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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1 (일)

아버지 살해한 30대, 필리핀서는 ‘무죄’ 한국서는 ‘유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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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필리핀 현지서 아버지 목 졸라 살해
현지 사법당국 영장 기각...사인 심근경색
국내 법원 "현지 부검 정밀검사 기록 없어"
"정당방위 주장에 사회통념상 한도 넘어"
한국일보

의정부지방법원 전경. 자료사진


필리핀에 거주하던 중 아버지를 살해한 30대 남성이 현지 사법당국의 영장 기각으로 석방됐지만, 한국에서는 ‘살인의 고의’가 인정돼 징역형이 선고됐다.

1일 법조계에 따르면 의정부지법 형사11부(부장 오창섭)는 존속 살해 혐의로 기소된 A(31)씨에게 징역 10년을 선고했다. A씨는 2017년 10월 10일 오전 9시(현지시간)쯤 필리핀 자택에서 어머니를 흉기로 위협하던 아버지 B(당시 50세)씨를 프라이팬으로 가격한 뒤 목을 졸라 살해한 혐의로 기소됐다.

조사 결과 A씨는 2005년 아버지 B씨 등 가족 4명과 함께 필리핀으로 이주 후 미용실 체인점을 운영하다 한식당을 추가 오픈하는 과정에서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폭언과 욕설 등으로 갈등을 빚어오다 이 같은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알려졌다.

필리핀 사법당국,구속영장 기각 석방


1심 판결문에 따르면, A씨는 범행 당일 오전 8시쯤 한식당 개점 준비가 늦다며 아버지 B씨로부터 폭언과 폭행에 시달리자 무릎 꿇고 사과했다. 1시간 뒤인 오전 9시쯤 B씨가 같은 문제로 여동생의 뺨을 때리고, 이를 말리던 어머니에게 “애를 이렇게 키웠으니 너가 죽어야 한다”며 주방에 있던 흉기를 들고 와 위협했다. A씨는 이를 말리는 과정에서 양쪽 팔이 베이자 옆에 있던 스테인리스 프라이팬으로 B씨의 뒤통수를 가격했다. 이어 옆 방으로 피한 B씨를 쫓아가 목을 졸라 살해했다. 현지 경찰은 A씨를 체포하고 살인 혐의로 기소해 재판에 넘겼다.

하지만 현지 사법 당국은 A씨의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B씨의 부검 결과 사인이 심근경색으로 나왔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같은 사실을 파악한 국내 사법당국은 2018년 A씨를 존속 살해 혐의로 기소했다. 다만 재판은 A씨의 소재지 문제, 국민참여 재판 신청 및 취소 등의 절차상 문제로 지연되다 올해 9월에 시작됐다.

국내 법원, 살인 고의 인정돼 존속 살해 혐의 구속


A씨 변호인 측은 “피해자 부검 결과 사인이 심근경색이어서 피고인의 행위와 피해자의 사망 사이에 인과관계가 존재한다고 볼 수 없다”며 “또 어머니와 여동생을 흉기로 찌르려는 피해자의 행위에 대한 방어행위였으므로 살인의 고의가 없었을 뿐 아니라 정당방위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설령 방위행위가 상당성을 초과하는 과잉방위에 해당한다고 하더라도 피고인의 행위는 피해자가 생명을 위협하는 불안스러운 상황에서 공포, 경악, 흥분 또는 당황으로 인한 것이므로, 불가벌적 과잉방위에 해당한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국내 재판부의 판단은 달랐다. 앞서 재판부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법의학자 등 국내 법의학 전문가 3명에게 자문을 통해 현지 부검 결과 등을 되짚었다.

우선 법의학자들은 필리핀 부검의가 작성한 부검 보고서가 근거가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사망한 시신의 심근경색을 진단하려면 맨눈으로 변화를 확인해야 할 뿐만 아니라 현미경을 이용한 조직검사를 해야 하는데 필리핀에서 작성된 부검 보고서에는 조직검사 시행 여부, 진단에 필수적인 검사 결과에 대한 내용이 없기 때문이다. 해당 부검 보고서만으로 사망원인이 심근경색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는 것이 재판부의 판단이다.

또 재판부는 “피고인은 피해자의 뒤통수를 세게 내리쳤고, 피해자는 흉기를 떨어뜨리고 주방에 붙은 방으로 피신한 것으로 보인다”며 “당시 피해자에 의한 부당한 침해는 일단락된 것으로 볼 수 있어 A씨가 B씨의 목을 조를 당시까지 부당한 침해가 존재한다고 보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프라이팬에 맞은 B씨가 방으로 피했는데 이를 쫓아가 목을 졸라 살해한 것은 사회 통념상 방위행위의 한도를 넘어선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재판부는 “아버지인 피해자의 머리를 가격하고, 의식을 잃어 저항하지 못하는 피해자를 빨랫줄로 목을 졸라 살인한 것으로 볼 여지가 커 살인에 대한 강한 고의가 있고, 그 죄질이 좋지 않다”며 “다만 행위 자체는 시인하고 있고, 피해자가 흉기로 위협하자 우발적으로 범행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고 양형 이유를 밝혔다.

임명수 기자 sol@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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