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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4 (토)

한반도 게임: 미·중 전쟁과 코리안 딜레마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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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재윤의 슬픈 중국: 변방의 중국몽

조선일보

1950년 6월 27일 유엔안보리 총회에서 59개 회원국이 북한의 대남 침공에 대한 군사 작전을 표결하고 있다. United Nations Photos #64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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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7일 발의된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에는 “북한·중국·러시아를 적대시하고 일본 중심의 기이한 외교를 고집했다”는 점이 탄핵 사유의 하나로 명기돼 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12월 10일 여러 미국 동아시아 전문가들은 한·미·일 3국 공조 강화는 절대로 탄핵 사유가 될 수 없다고 강력하게 비판했다. 상식적으로 대통령의 외교·안보 정책이 탄핵 사유가 될 수 없을뿐더러 한·미·일 공조는 환태평양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핵심축이기 때문이다. 거대 야당이 탄핵의 사유로 그처럼 부당한 논거를 포함했다는 사실은 국제정세를 보는 그들의 시각이 1980년대의 낡은 운동권적 세계관에 포박당해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오늘날 세계는 제2차 미·중 전쟁을 목도하고 있다. 제1차 미·중 전쟁은 바로 1950년에서 1953년까지 한반도에서 일어난 6·25전쟁 혹은 한국전쟁이었다. 2차대전 이후 사상 최대 규모의 병력 감축을 추진하던 미국은 한국전쟁을 계기로 다시 군비를 증강하여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세계 140여 국가에 주둔지를 확보한 세계 최강의 글로벌 군사 대국으로 성장했다. 미국이 주도하는 자유주의 국제질서에서 대한민국의 중요성은 전 세계 그 누구도 부정할 수가 없다. 미국 동아시아 전문가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듯 한·미·일 공조는 대한민국의 국제적 위상과 전략적 중요성을 제고하는 가장 효과적인 외교 정책이다.

지난 4년간 3부에 걸쳐 연재해 온 “슬픈 중국”에서는 그 마지막 기획으로 이번 주부터 3회에 걸쳐서 “한반도 게임: 미·중 전쟁과 코리안 딜레마”라는 제목으로 한국을 끼고 도는 국제정세의 냉혹한 현실을 짚어보려 한다.

대한민국, 서태평양 자유 진영의 린치핀

린치핀(linchpin)은 수레의 두 바퀴를 바깥에서 굴대(axletree, 축)에 고정하는 쇠막대나 철사 등을 말한다. 아무리 강력한 철근 굴대를 가진 튼튼한 수레일지도 린치핀이 빠지면 바퀴가 굴대에서 빠져나가 해체되고 만다. 바퀴 중심 밖으로 나온 굴대에 린치핀을 잘 끼우면 바퀴와 굴대는 절대로 분리되지 않지만, 바퀴를 굴대에서 분리하려면 린치핀만 빼면 된다. 작고 단순한 부속이지만, 린치핀이 부서지면 수레는 굴러갈 수가 없다. 바로 그런 이유로 학술논문이나 언론매체에서도 흔히 핵심 인물이나 주요 사항을 가리켜 린치핀이라 부른다.

미국 국무부 수뇌부의 전략가들이 1948년 8월 15일에 세워진 신생국 대한민국을 린치핀으로 인식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1950년 6·,25전쟁이었다. 전쟁 발발 직후 미국 트루먼(Harry Truman, 1884-1972) 대통령은 이 도발이 스탈린이 이끄는 세계 공산 진영의 군사적 팽창주의의 최초 신호탄임을 대번에 간파했다. 북한 김일성이 소련제 중화기로 무장한 인민군을 몰고서 38선을 넘어 남침했기 때문이었다. 기민하게 유엔안보리 총회를 열어 미국과 유엔 회원국의 신속한 참전을 결정한 트루먼 행정부는 실로 놀라운 지도력을 발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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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레의 바퀴와 굴대를 연계하는 린치핀, wikipedi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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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0월 24일 창설된 유엔은 트루먼의 강력한 드라이브에 이끌려서 “안보리 결정안 82”를 채택했다. 인류가 사상 최초로 유엔의 명의 아래 위기의 대한민국을 구출하기 위한 국제전을 수행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1950년 6월 27일 즉각 전 세계에 공포된 트루먼 선언문엔 다음 의미심장한 구절이 등장한다.

“의심의 여지 없이 한국에 대한 공격은 공산주의가 독립국들을 침략하기 위해서 (내적인 체제) 전복의 방법을 이미 넘어섰으며, 이제 앞으로는 무장 침략과 전쟁을 자행할 것이란 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공산 세력은 국제 평화와 안전을 지키기 위해 유엔안보리가 내린 명령을 거부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산 세력에 의한 포르모사(Formosa, 대만) 점령은 태평양 지역의 안보와 그 지역에서 합법적이며 필수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미군 병력에 직접적 위협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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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0월 태평양 웨이크섬에서 만난 트루먼 대통령과 맥아더(Douglas McArthur, 1880-1964) 사령관. wikipedi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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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발발 사흘째인 6월 28일 일본에서 이륙한 미 공군 B-26 전투기가 최초로 인민군 보급로를 폭파했다. 바로 다음 날 B-26은 38선 넘어 평양 공항을 폭격했다. 북한의 기습 공격에 대항하여 미국은 최대한 신속하게 반격을 가했다. 1949년 6월 30일부로 주한미군은 이미 철수를 완료한 상태였다. 전쟁이 터졌을 땐 미 군사고문단(Korean Military Advisory Group) 500명 정도가 한국 땅에 남아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미국은 어떻게 그토록 신속하게, 왜, 어떤 절박한 이유에서 유엔군을 이끌고서 대한민국을 구하는 전쟁을 감당할 수 있었을까?

이 질문에 관해선 1950년 4월 6일에 작성된 미국 국무부 국가안보위원회 보고서 68(이하 NSC 68)이 결정적 단서를 제공한다. 냉전 시기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구축·관리하는 미국의 세계 전략이 담긴 이 중대한 문서는 한국 현대사를 결정했다. 과연 이 문건 속에는 어떤 내용이 담겼는가? 이 문건은 6·25전쟁 발발 이후 미국의 세계 전략에 과연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케넌의 “봉쇄 전략”과 “애치슨 라인”

1952년 미국 대선에서는 2차대전 당시 서유럽 전선에서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지휘한 아이젠하워(Dwight Eisenhower, 1890-1969) 장군이 공화당 후보로 나왔다. 그해 미국 대선에서 가장 첨예한 논점은 2년 넘게 지속된 한국전쟁이었다. 아이젠하워 장군은 지리멸렬하게 질질 끌고 있는 한국전쟁이 애당초 왜 일어나야만 했나를 날카롭게 추궁하면서 애치슨(Dean Acheson, 1893-1971) 국무장관이 1950년 1월 12일 워싱턴 D.C. 국가 프레스 클럽 연설문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비판했다.

미국의 대외 전략을 요약한 애치슨의 이 연설은 중국이 공산화된 지 3개월 지나고 6·25전쟁이 발발하기 5개월 전에 이뤄졌다. 애치슨은 서태평양 미국의 전략적 방어선(strategic defense line)을 논하면서 일본, 오키나와, 필리핀 등을 열거하면서, 놀랍게도 그 방어선 안에 남한과 대만은 직접 언급하지 않았다. 사후 학자들은 일본에서 오키나와를 거쳐 필리핀으로 이어지는 미국의 서태평양 방어선을 ”애치슨 라인“이라 명명했다. 미국이 고의로 애치슨 라인을 제시함으로써 스탈린과 김일성의 침략전쟁을 유도하고 부추겼다는 반미주의적 수정론(revisionism)의 근거가 되었다.

미국에서 최초로 애치슨의 발언에 일반 대중이 주목하게 된 계기는 1952년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주어졌다. 아이젠하워는 에치슨이 1950년 1월 12일 연설에서 남한과 대만을 미국이 전략적 방어 둘레(defense perimeter) 안에 구체적으로 포함하지 않는 결정적 실책을 범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스탈린과 김일성의 침략 야욕을 부추겼다고 비판했다. 이에 대항해 애치슨은 그날 그 발언을 통해서 자신은 대한민국과 대만에 대한 포기 의사가 아니라 서태평양에 대한 미국의 방어 의지를 표명했다고 항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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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에서 195년까지 미국 국무부 장관직을 수행한 딘 애치슨(Dean Acheson, 1893-1971)


실제로 그날 애치슨의 발언을 꼼꼼히 뜯어 보면, 그가 고의로 한국과 대만을 서태평양 미국 방어 둘레(defense perimeter)에서 제외했다고 볼 순 없음이 분명하다. 그는 한국, 대만뿐만 아니라 호주와 뉴질랜드도 언급하지 않았다. 같은 연설문에서 그는 2차대전 후 독립을 얻는 모두 5억 명에 달하는 아시아 여러 국가를 하나씩 거명하면서 ”남한 2천만 명(southern Korea with 20 million)“ 국민을 분명히 언급했다. 특히 그는 아시아 여러 독립국에 대한 공산 세력의 침투 가능성을 논하면서 동남아와는 달리 동북아에 대해선 미국이 직접적 책임을 지고 있음을 강조했다. 애치슨은 일본에 대한 미국의 직접적 책임을 논하면서 ”그 정도는 다소 약하지만 한국에 대해서도 미국은 직접적 책임을 갖는다(The same thing to a lesser degree is true in Korea. There we have direct responsibility)“고 분명히 밝혔다. (”Secretary of State Dean Acheson’s Speech, Crisis in Asis: An Examination of U.S. Policy,“ Jan. 12, 1950, Department of State Bulletin, XXII No. 551: 111-118).

요컨대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공식 출범한 상황에서 한국과 대만이 공산 세력의 군사적 침략에 노출돼 있음을 미국 정부가 모르지 않았다. 애치슨을 비롯한 미국 트루먼 정권의 핵심 인물들은 그 누구도 대한민국과 대만을 공산 세력에 넘겨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다만 그들은 전 세계의 전략적 요충지에만 방어선을 친다는 당시 미국 정부의 기본적 봉쇄 전략을 채택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 봉쇄 전략은 2차대전 이후 냉전 시기의 미국 외교·안보 전략의 기본 노선을 설계한 조지 케넌(George Kennan, 1904-2005)의 머리에서 나왔다.

1946~1947년 소련이 본질적으로 팽창주의적이라는 점을 지적하면서 케넌은 소련의 팽창을 막기 위해선 미국이 ”필수적인 전략적 중요성(vital strategic importance)“을 갖는 지역에만 집중적으로 방어선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케넌의 전략적 분석은 애치슨의 1950년 1월 연설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애치슨은 바로 그 필수적인 전략적 요충지에 한국과 대만을 포함하지 않았다. 쉽게 말해 일본 본토, 오키나와, 필리핀 등지의 주둔 병력만으로 한국과 대만까지 방어할 수 있다는 다소 느슨한 군사전략이었다. 미국으로선 국가 재정상 2차대전 과정에서 무려 1,200만 명 이상으로 불어난 대규모 군 병력을 최소의 정예부대로 감축할 필요가 있었다. 바로 그러한 국가적 필요에 따라서 케넌은 소련 팽창주의를 막는 가장 효과적 방법으로 군사력 억지력과 장기적 인내를 요구하는 ”봉쇄 전략(Containment Strategy)“을 제시했다. 이 노선은 김일성이 남침하기 이전까지 미국의 기본 노선이었다. 6·25전쟁 발발은 바로 그러한 미국의 기본적 외교·안보 정책을 근본적으로 뒤바꾸는 획기적 사건이었다.

”NSC 68,“ 니체의 ”롤백 전략“

1950년 4월 7일 미국 국가안보위원회(NSC)는 66쪽의 극비 보고서 ”국가안보를 위한 미국의 목적과 정책(이하 NSC 68)“를 트루먼 대통령에게 전달하고 브리핑했다. 에치슨이 문제의 연설문을 낭송하고 석 달쯤 지나서 6·25남침을 고작 두 달 반 남겨둔 시점이었다.

미국 역사학자 메이(Earnest May) 교수가 지적한 대로 이 문서는 1950년부터 1991년 소련 멸망까지 미국의 군사·외교 노선과 세계 관리 정책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를 제공한다. 미 국무부 정책 계획 감독 폴 니체(Paul H. Nitze, 1907-2004)가 맡아서 작성한 이 보고서는 미국 국제전략의 근본적 수정을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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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국가안전위원회가 1950년 4월 7일에 보고한 기밀문서 “NSC 68”(왼쪽)와 이 보고서를 주도적으로 작성한 폴 니체(Paul Nitze, 1907-2004). wikipedi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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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위협은 공화국(미국)뿐만이 아니라 문명 자체를 파괴할 수 있다”는 무시무시한 경고를 담은 이 보고서는 당시 트루먼 행정부에서 가장 강경한 매파(hawks)의 논리를 담고 있었다. 소련 핵무장, 중국 공산화, 유럽과 일본의 경제적 위기가 중첩적으로 일어는 당시 상황에선 공산 세력의 팽창주의에 맞서는 미국의 적극적 대응이 필수적이며, 따라서 그에 상응하는 대규모 군사비 지출이 불가피하다는 논리였다. 냉철하면서도 비장한 어조로 니체는 소련 스탈린의 팽창주의 야욕이 단순히 러시아 및 그 위성 국가들에 머물지 않고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등지의 자유 진영 국가들에 대한 무력 침공과 공산화 전략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경고했다.

1950년 초반 긴장 어린 국제정세를 반영한 이 보고서는 2차대전 후 역대 최대 규모의 군비 감축을 추진해 온 미국 정부를 향해 이제는 대규모 군비 증강이 필요할 때임을 강조했다. 소련의 군사적 팽창주의를 막기 위해선 케넌처럼 가장 주요한 전략적 핵심 지역뿐만 아니라 전 지역에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미군 방어망을 쳐야 한다는 주문이었다.

니체는 소극적 봉쇄 정책이 아니라 공산 정권의 교체까지 시도하는 적극적 ”롤백(rollback, 역행)“ 전략을 제시했다. 2차대전 과정에서 독일, 이태리, 일본의 파시즘 체제를 무너뜨리고 민주주의를 이양한 미국의 군사적·정치적 개입이 가장 대표적 ”롤백 전략“의 성공 사례였다. 이후 한국전쟁 과정에서 인천상륙작전으로 38선 이남을 수복한 후 전개된 유엔군의 이북 점령 작전도 바로 ”롤백 전략“의 일환이었다. 물론 중국의 참전으로 실패로 끝나고 말았지만, 당시 유엔군은 국제법을 어기고 전쟁을 일으킨 북한 공산 정권을 무너뜨리고 자유 진영의 진지를 확대한다는 롤백 전략을 추진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1950년 4월 7일 니체의 기밀문서 ”NSC 68“을 전해 받고서 그 중요성과 시급성을 즉각 인정한 트루먼 대통령은 닷새 후인 4월 12일 국가안보위에 이 정책의 추진에 필요한 예산액을 포함한 상세한 검토를 요구했다. 이 문서의 시의성을 직감한 트루먼의 혜안은 당시 국제정세를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 불과 두 달 열흘 후 소련제 중화기로 무장한 북한 인민군이 김일성의 명령을 받아서 남침을 감행했다. 김일성의 남침 이틀 후인 6월 27일 트루먼 대통령이 그토록 기민하게 유엔안보리 회의를 소집하여 전격적으로 대규모 참전을 결정할 수 있었던 이유 중에 분명 소련 팽창주의의 위험에 경종을 울린 니체의 ”NSC 68”도 끼어 있었다. 이 보고서에 적혀 있는 다음 문단은 스탈린의 군사 지원을 받은 김일성의 6·25남침 전쟁을 예언하고 있는 듯하다.

“소련의 기획은 소비에트 진영이 아닌 나라들에서 정부 조직과 사회 구조를 완전히 전복하고 강압적으로 파괴하여 크렘린에 복종하고 지배받는 제도와 구조로 뒤바꿀 것을 요구한다.” (NSC 68, 6쪽).

한국전쟁은 이 기밀문서가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고된 후 최초로 발생한 공산 세력의 침략전쟁이었다. 바로 그 점에서 “NSC 68”이 6·25전쟁 발발 두 달 전에 이미 미 국무부에서 작성되어 트루먼 행정부의 군사·외교 정책의 큰 방향을 변화시키고 있었음은 대한민국의 운명과 직결되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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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재윤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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