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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1 (일)

심장에 남은 만남과 인연 [서울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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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6·15 남북공동선언 이후 한국과 조선학교 사이에는 민간 차원의 교류활동이 꾸준히 이어져 왔다. 기후조선초중급학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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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창화 | 괴산 숲속작은책방 대표



인생을 살면서 사람들은 가족을 제외하고 생의 전반을 뒤흔드는 결정적 만남을 몇번이나 경험할까? 때로 책과의 만남이 도끼처럼 우리 정수리를 내리치고 삶을 뒤흔들듯 어떤 인물과의 만남은 우리에게 전혀 새로운 세상을 열어준다. 11월의 마지막, 내게 그런 인연을 열어준 이를 만나러 일본 요코하마에 갔다.



그의 아버지는 식민지 시대 조선인이었고 어머니는 일본인이었다.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 일본에서 난 그는 분단된 조국의 뒤편에서 차별받는 조선인으로 살며 온몸에 아픈 역사를 새겼다. 언젠가 통일이 되면 아버지의 고향 경상도로 돌아가리라 생각하고 자식들을 조선학교에 보내 우리말과 역사를 배우게 했다. 그때만 해도 분단이 길지 않았으므로 통일은 당연한 미래였고 고향에 돌아갔을 때 자식들이 언어와 풍습이 통하지 않는 이방인이 되는 걸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분단은 길어졌고 세월은 속절없이 흘렀다. 그래도 마음에 담은 통일의 꿈과 열망은 사라지지 않았다.



우연한 자리에서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목소리엔 결기가 가득했고 눈빛은 뜨거웠다. 어린이책을 읽고 도서관 활동을 하는 선생님들이니 우리말을 배우고자 하는 조선학교 학생들을 위해 책을 좀 보내주면 좋겠다고 했다. 책이 매개가 되어 어린 학생들이 조국을 더 잘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되었으면 했다. 일본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이 남과 북을 나와 상관없는 먼 땅이 아니라 언젠가 돌아가야 할 고향이며 통일된 하나의 조국으로 꿈꾸길 바란다고 했다. 그의 열정에 감동한 도서관 활동가들이 책을 보내기 시작했다. 때론 한 학교, 때론 서너 학교, 수십권에서 수백권까지 바다를 건너간 우리 그림책들의 수가 늘었다. 어느덧 일본 책과, 아이들이 읽기 힘든 아주 오래된 책뿐이던 학교 도서실은 한국에서 보내온 책들로 조금씩 채워졌고 남북관계가 평화 무드일 때는 학교를 직접 찾아 책을 읽어주기도 했다.



그렇게 교류를 시작한 지 20년이 되었다. 그간 통일부 허가를 얻어 공식적으로 조선학교를 방문한 해도 있고 남북관계가 냉각되었을 때는 어려움도 있었다. 정세는 수시로 변했고 그에 따라 교류 정책도 흔들렸으며 정세와 상관없이 팬데믹으로 왕래가 멈추기도 했다. 20년 전 남북교류의 물꼬가 트이고 우리말, 우리 노래, 우리 춤을 추는 우리 아이들을 처음 만났을 땐 통일이 내 눈앞에 와있다고 생각했지만 야속하게도 역사는 그들을 외면한 냉전 시대로 되돌아가고 있다.



뜨거운 마음과 물기 어린 눈으로 우리들의 손을 맞잡고, 책 속 세상밖에 모르던 도서관 활동가들에게 통일의 꿈을 꾸게 해주었던 그분은 이제 투병 중인 칠십 노인이 되었다. 20년 전, 한국의 낯선 어린이책 관계자들을 만나 재일동포에게 분단이 얼마나 비극적인 일인지, 남북 주민들은 자신들을 잊어도 그들은 떠나온 고향을 잊지 못한다는 것과, 분단으로 일본에서 비웃음을 사는 두개의 조국이 보란 듯 통일되어 하나 된 조국으로 귀향하고 싶다는 것, 일본에서 살더라도 당당히 어깨 펴고 살고 싶은 게 평생소원이라 강조하던 그를 만나 나는 새로운 세상의 꿈을 꾸었더랬다. 그런데 지금, 그는 병으로 무너졌고 사람들은 나를 향해 묻는다. 아직도 통일이라는 꿈을 꾸고 있느냐고.



질문을 등에 업고 하늘길을 날아 물기 가득한 그의 눈을 마주한 날, 마음이 그에게 답했다. 어떤 만남과 인연은 심장에 새겨져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고. 남과 북의 통일은 요원할지 몰라도 우리가 지난 스무해 맺어온 우정과 연대는 이미 작은 통일이었다고. 그러니 한탄하지 마시라고. 병든 몸으로 매일 밤 독한 술잔을 기울이는 그분께 감사와 위로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던 요코하마의 푸른 밤, 나는 얼핏 바다가 크게 우는 소리를 들은 것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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