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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4 (토)

스스로 왕자가 된 소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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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강성곤의 뭉근한 관찰]

여성들이 다 했다

’정년이’의 성공 스토리

조선일보

최고의 여성국극 배우에 도전하는 정년이(김태리)를 둘러싼 경쟁과 연대, 성장기를 그린 드라마 ‘정년이’. /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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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은 충남 보령에서도 외진 곳. 읍내에 가려면 버스 타고 한참을 가야 했다. 동네에서 이장 선거가 있었는데 옆에 계시던 어머니의 조용한 한마디. “나도 이장이 되고 싶었다”. 의외였다. 그날 이후 언젠가 시골 여성이 품는 욕망에 대해 쓰고 싶었다.

서이레. 웹툰 글 작가. 화제성과 시청률, 둘을 잡은 드라마 ‘정년이’의 원작자다. 국문과⸱문창과 학생의 통과의례인 ‘한국문학통사’를 읽다가 여성국극을 알게 된다. 딱 한 줄 적혀 있어 외려 관심이 돋았다. 6⸱25전쟁 이후 여성들만으로 이루어진 창극이 10년 남짓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는 것. “지방⸱여성⸱국악, 마이너들의 총합으로 이야기를 꾸며 보리라” 마음먹었다. 도서관과 중고책방을 훑고 배우⸱악사들의 구술집과 채록 등을 찾아 헤맸다. 이윽고 2019년부터 시작한 포털 연재는 3년간 지속되며 찬사를 받는다. 우정과 연대로 뭉친 그림 작가 나몬과의 협업 덕이 컸다.

“영화나 드라마처럼 서사의 울림이 있는 작업을 해보고 싶었어요. 배우들의 안면 근육에 늘 주목해 그림과 감정의 매칭을 파고들었죠.” 그러다 운명처럼 ‘정년이’ 작화를 맡게 된다. 여성 피사체 그리기가 주특기였던 터라 날개를 달았다.

이제 ‘정년이‘의 TV화 주역들이다. 먼저 미디어 아티스트 정은영. 2018년 일찌감치 여성국극을 독특한 장르라 여겨 프로젝트 작업을 해온 선구자다. 현대미술을 적극 활용하면서, 성 정체성 테마의 무대극화에 열정을 쏟아왔다. 이번 드라마 ‘정년이’에서 무대 미술작가로 활약했다.

무대 연출가 박민희. “화면에 담기더라도 무대가 주는 힘을 믿었다. 무대에선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누구라도 변할 수 있다.” 여성국극이야말로 전통 규범을 벗어던지고 파격적으로 새로움을 시도했던 공연예술이라고 애정을 표한다. 선배 여성들의 용기가 응축된 것이라 여긴다며 그 정신을 붙들고 ‘정년이’ 무대의 연출 방향을 잡았노라고 말했다.

소리(노래)를 맡은 권송희 감독은 ‘범 내려온다’로 유명한 이날치 밴드의 보컬 출신. 배우들에게 호흡⸱톤⸱몸짓 등 표현 방법을 가르쳤다. 녹음 파일을 수도 없이 틀어놓고 맹연습을 독려하길 3년. 그 열정 덕에 정년이가 속한 매란국극단 멤버들은 마치 실제 단원들처럼 노래할 수 있었다. “국극배우처럼 변신하고 싶어 하는 욕망이 느껴졌다. 나 또한 드라마 ‘정년이’를 완성하는 여정의 동반자란 자긍심이 일었다”고.

몸짓과 동선 담당 안무감독 이이슬. 기초훈련이 부족하면 예쁜 태를 보여줄 수 없기에 기본기 특훈을 시켰다. 배우들은 걸음걸이, 무대 동작, 몸 쓰는 법을 새롭게 익혀야 했다. “이 정도면 괜찮다 싶은데도 끊임없이 욕심내는 배우들의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고 했다.

극본을 짠 최효비 작가. 유연하게 변주를 주면서도 디테일을 놓치지 않는다는 평을 듣는다. 웹툰에서 드러나는 동성애 코드를 연성화하기로 결단했다. TV라는 대중적 매체에 자칫 부담을 줄 수 있고 서사가 복잡다단해질 우려 때문. 드라마의 성공으로 결과적으로 옳은 선택을 한 셈이다.

정지인 감독.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으로 진즉에 섬세한 연출력을 인정받은 인물. ‘정년이’ 론칭을 둘러싸고 불거진 우여곡절을 정면 돌파한다. 지상파와 OTT의 힘겨루기에다 제작 연기? 방영 무산? 등의 곡절을 이겨내고, ‘정년이’를 기어코 대중에게 선보였다. “국극의 평면적인 드라마화를 넘어보자. 과거의 국극이 못했던 걸 우리가 해내자.” 드라마 속 ‘춘향전’ ‘왕자 호동’ ‘바보와 공주’가 실제 국극보다 더 멋진 별천지로 보였던 이유다. 극장에 온 사람들에게 마치 ‘놀이동산’에 온 듯 놀라움⸱감동⸱쾌감을 안기고자 했단다.

십자성처럼 빛난 배우들은 더 말해 무엇하랴. 당찬 아우라에 이물감 제로의 구성진 전라 방언을 구사하며 커리어의 정점을 찍은 김태리. 연기⸱춤⸱노래가 조화로운 트라이앵글을 이뤄 김태리에 버금가는 존재감을 뽐낸 신예은. 영웅과 꽃미남을 오가며 강인함과 섬세함을 조화시켜 독특한 포스를 시전한 정은채. 이 모두가 여성이다. 명실공히 여성 파워, 여성 승리가 아니고 무엇인가. 최근 우리 사회를 우상향으로 추동하는 큰 축은 여성일 터. 안세영 선수가 그랬고 가수 로제도 그렇고 한강 작가는 두말할 나위가 없다.

매란국극단을 진정 이대로 보내긴 아쉽고 아깝다. K컬처의 신상품으로 키울 일이다. K창극이든 K여성오페라든 어떤 이름이라도 좋으리라. ‘왕자가 되고 싶었던 소녀들’에서 여성국극은 출발했다. 그러곤 이제 스스로 왕자가 되었다. 그 꿈이 사그라지면 안 된다. 내년은 푸른 뱀의 해 을사년(乙巳年). 뱀의 단독성은 허물을 벗는다는 점이다. 시작⸱성장을 뜻하며 기회⸱변화를 상징한다. 2025년 제2, 제3의 ‘정년이’가 세계인과 함께하는 원년이 되길.

[강성곤 KBS한국어진흥원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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