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월성 이유로 단장에 권한 집중
외국인 비중 80%까지 늘리기도
한국 젊은 과학자 성장에 악영향
"국내 학문 기여 면밀히 따져야"
편집자주
노벨상 수준의 연구 역량 확보를 목표로 예산을 집중하고 자율성을 부여하겠다며 기초과학연구원(IBS)을 설립한 지 13년이 됐다. 하지만 한국일보가 찾은 연구 현장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현장의 박탈감이 더 심화하기 전에 정부가 나서야 할 때다.대전 유성구 기초과학연구원(IBS) 전경. 한국일보 자료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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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과학연구원(IBS)의 외국인 과학자 A씨가 감사에서 주의·경고를 받고도 연구단장으로 선정 된 사건은 IBS의 자정 능력 부재를 여실히 보여준다. IBS는 지난 2011년 해외 유수 연구기관과 비견되는 노벨 과학상의 산실이 될 거라는 기대를 모으며 설립됐으나, '수월성'을 이유로 단장에게 권한을 집중하면서 문제가 반복되고 있다. IBS의 목적과 운영 방식에 대한 개선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솜방망이 징계, 불충분한 규정
12일 IBS에 따르면 A씨는 연구단에 참여하면서 영리 기업을 세우고, 논문 상당수를 IBS 소속이 아닌 외국 연구자와 작성하고도 이를 IBS 성과로 인정받아 단장이 됐다. 이와 유사한 일이 IBS에선 처음이 아니다. 2019년엔 식물노화수명연구단장을 맡았던 한 교수가 6억 원가량의 연구비를 부적절하게 운영하고, 다른 기관에서 수행된 연구를 IBS의 사업실적보고서에 넣어 성과를 부풀린 사실이 감사 결과 드러났다. 또 다른 단장은 IBS에서 한 연구로 발명한 특허 기술을 신고 없이 자신이 주주인 민간업체 명의로 이전한 것이 드러나 재판을 받기도 했다. 이미 굵직한 사건들이 여러 차례 발생했지만 연구자의 이해충돌 문제가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IBS 안팎에서는 연구단장에게 권력이 독점되는 데 대한 문제의식 부족을 주요 원인으로 꼽는다. IBS는 세계 수준의 기초연구 성과라는 목표를 위해 국내외 유수의 석학을 단장으로 선임해왔고, 자율성 보장을 명목으로 연구단의 구성과 운용, 연구비 편성·집행 등 전권을 위임했다. 이 과정에서 연구비 유용 등이 발생했지만, 약한 징계 처분에 그치거나 감사에서 요구된 규정 재정비가 충분히 이행되지 않아 개선이 더디다는 지적이 이어졌다.
IBS에서 연구심의위원을 지낸 한 대학 교수는 "단장의 능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국가 지원으로 각 연구단에 배분되는 연구비가 상당한 만큼 기본적인 사용 현황이나 규정은 철저히 관리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지난해 IBS의 실험 분야 연구단 연평균 예산은 약 57억 원, 이론 분야는 약 26억 원이었다.
"아무리 해외 석학이라도..."
단장 중심 문화가 IBS 내 젊은 연구자의 성장에도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분석이 적지 않다. IBS 단장들이 연구단 구성에 착수한 평균 나이는 53세다. IBS가 모델로 삼은 독일 막스플랑크연구소에선 40대의 중견 과학자들이 중심이 되는 것과 사뭇 다르다고 많은 과학자가 입을 모은다. 막스플랑크연구소 소속 과학자들이 받은 노벨상은 30개가 넘는다. 정작 IBS의 중견 과학자들은 단장이 기존에 해온 연구를 이어가느라 노벨상을 바라볼 만한 독창적인 연구는 시도할 기회조차 놓친다는 목소리마저 나온다.
IBS에서 일했던 한 과학자는 "커리어를 쌓으려면 자기 연구도 해야 하는데 IBS에서는 이를 뒷받침하는 제도도 환경도 부족했다"며 "성과 양산을 중시하며 '단장이 시킨 것만 하라'는 분위기였다"고 전했다. 역시 IBS가 모델로 삼은 일본 이화학연구소(RIKEN·리켄)가 독립적인 연구 수행을 장려하고 대학으로 이직할 때 연구소에서 개발한 장비를 가져갈 수 있도록 하는 것과 상반된다. 리켄 출신의 한 연구자는 "리켄 과학자들은 자신들의 연구가 학계 전체에 긍정적 영향을 미쳐야 한다는 책임의식이 강하다"고 말했다.
외국인 단장을 통해 기대했던 상생 효과 역시 불분명하다. 연구 다양성을 위해 초대한 외국인 단장이 연구단 내 주요 보직에 자신의 제자나 모국 연구원을 주로 채워 넣는 일도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A씨가 속했던 연구단 역시 첫 외국인 단장이 A씨를 비롯한 제자나 지인들을 채용했던 것이 논란이 됐지만, IBS는 "절차에 따랐다"고만 설명했다. 한국일보가 이해민 조국혁신당 의원실을 통해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외국인 연구자가 연구단의 55~85%에 달하는 경우도 많았다. A씨 연구단은 외국인 비중이 80% 수준이다.
IBS 밖 과학자들 상대적 박탈감
게티이미지뱅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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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사이 한국인 연구자들의 박탈감은 점점 커지고 있다. 상당수 젊은 연구자들이 지난해 정부 연구개발(R&D) 예산 삭감 여파로 연구비 감액은 물론, 한창 자리를 잡아야 할 시기에 연구 생명까지 걱정하는 처지에 놓였다. 익명을 요청한 한 30대 연구자는 "신진 연구자들은 정착금도 적고, 연구 환경 자체가 조성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며 "IBS 같은 기관을 자랑스럽게만 여길 게 아니라, 면면이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아무리 해외 석학이라도 권리와 의무, 공과 과를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 중견 연구자는 "우수한 외국인 연구자를 데려오는 이유는 한국 연구자들과 함께 일하면서 국내 학문 토양을 바꾸고 학생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길 기대하기 때문"이라며 "이 같은 기여 없이 본인이 원하는 방식대로 잠시 일하다 가는 구조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힘줘 말했다. IBS를 소관 기관으로 둔 과학기술정보통신부도 현장의 이 같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과기정통부 관계자는 "IBS가 중장기적으로 인재를 양성하는 세계 수준의 기관이 되길 기대하며 지원하고 있는 만큼 이에 걸맞은 역할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신혜정 기자 arete@hankookilbo.com
오지혜 기자 5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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