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아빠, 걱정 마. 딸래미 좋은 세상 만드는 중.” 지난 10일 저녁, 윤석열 대통령의 즉각 탄핵을 촉구하는 국회 앞 집회에서 맨 앞 줄에 앉은 한 여성 청년은 양손에 손글씨로 메시지를 쓴 스케치북과 응원봉을 각각 들고, 걸그룹 에스파의 ‘위플래쉬’ 리듬에 맞춰 구호를 외쳤다. “윤석열 탄핵, 윤석열 탄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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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일은 윤석열 대통령이 12.3 계엄 사태를 일으킨 지 일주일째 되는 날이었다. 주말이 아닌 평일 저녁인데도 불구하고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거리가 형형색색의 불빛으로 가득 채워졌다. 군데군데 촛불을 든 시민도 있었지만 아이돌 가수 응원봉을 손에 쥔 2,30대 여성 수가 압도적이었다. 집회 1열도 이들의 차지였다. 2016년 박근혜 탄핵 촛불집회 때까지만 해도 집회 1열은 정치인과 노동계 간부나 사회 원로들의 지정석이었다.
뉴스타파가 서울시에서 제공하는 ‘생활인구 데이터’를 바탕으로 지난 토요일(7일) 열린 국회 앞 집회 참석인원을 추산한 결과 전체 참석자 28만 명(최소 기준) 중 17%가 20대 여성으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20~39세까지, 즉 2030 여성을 합치면 전체의 28%에 달했다. 생활인구 데이터는 서울시와 통신사 KT가 공공빅데이터와 통신데이터를 이용하여 추계한 서울의 특정 지역, 특정 시점에 존재하는 모든 인구 정보다.
정체성은 시민, 아이돌 응원봉은 거들 뿐
응원봉을 들고 대통령 즉각 탄핵을 촉구하는 이들의 정체성은 특정 아이돌 팬덤일까, 아니면 한 명의 시민일까? 뉴스타파 취재진이 집회 현장에서 만난 이들은 이와 같은 질문에 주저하지 않고 “당연히 시민 1인이죠”라고 답했다. 평일 저녁이지만 ‘나라도 나가서 머릿수에 보탬이 되겠다’라는 마음도, 분노도 집회에 참석하는 여느 시민의 마음과 동일하다.
이들은 윤석열 대통령의 불법 계엄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입을 모았다. 20대 이은희 씨는 탄핵소추안 표결이 있었던 지난 토요일(7일)에도 국회 집회에 참석해 탄핵소추안이 가결되기를 촉구했다. 10일 저녁에는 어머니와 함께 왔다. 은희 씨의 어머니 박미경 씨는 “저는 원래 정치에 관심이 없는데 이번에는 너무 화가 나는 거예요. 비상계엄이 무슨 말이에요. 딸이 지난 주 토요일에 여기를 왔다고 하길래 제가 오늘 가자고 해서 왔어요”라고 말했다.
지난달 수능을 치렀다는 김동윤 씨는 “내란의힘 해체하라”는 손팻말을 들고, 계엄군이 국회에 들이닥친 “개탄스러운 상황에서도” 탄핵소추안 표결에 불참한 여당을 비판했다. 동윤 씨는 “수능 사회탐구 영역 중 ‘정치와 법’을 응시했다”며 “대통령이 교과서에도 나오지 않고 수능 특강에서도 볼 수 없는 불법적인 행태를 저질렀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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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세대가 집회에 나온 이유는 “소중한 것들을 지키기 위해서”다. 특히 10대 때 세월호 참사를, 20대 때 이태원 참사를 겪은 세대인 이들은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로 인해 일상의 안녕이 위협당하는 위기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서울 강서구에 사는 장현정 씨는 “이 집회에 온 나부터 지키자는 마음으로 왔다”라고 윤 대통령 탄핵 촉구 집회에 참석한 동기를 설명했다. 현정 씨가 지키고 싶은 ‘나’는 “자유롭게 좋아하는 것을 즐길 수 있고, 정치적인 발언을 해도 탄압받지 않는 나”라고 했다.
경기도 용인 주민 박혜민 씨는 “계엄을 처음 겪어 보지만, 21세기에 우리나라에서 이런 일이 말이 되나”라는 생각을 가지고 “작은 변화라도 이끌어 내고 싶은 마음에 집회에 나왔다”라고 말했다. 20대 김단아 씨도 “이전에는 계엄이란 것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12.3 계엄에 큰 영향을 받았다”며 “나를 포함해 소중한 가족, 친구들을 지키고 싶다는 마음”에서 집회에 참석했다고 말했다.
“내 사랑이 이겨”
서울 강동구 주민 임나현 씨는 친구들과 셋이서 함께 집회로 나왔다. 나현 씨 역시 “내 가족, 내 친구, 내 일상 같은 소중한 것을 지켜야겠다는 마음에서 왔다”라고 말했다. 아이돌 그룹 인피니트 팬인 나현 씨는 “사랑이 이긴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추격자’라는 노래에 “내 사랑이 이겨”라는 가사가 있는데요. 사랑이 이긴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순간 나현 씨 눈에 눈물이 맺혔다.
집회에 참석한 2030이 손수 만들어 온 손팻말에는 유독 “~해줄게”라는 말이 많이 적혀 있다. 아이돌 그룹 ‘최애 멤버’의 이름을 쓰고 “리노는 월드투어 해. 나라는 내가 지킬게”, “오아시스 내한공연 할 수 있게 해줄게”, “아빠들 야구 보기 좋은 세상 만들어 줄게’ 등의 다짐은 재치있는 문구 정도로 넘길 수도 있지만 행동의 주체성을 보여주는 지점이기도 하다. 정치권에 특정 요구사항을 촉구하는 문구가 담겼던 과거 손팻말들과는 확연히 달라진 양상이다. 아버지와 함께 10일 저녁 국회 집회에 참석한 한 10대 참석자는 “곧 스무 살이 될 나와 내 친구들아 살기 좋은 세상 함께 만들자!”라는 바람을 손팻말에 담았다.
비상계엄의 짙은 어둠 밝히는 응원봉
2024년 12월 불법 비상계엄 정국에서 응원봉은 ‘민주주의를 지키는 불빛’으로써 시민 저항과 연대의 상징이 됐다. 응원봉은 말 그대로 아이돌 그룹 등의 팬덤이 공연장에서 좋아하는 가수를 응원할 때 쓰는 물건이다.
MZ세대는 지난 2016년 박근혜 탄핵 촛불집회 당시 김진태 당시 여당 국회의원(현 강원도지사)이 했던 “촛불은 바람 불면 꺼진다”라는 발언을 잊지 않았다. 아이돌 그룹 온앤오프의 응원봉을 손에 든 장현정 씨는 “예전에 한 정치인이 촛불은 꺼진다고 해서 꺼지지 않는 가장 단단한 불빛으로 응원봉을 가지고 오게 됐다”고 말했다.
응원봉의 불빛은 MZ세대를 집회로 유인하는 하는 동력이 되기도 한다. 일명 ‘샤팅스타’라고 불리는 샤이니 응원봉을 손에 든 박혜민 씨는 “영상을 봤는데 팬들이 많이 온 것을 보고 ‘아 나도 갈 수 있는 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며 “응원봉을 들고 쉽게 올 수 있는 곳이라는 메시지를 다른 분들께 주고 싶어 응원봉을 가지고 왔다”라고 말했다.
“정말 아끼는 물건을 가지고 힘을 보태는 일”
응원봉은 ‘어둠을 비추는 빛’이라는 측면에서 촛불과 같은 기능을 가지고 있지만, 들고 있는 사람이 ‘정말 아끼는 물건’이라는 의미를 추가로 지닌다. X(엑스, 구 트위터)나 인스타그램 등 SNS에서 응원봉을 검색하면 팬덤에게 응원봉은 ‘내 분신 같은 물건’이라는 설명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7일 저녁, 아이돌 그룹 스트레이키즈 응원봉을 들고 국민의힘 당사로 행진하던 한 20대 여성은 “팬이기 전에 우리나라 국민이라서 집회에 온 것이지만, 제가 정말 아끼는 물건을 가지고 나와서 힘을 보탤 수 있어서 더 의미가 있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응원봉이 집회 현장에 등장한 것이 올해가 처음은 아니다. 2016년 박근혜 탄핵 촛불집회 당시에도 ‘바람 불어도 꺼지지 않는 촛불’이라는 의미를 담은 LED 촛불과 함께 광화문에서 빛을 발했다. 다만 8년이 지난 현재 응원봉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아진 것뿐이다.
2030세대 중에서도 특히 응원봉을 든 여성 청년의 참여가 두드러지는 현상과 관련해 김지선 서울 촛불행동 공동대표는 지난 몇년 동안 차곡차곡 쌓아온 연대의 결과라고 봤다. 김 대표는 “20대, 10대 여성분들이 여성혐오 문제나 성폭력 문제가 사회 구조적 문제라고 인식하고 꾸준히 행동해왔던 흐름이 있다고 생각한다”며 “연대해서 같이 행동하는 것에 익숙하고, 정치를 바꿔야지만 자기 삶이 달라진다는 것을 정확하게 인식한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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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건 절대없어(써!) 결국에 넌 변했지(지!) … 오늘 밤은 삐딱하게.” 2024년 12월 광장에 모인 시민들은 가수 지드래곤의 ‘삐딱하게’를 ‘떼창’하고, 가수 로제와 브루노 마스가 부른 ‘아파트’에 맞춰 춤추며, 걸그룹 에스파 ‘위플래쉬’ 리듬에 맞춰 탄핵 구호를 외치고 그룹 데이식스의 ‘웰컴 투 더 쇼’에 맞춰 행진한다.
아이돌 그룹 소녀시대가 부른 ‘다시 만난 세계’는 2024년 12월 비상계엄이라는 폭력에 맞서는 투쟁가가 됐다. 8년 전 박근혜 국정농단 사태 초기에 이화여대 학생들이 총장 사퇴를 요구하며 경찰의 과잉 진압에 맞서며 이 노래를 부른 것이 시작이었다.
밈(온라인에서 유행하는 용어, 이미지 영상 등)을 활용해 만든 손팻말 문구도 눈에 띈다. 예를 들어, 광고 카피 문구를 활용한 “야, 너도 탄핵할 수 있어”나 “석열아 니 의견 안 궁금해” 같은 문구는 MZ세대 사이에서 유행하는 문화 코드를 이해하는 사람들에게 웃음을 자아낸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MZ세대를 주축으로 변화한 집회 문화에 대해 “탄핵이라고 하는 목표를 설정했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다양하고 많은 시민들이 오래 지속적으로 집회에 참여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케이팝이나 응원봉을 통해 즐거운 시위 문화를 만들고, 많은 사람이 자발적으로 참여하게 한 것이 특이한 점이자 장점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기성세대의 반응, “나만 없어 응원봉”
기성세대는 2030이 주도하는 ‘힙’한 집회 문화를 빠르게 흡수하며 여기에 동참하고 있다. 유튜브 등 각종 SNS에 올라온 집회 현장 영상에는 “나만 없어 응원봉”, “응원봉 구매 방법이 궁금한 아저씨입니다” 등의 댓글이 속속 달린다.
응원봉이 없을 경우 자녀들이나 아내의 응원봉을 빌려서 집회에 참석하기도 한다. 10일 저녁 그룹 에픽하이와 샤이니 응원봉을 양손에 들고 있던 한 중년 남성은 첫째 딸과 둘째 딸에게 응원봉을 빌려왔다고 말했다. 박미경 씨는 일명 ‘돈까스 망치’라고 불리는 NCT 응원봉을 손에 들었다. 딸이 빌려준 것이다. 박 씨는 “딸을 콘서트에 데려다 준 적은 있어도, 제가 응원봉을 들고 어딜 간 적은 없었다"며 집회에 와서 새로운 경험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전에도 여러 시위에 참석한 경험이 있다는 조경봉 씨는 시위 문화가 바뀐 것을 실감한다며 청년 세대가 “주인이 돼 바꾼 축제 같은 시위 분위기”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네 아이의 아빠이기도 한 조 씨는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하는 젊은 세대에게 너무 감사하고, 기성세대로서 많이 미안하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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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세대가 적극적으로 집회에 참석하고, 시위 문화를 바꾸어 가는 현상을 두고 구정우 성균관대 교수는 “완전히 민주화된 분위기 속에서 자란 세대가 소유한 자신감”에서 그 근원을 찾았다. 구 교수는 “이미 우리가 민주주의를 성취했기 때문에 이것을 쉽게 뺏기지 않는다는 민주주의에 대한 자신감과 문화적인 확신이 바탕이 된 것”이라고 말했다.
구 교수는 이러한 변화를 보며 “법률을 통해서 사회 질서를 만들 수 있고 사람들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던 정치인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하나의 사건이라고 생각한다”며 “응원봉으로 상징되는 변화에 대한 갈망이 연성권력으로 펼쳐지며 기존의 정치인들을 압박하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뉴스타파 이명주 silk@newstap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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