다. 고 조남철 9단에서부터 고 김인 9단과 조훈현(71) 9단, 이창호(49) 9단, 이세돌(41·은퇴) 9단의 뒤를 이어 명실공히 한국 바둑의 1인자 계보를 계승한 박 9단이었기에 더 그랬다.
한국일보

지난 2010년 중국 광저우 아시안게임 바둑 남자단체전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박정환(앞줄 맨 오른쪽) 9단이 팀원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한국기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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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 입단(2006년) 이후, 통산 1,131승 1무 421패(승률 72.87%, 15일 기준)를 기록 중인 박 9단은 자타공인 K바둑계의 간판스타다. 지난 2013년 12월~18년 9월까지 59개월 연속 국내 랭킹 1위 자리만 고수했던 그에겐 당시 ‘무결점 바둑’이란 별명도 주어졌다. 현재 세계 랭킹 1위인 신진서(24) 9단의 등장 직전, 국내·외 바둑계를 주름잡았던 주인공이 박 9단이다. 글로벌 반상(盤上) 권력의 가늠자인 세계 메이저 기전 타이틀 5개를 포함해 지금까지 각종 기전에서 박 9단이 적립한 우승컵만 36개에 달한다. 그는 지난 2010년과 2023년 각각 중국에서 개최됐던 아시안게임 바둑 종목에서도 총 3개의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신 9단에게 현재 권력을 내주긴 했지만 박 9단은 최근 3년 동안 평균 70% 이상의 승률 유지로, 내구성에서 아직까진 상당한 경쟁력도 확보하고 있다. 이처럼 화려한 반상 족적을 자랑했던 박 9단은 자신에게 “2024년은 결코 잊지 못할 한 해였다”며 말문을 이어갔다.

‘제2전성기’ 기대했지만 잇따라 세계대회 결승 진출 실패…슬럼프 위기도

한국일보

지난 13일 서울 성동구 한국기원에서 만난 박정환 9단이 국내 최고 권위의 프로 바둑 기전인 ‘제47기 SG배 한국일보 명인전’(우승상금 7,000만 원) 우승을 확정한 결승(3번기·3전 2선승제) 2국에 대해 복기하고 있다. 이한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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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출발은 좋았어요. 스스로에게 기대가 될 만큼 괜찮았거든요. 근데 한순간에 꼬이기 시작하더니, 계속해서 얽히기만 했습니다.” 어두운 표정으로 전한 그의 2024년은 아쉬움만 남겨진 듯했다.

실제 올해 초반 박 9단의 반상 포석은 완벽에 가까웠다. 주요 세계 메이저 기전인 ‘제2회 취저우 란커배 세계바둑오픈전’과 ‘제10회 응씨배 세계프로바둑선수권대회’, ‘제29회 LG배 기왕전’, ‘제1회 난양배 월드바둑마스터스’, ‘2024 삼성화재배 월드바둑마스터스’, ‘제15회 춘란배 세계바둑선수권전’ 등에서 모두 본선에 진출한 것. 웬만한 프로 바둑 기사는 이 중 1개 대회 예선 통과조차 버거운 기전들이다.

바둑계 내부에서 박 9단에게 ‘제2의 전성기’가 찾아온 것 같다는 호평이 쏟아졌다. 하지만 한 해 마무리를 앞둔 현재, 그는 ‘춘란배’에서만 생존한 상태다. “유리했던 상황에서 허무하게 패했던 경기가 많았어요. 아직은 괜찮다고 생각했던 순발력이 떨어지면서 가져온 결과였습니다. 제 자신에게 굉장히 화도 많이 났고 실망감도 컸어요. 솔직히 자신감까지 많이 떨어졌습니다.” 악몽과도 같았던 기억을 애써 떠올린 그의 표정에선 괴로움이 역력했다. 30대에 접어들었지만 승부사로서 20대 초·중반 기사들과 반상 맞대결에서도 여전히 건재함을 과시하고 싶었던 그의 태생적인 기질로 읽혔다.

‘명인전’ 타이틀로 전환점 마련…지지부진한 K바둑계 세대교체엔 쓴소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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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3일 서울 성동구 한국기원에서 만난 박정환 9단은 “이번 ‘제47기 SG배 한국일보 명인전’ 우승에서 얻은 기세를 앞으로 다가올 세계대회에서도 이어가면서 좋은 결과도 가져오겠다”고 다짐했다. 이한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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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와중에 거머쥔 ‘명인전’ 우승 트로피는 그에겐 각별했다. “명인전은 프로 입단과 동시에 너무나 우승하고 싶었던 기전이었어요. 더구나 어떤 형태로든 돌파구가 필요했던 현재 제 입장에서도 명인전 우승컵의 무게는 남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부진의 늪으로 빠질 수 있었던 길목에서 따낸 ‘명인’ 타이틀이 그에겐 터닝포인트로 작용할 것이란 얘기였다. 지금까지 47차례에 걸쳐 진행됐던 ‘명인전’ 우승은 박 9단을 비롯해 불과 11명에게만 허락됐다.

박 9단은 냉철했던 자가 진단 이후엔 지지부진한 K바둑계의 세대교체와 관련된 쓴소리도 빼놓지 않았다. “냉정하게 따져보면 지금 신진서 9단의 뒤를 이어갈 국내 차세대 주자가 눈에 띄지 않습니다. 20대 초반에서부터 두터운 계층을 형성한 중국에 비하면 초라할 지경입니다. 뭔가 특단의 대책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조만간 중국에 세계 최강의 자리를 내줄 것이란 게 그가 바라본 K바둑계의 현주소였다.

이런 맥락에서 연말 ‘춘란배’나 내년 초 한·중·일 국가대항전으로 열릴 ‘농심신라면배 세계바둑최강전’은 박 9단과 K바둑계엔 중요하다. “한국 바둑의 안정적인 세대교체를 위해선 시간이 필요해 보입니다. 제가 ‘명인’ 타이틀 획득으로 얻게 된 기세를 다가올 세계대회에서 꼭 이어가야 할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의 시선은 이미 17일 예정된 ‘춘란배’ 기전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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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재경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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