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2월 4일, 스웨덴 스톡홀름 한림원에 세계문학 거목들이 모였다. 1901년 시작된 노벨문학상의 100주년을 기념하는 심포지엄이었다. 노벨상을 이미 받은 네이딘 고디머, 오에 겐자부로, 가오싱젠을 포함해 몇 년 뒤 수상 작가로 호명될 케르테스 임레, 헤르타 뮐러도 동석한 역사적인 행사였다. 한림원 종신회원 호라세 엥달은 그들 앞에서 말했다. "그리스인이 비극을 발명했다면 로마인은 서간을, 르네상스인은 소네트를 발명했고 우리 세대는 '증언'이라는 새로운 문학을 발명했다." 심포지엄 주제였던 '증언 문학(Witness Literature)'이 21세기 노벨문학상의 뉴노멀이 되리라는 한림원의 공식 신호였다.
기자가 위 심포지엄 내용을 발견한 건 한림원 웹사이트를 기웃거리다 만난 한 소책자 파일에서였다. 셸 에스프마르크란 인물이 2021년 출간한 '노벨문학상-새로운 세기'에 담긴 내용인데, 전문이 대중에게 무료 공개돼 있다. 저 책은 왜 한강 작가가 2024년 노벨문학상 주인공으로 낙점됐는지를 설명해주는 결정적 힌트였다. 해당 책 '증언 문학' 챕터의 글을 변주해 자세히 소개하면 이렇다.
'현미경이 아닌 망원경으로 볼 때 20세기 인류는 전체주의의 협곡을 지나왔다. 인류는 기억의 말살에 대한 공포를 느낀다. 증언의 문학화는 그런 점에서 마지막 윤리로 굳어졌다. 인간의 실존적 곤경을 증언하는 글, 인간에게 타협할 수 없는 독립성을 부여하는 글이 증언 문학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2000년 이후 2024년에 이르기까지 21세기 노벨상 수상 작가들의 작품에 내재된 공통분모를 간파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2015년 수상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체르노빌의 재현(再現)'으로서 생존인물을 인터뷰한 책으로 한림원 선택을 받았다. 2012년 수상 작가 모옌은 중국 산아제한정책(계획생육)을 꼬집은 소설 '개구리', 동물원 우리에 갇힌 서술자가 분필을 씹어 삼키며 삶을 고백하는 소설 '열세 걸음'으로 시대의 울음을 증언했다. 중국 증언 문학의 대표작 '열세 걸음' 첫 장엔 심지어 이런 말도 나온다. "마르크스도 신은 아니지. 마르크스는 이미 우리에게 숱한 고통을 안겨줬어."
증언 문학이 화제가 될 때면 그것을 문학의 '형태'로 볼 수 있느냐는 의문이 제기됐다. 사실과 허구가 충돌하는 지점에서 최종 텍스트가 공개되면 확정적 사실로 기능한다는 비판도 뒤따랐다. 체험적 증언과 비(非)체험적 증언의 이분법도 논란이어서 '사실'은 영원히 시험받는다. 하지만 셸 에스프마르크가 쓴 방향성은 명쾌하다. 억압된 역사가 존재했다는 그 사실을 부인할 순 없다는 진실 말이다. 알렉시예비치와 모옌의 사례에서 보듯 증언 문학은 좌우 이념의 문제가 아니었다. 20세기의 환부를 우리가 어떻게 '잘 닫을' 것인가의 문제다.
고전 반열에 오른 주디스 허먼의 1992년 책 '트라우마'는 고통의 기억을 둘로 나눈다. 서사적 기억과 트라우마적 기억이다. 서사적 기억은 스토리를 만들어내 과거를 종결짓게 하고, 트라우마적 기억은 그 과거가 반복됨을 뜻한다. 둘의 차이는 서사화에 있다. 트라우마적 기억을 서사적 기억으로 바꿔내지 못하면 인간은 트라우마에 끝없이 마비된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 하는 문학이 요구받는 침묵은 그 고통의 무한 재생과 같다.
[김유태 문화스포츠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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