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한강 작가가 11일(현지시각) 스웨덴 스톡홀름의 한 출판사에서 기자간담회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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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보다 훨씬 긴 밤이 찾아오는 스톡홀름의 겨울은 혹독하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 한강은 이 어둠의 한 자락을 은은히 비추며 12일(현지시각)로 노벨상 수상을 축하하는 모든 일정을 마쳤다. 지난 5일부터 시작돼 이날로 끝을 맺은 ‘노벨 주간’의 마지막 밤, 18세기 건물 스웨덴 스톡홀름의 왕립 연극 극장 메인홀에선 작가 한강의 작품이 배우들의 목소리를 통해 흘러나왔다.
문학을 통해 우리 모두를 하나의 “금실”로 이어준 한강의 지난 일주일을 되돌아본다.
‘쓰는 사람’에게 노벨 문학상 수상은 최고의 영예일 것 같지만, 한강에겐 이 또한 글을 쓰며 통과하는 하나의 길목이었다. 그는 지난 11일 한국 취재진과 한 기자회견에서 “(노벨상 수상자) 강연문을 쓰며 내가 지금 어디쯤에 있는지 좌표를 알게 됐다. 내가 어디에서 출발해 여기까지 왔는지, 스스로를 파악하게 됐다는 의미가 있다”며 이제 “조용한 일상으로 돌아가 쓰려고 했던 ‘눈 3부작’ 마무리를 하고 싶다”고 전했다. 문학상 수상을 기념해 자신의 이름을 딴 문학관 건립 이야기가 나오는 것에 대해서도 “어떤 일을 하고 싶다면, 책 속에서 무언가를 찾는 게 더 좋다는 생각이 든다. 제 책을 읽어주시는 게 제일 좋다”며 간곡히 사양했다.
하지만 작가가 하는 일의 본질인 읽고 쓰는 행위, 또 이를 가능케 하는 언어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연결해주는 힘에 대해선 분명히 말했다. 한강은 “글을 쓰려면 최소한의 믿음은 항상 필요하다. 언어가 연결될 것이란 믿음이 없다면 한줄도 쓰지 못할 것 같다”며 “읽고 귀 기울여 듣는 과정 자체가 결국 우리가 가진 희망을 증거하는 것이란 생각이 든다”고 했다. 한강은 지난 7일 자신의 작품 세계를 회고하며 전한 ‘빛과 실’이란 제목의 연설에서도 “연결”과 “사랑”의 관계를 말했다. 1979년 여덟살 아이일 때 쓴 시에서 사랑을 “우리의 가슴과 가슴 사이를 연결해주는 금실”이라고 했던 한강은 45년이 지나 “어쩌면 내 모든 질문들의 가장 깊은 겹은 언제나 사랑을 향하고 있었던 것 아닐까?”라며 자신의 질문들이 접속한 실에 연결되어준 이들에게 감사를 전했다.
지난 7일(현지시각) 스웨덴 한림원에서 작가 한강이 노벨문학상 수상자 연설에 나섰다.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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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일 비상계엄의 밤이 빚어낸 사태를 목도한 뒤 스톡홀름에 와야 했던 그는 1980년 5월의 광주를 그린 소설 ‘소년이 온다’에 대한 바람도 전했다. 한강은 “이 책이 광주를 이해하는 데 들어가는 진입로가 되어주지 않을까 하는 바람이 있었다”며 “이 한권을 읽으면 광주로 들어가는 입구의 역할 정도는 바라건대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고 했다. 그는 지난 6일 노벨상 수상 기념 기자회견에선 “2024년에 다시 계엄 상황이 전개되는 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며 “무력이나 강압으로 언로를 막는 방식으로 통제를 하는 과거의 상황으로 돌아가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메시지를 내기도 했다.
노벨재단은 12일(현지시각) 엑스(X·옛 트위터) 공식 계정을 통해 지난 10일 스웨덴 스톡홀름 콘서트홀에서 열린 노벨상 시상식에 앞서 작가 한강을 비롯한 수상자들의 리허설 장면을 공개했다. 사진 노벨재단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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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중한 국내 상황으로 한강은 무거운 마음을 내비쳤지만, 노벨 주간을 지내며 뜻깊은 추억도 만들 수 있었다. 그는 특히 이주민들이 주로 거주하는 스톡홀름 링케뷔 지역 학생들과의 만남이 “가장 기억에 남는 일 중 하나가 될 것 같다”고 말했다. 한강은 11일 기자회견 참석에 앞서 스톡홀름 북서쪽에 있는 링케뷔·텐스타 지역에 사는 10~15살의 학생 100여명을 만났다. 망명자와 난민, 그들의 후손이 많이 거주해 ‘이주민 마을’이란 낙인이 찍히기도 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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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지역 도서관에서 한강과 만난 아이들은 그의 소설을 읽은 소감과 함께 직접 쓴 시를 전해주었다. 4학년인 아미네(10)군은 “내가 만약 토마토가 된다면 아주 맛없는 토마토가 될 거야/ 아무도 날 먹지 않게/ 아무도 나를 토마토수프에 넣을 수 없게 나무 꼭대기로 올라갈 거야”라는 낭독 시를 썼다. 나무가 된 여자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 ‘내 여자의 열매’를 읽고 시를 쓴 아미네는 자신이 토마토가 되는 모습을 상상했다.
올해로 36회를 맞는 이 ‘노벨상 기념책자 낭독회’는 1988년부터 링케뷔·텐스타 지역에서 열린 전통적인 행사로, 해마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들이 이곳에 방문한다. 인구의 약 20%가 이주민인 스웨덴에서, 다양한 배경을 가진 주민들이 밀집한 링케뷔 지역에 노벨상 수상자가 방문하는 일은 자랑스러운 축제로 여겨진다. 지난 10월 작가 한강의 노벨상 수상이 발표된 뒤 학생들은 가을 학기 동안 ‘소년이 온다’와 ‘흰’, ‘작별하지 않는다’, ‘내 여자의 열매’를 읽으며 그림을 그리고, 한강에게 선물할 문집을 만들었다.
11일(현지시각) 링케뷔 도서관에서 열린 노벨상 기념책자 낭독회에 참석한 작가 한강이 자신의 초상화가 그려진 기념 문집을 전달받고 있다. 마르크 페메니아, ‘링케뷔·텐스타의 노벨’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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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은 그가 어린 시절부터 좋아했던 스웨덴 동화작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에 대한 기억을 스톡홀름에서 되새긴 추억도 전해주었다. 그는 린드그렌의 동화를 테마로 한 유니바켄 어린이박물관에서 “평생 무료 이용권을 주었다”며 웃었다. 한강은 린드그렌의 동화 ‘사자왕 형제의 모험’을 처음 읽었던 해를 초판이 나온 해인 1983년이 아닌 1980년으로 착각했는데, 광주 민주화운동이 있던 1980년 5월의 기억 때문에 그런 혼동이 생겼다고 밝힌 바 있다.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한강 작가가 지난 8일(현지시각) 스웨덴 동화작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이 생전 살던 집을 방문해 ‘사자왕 형제의 모험’ 책을 들고 웃고 있다. 사진 노벨재단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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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여간 이어지는 일정의 핵심은 ‘노벨의 날’로도 불리는
시상식과 특별 연회였다. 알프레드 노벨(1833~1896)의 기일인 12월10일, 한강은 스톡홀름 시청사에서 진행된 저녁 특별 연회에서 “문학 작품을 읽고 쓰는 일은 생명을 파괴하는 행위들의 반대편에 서 있다”며 “언어라는 실을 통해 타인들의 폐부까지 흘러들어가 내면을 만나는 경험, 내 중요하고 절실한 질문들을 꺼내 그 실에 실어, 타인들을 향해 전류처럼 흘려 내보내는 경험을 했다”고 말했다. 순간마다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온 그가 문학의 의미를, 그리고 31년간 글을 써온 소회를 밝힌 순간이기도 했다. 한강의 소감 발표에 앞서 사회를 본 스웨덴 대학생은 “올해 노벨 문학상 수상자를 소개하게 되어 영광입니다”라며 예상치 못한 한국말로 그를 소개해 즐거움을 주기도 했다. 한강은 연회에 앞서 스웨덴 스톡홀름 콘서트홀에서 열린 시상식에서 칼 구스타프 16세 스웨덴 국왕에게 메달과 증서를 받았다.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한강 작가가 10일(현지시각) 스웨덴 스톡홀름 콘서트홀에서 열린 시상식에서 칼 구스타프 16세 스웨덴 국왕으로부터 노벨문학상 메달과 증서를 받고 있다.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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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 주간의 여정을 마친 한강은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지만, 스톡홀름엔 그에 대한 기억이 영원히 남는다. 한강은 지난 6일 옛도심 중심부에 위치한 노벨상박물관을 찾아 옥빛이 도는 ‘작은 찻잔’을 기증했다. 제주 4·3을 다룬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를 집필할 때 홍차를 마셨던 잔이다. 한강은 “찻잔은 나를 책상으로 돌아가게 하는 주문과 같았다”고 말했다. 그는 이 책을 쓰는 데만 6~7년이 걸렸다.
긴 시간을 벼려야 하는 장편소설의 매력을 그는 지난 7일 연설에서 말해주었다. “완성까지 아무리 짧아도 1년, 길게는 7년까지 걸리는 장편소설은 내 개인적 삶의 상당한 기간들과 맞바꿈된다. 바로 그 점이 나는 좋았다. 그렇게 맞바꿔도 좋다고 결심할 만큼 중요하고 절실한 질문들 속으로 들어가 머물 수 있다는 것이. 하나의 장편소설을 쓸 때마다 나는 질문들을 견디며 그 안에 산다.”
스톡홀름/장예지 특파원 pen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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