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문학상 후보로 꼽혀온 일본 작가 다와다 요코(64)의 2016년 사진. 애국심 같은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작가가 후쿠시마 원전사고를 계기로 개인 너머를 파고 든 작품이 ‘헌등사’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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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와다 요코 지음, 유라주 옮김, 민음사, 1만5000원 |
21세기, 어떤 장르소설도 압도할 시국이 시현 중이다. 고발이 필요한가, 분노가, 조롱이 필요한가, 위로가 필요한가. 아니면 그 모두로도 부족한가.
때마침 일본 작가 다와다 요코(64)의 2017년 작품집 ‘헌등사’가 새 번역으로 국내 재출간되었다. 중단편 5편으로 구성된 소설집이다. 짐짓 가만한데 장황하고 무심하나 풍자적인 필치로, 종국에 신랄하기 이를 데 없다. 불온한 상상은 불온한 현실의 그림자일 뿐이라, 요코의 어떤 초현실주의조차 지독한 리얼리즘이다.
작품들 가운데서도 ‘피안’만은 윤석열이, 김용현이, 여러 의원들이 보지 않길 바란다.
비행기 한 대가 지상으로 추락 중이다. 새가 기체에 들어간 탓이다. 조종사는 찰나지만 스스로가 한심스럽다. 본래 호흡기가 약했으나 “굳이 남자답고 위험한 일을 하려다가” 이 사달이 났다. “지루한 아시아의 섬나라에서 하찮은 공장에 충돌해 죽다니, 너무 한심해서 웃음마저 안 나온다. 너무 무의미하다.”
이 페이소스는 결코 페이소스로 감상되지 않는다. 거짓 ‘페이소스’의 발각과 전유를 이 작품 전반의 형식적 기조라고도 꼽아볼 텐데, 가령 내란 사태 뒤 김용현의 “기도해 달라”, 이상민의 “행복했다”, 윤석열의 “저의 뜨거운 충정” 따위가 왜 조소를 부르는지 알 만해진다.
문제는 개인적 연민의 후과가 실로 거국적이란 데 있다. 비행기가 떨어진 곳이 하필 원자력 발전소다. “재가동은 예상외의 일이 일어나지 않는 한 반드시 안전하다”는 결론에 따라 한달 전 재가동했다. 이 과정에서 정치인과 이해 관계자들 사이 “옛날식 비리”가 있을 거라 작가는 보지 않는다. 시기가 어느 때인가. 그들이 과거 접대 때 즐겨 먹던 “고급 생선”도 더는 잡히지 않는다. 이제는, 무의식적으로 동의하고, 동의하면 대가가 지불되는 시스템 사회다.
추락 이후 덤덤히 묘사되는 실상은 1945년 8월6일 히로시마 원폭과 2011년 3월11일 후쿠시마 원전사고에서 목도된 것의 재생일 터. 몇 초 사이 “…하늘의 고막이 찢기고 …거대한 화염 바퀴가 떠올라 내륙으로 굴러 들어간 뒤 …죽음이 가루를 흩뿌리며 …고등학생들은 폭음에 뺨을 맞고 …기침이 멈추지 않고 …앞뜰의 흙을 얼굴에 문지르다가 그대로 흙이 돼버”린 이들, 길 위에서 녹아버린 이들, 좀비처럼 물가로 뛰어든 이들, 이후 오랫동안 “바비큐 꼬치를 팔과 손의 뼈 근처까지 찔러 넣어서 숯불로 계속 달구는 듯한 아픔”의 화상과 싸우는 이들로 넘친다. 이윽고 일본인들은 결론을 내린다. “…살아남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일본을 떠나는 것이다.”
또 하나의 ‘우화’가 촉발되는 지점이다. 중국, 러시아 등지 이웃 국가로 도피하려는 바다 난민 행렬 중 참의원 세데 이쿠오가 주인공이다. 중국이 제약 없이 일본인들을 수용하겠다는 소식에 모두 안도할 때, 홀로 창백해진 이다. 연기 지망생으로 “술을 마시던 바에서 정치의 길을 권유받고” 정치인이 된 세데는 지난 몇 년 동안 앞장서 중국 혐오 발언을 쏟아냈다. 비전과 세계관 때문은 아니었다. 우연히 내뱉은 “저열한 지적 수준”의 혐오 발언에 본인도 아찔해하던 차, 자신을 오랫동안 괴롭힌 발기 부전이 잠시나마 치유된 것을 알고 놀란다. 지난 혐오 발언을 ‘상기’만 해도 “하반신이 뜨거워졌다.” 게다 다음 선거에서 지지자는 더 늘어있는 게 아닌가. “대국을 두려워하지 않고 남자답게 용감한 발언을 한다”는 충정들.
여기서 잠깐 끊어야겠다. 다와다 요코는 한강 작가보다 앞서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명되어 온 작가다. 가장 최근치 국제문학상이 ‘헌등사’로 받은 2018년 전미도서상 번역 부문(영어판), 지난해 프랑스 프라고나르상 외국어문학 부문(불어판)이다.
혐오 발언하는 동료 정치인들의 “비열한” 속내를 꿰뚫어 볼 줄 알던 세데는 사념한다. 입국이 되더라도 자신만 박해를, 사형을 당하겠다. 세데는 제 “인생에서 거의 써 본 적이 없는 ‘노동자’라는 단어”를 떠올리며, 대국의 그저 존재감 없는 “노동자로 받아들여지고 싶다.” 두려움 속에 진행된 입국 절차. 서류 말미 뜻밖의 질문이 적혀 있다. “조선 연방 이주를 희망합니까?” 세데는 한국과 북한에도 망언을 한 적 있다. 지속하진 않았다. 발기 부전에 효과가 없었다. “큰 나라에 덤벼야 비로소 남성 호르몬이 나온다.” 중국어를 모르는 세데는 한참 또 머리를 굴린 뒤 “조선 이주 가능?”이라고 한자로 적어 되묻는다. 중국 여성 공무원이 필답했다. “크고 힘 있는 글씨”로, “불가”.
‘남자들의 놀이’에 도취한 자들이 영원히 발기 부전, 발진 불가의 세계로 내몰리는 ‘피안’은, 줄거리가 아니라 작가의 태도로 표표하다. 작가는 짐짓 에포케(판단중지)의 상태에서, 자신에게 ‘드러나는 대로’의 사태를 자신의 언어로 죄다 옮겨내겠다는 듯하다. 전통의 서사 구조를 개의치 않는다. 추락 중 조종사의 상념, 전투기 추락과 무관한 여객기 추락 사고의 진상, 중국인 여성 공무원과 필담이 가능하자 순식간에 소통의 낭만, 나아가 신혼생활까지 상상하다 결혼 뒤 제 과거가 들통나 처형되면 젊은 아내가 가여워진다는 ‘진심을 다한 망상’까지, 맥락 없이 너절히 펼쳐지는 식이다. 언어적·맥락적 유희랄까. 요코를 수식해 온 평가대로라면 소설이 “일종의 퍼포먼스”가 되는 경지다.
‘피안’이 정치 세계라면, ‘헌등사’는 인류 세계다. 원전사고로 오염된 일본서 새로 태어나는 이들이 자랄수록 질환과 장애가 발달해 결국 조기 사망하는 가상을 그린다. 반면 기성세대는 100살을 훌쩍 넘긴다. 뛰어다닐 만큼 건강하다. 소설은 작중 소설 쓰는 요시로가 115살, 증손자 무메이가 15살에 이르기까지의 세태 변화를 또한 무한히도 펼쳐낸다. 외견상 추리자면, 정부가 민영화되고 쇄국정책을 펼치고 가족이 형해화하고 오키나와나 되어야 채소 과일이 구해지는 시대까지인데, 요코는 그 ‘지경’에서야 성별·나이가, 능력의 정의가, 정·오답의 구분이 무의미해짐을 내막에서 감지하도록 했다. 디스토피아로부터의 유토피아다. 그때 중요한 것이 바로 언어와 노마드(유목) 관념이다. 이항대립적 단절과 절멸을 넘어서는 방편이자 목적 자체다. 인류의 과오로 탄생한 “병아리”처럼 무력한 무메이(無名) 즉 ‘무명씨’가 인류의 희망을 불 밝혀 간다는 뜻이 제목 ‘헌등사’로 집약돼 있다. ‘피안’에 등장하는 노동자와도 같다 하겠다. 저기, 저들이 불 들어 밝힌 ‘헌등사’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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