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신 물 뿌리고 강도 당한 것처럼 꾸미기도
1999년에도 17세 여성 살해 후 은폐 시도
1심 살인 고의 인정 징역 25년… 쌍방 항소
서울 은평구 한 오피스텔에서 20대 여성을 살인한 남성이 3월 18일 오전 서울 마포구 서울서부지법에서 열린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에 출석하고 있다. 뉴스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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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혼자 사는 언니가 연락이 안 돼요. 휴대폰이 이틀 전부터 꺼져있었는데···."
3월 14일 밤 9시 24분쯤 서울 은평경찰서에 실종 신고가 접수됐다. 경찰관들이 1시간 뒤 신고자 언니 집에 도착하니 화장실 바닥에 한 여성이 나체로 천장을 바라본 채 숨져 있었다. 피해자 머리카락엔 물기가 남아있었다. 원룸 방 화장대와 서랍장이 열려있고, 보석함도 비어있었다. 사망자는 20대 인터넷 방송인 A씨. 경찰은 이튿날, 서울 구로구 만화방에서 용의자를 붙잡았다. A씨가 방송을 할 때마다 거액을 후원했던 일명 'VIP 회장', 후원자 김모(44)씨였다.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억대 빚을 진 BJ 후원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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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의 관계는 지난해 12월 시작됐다. 피해자 A씨는 지난해 10월부터 인터넷 방송 BJ로 활동했다. 김씨는 피해자에게 거액을 후원하며 가까워진 것으로 보인다. 12월부터 3월까지 라이브 방송에서 약 1,200만 원 상당의 '하트'를 선물했다. 하트는 한 인터넷 방송에서 시청자가 BJ를 직접 후원할 수 있는 아이템으로, 하트 1개당 구매가는 부가가치세 포함 110원이다. 하트를 선물받은 BJ는 현금으로 바꿔 사용할 수 있다. 김씨는 A씨 방송에서 하트를 가장 많이 선물한 'VIP 회장' 반열에 오르기도 했다. 또 김씨는 다른 BJ들에게도 거액을 썼던 것으로 드러났다. 그가 여러 BJ들에게 선물한 하트는 약 3억1,820만 원이었다. 이를 위해 1억5,000만 원의 빚을 지기도 했다. 체포 당시 김씨 수중에 있던 돈은 현금 246만7,000원과 8,005원의 잔액이 남은 계좌뿐이었다.
1심 판결문에 따르면, 범행 3일 전인 8일부터 사건 당일인 11일까지 두 사람은 여러 차례 대화를 주고받았다. 김씨는 8일 A씨 집에 방문했고, 9일과 10일 김씨는 '아버지가 새벽에 갑자기 쓰러져 수술을 받았다' '부친 재산에 대해 새엄마와 누나가 싸우고 있다' '널 가족들에게 결혼 상대로 소개하겠다'는 내용의 메시지를 A씨에게 보냈다. 그리고 개인정보를 캐물었다. "운전면허증 갖고 다녀?" "차 산 적 없지?" "혹시 카드 빚 있어?" "체크카드 있어? 통장에 있는 돈만 뺄 수 있는. 신용카드 말고." 그러고 김씨는 10일 밤, 피해자 집에 찾아가기로 약속했다. 김씨의 말 중엔 거짓말도 있었다. 그의 부친은 이미 수년 전 사망한 상태였다.
범행은 11일 새벽 이뤄졌다. 피해자 집 승강기 폐쇄회로(CC)TV에는 김씨가 새벽 1시 피해자 집에 방문하는 장면이 담겼다. 검찰이 추정한 범행 시각은 새벽 3시 30분쯤. 재판의 쟁점은 고의적으로 살인을 저질렀느냐였다. 김씨는 A씨의 목을 조른 채 성관계를 했는데 A씨가 그만하라고 했고, 곧 의식을 잃고 축 늘어졌지만 계속 성관계를 하다가 사망했다고 줄곧 주장했다. 그러면서 "A씨가 사전에 성관계를 멈출 때 외치기로 약속한 단어(세이프워드)를 말하지 않았다"며 고의가 아니라고 부인했다. 세이프워드는 가학적, 피학적 성관계 등을 갖다가 한쪽이 바로 멈추고 싶을 경우 외치면 즉시 중단하기로 서로 약속한 신호를 의미한다. 격투기에서 경기 중단을 뜻하는 '탭'과 비슷한 개념이라고 보면 된다.
피해자에게 모른 척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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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행 이후 김씨는 증거인멸을 시도했다. 새벽 4시 18분 건물 밖으로 나갔다가 26분 뒤 다시 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2시간 뒤인 7시 8분 다시 집을 빠져나왔다. 김씨는 오전 6시 43분 A씨 계정에 "오빠 병원 다녀올게"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A씨의 집에 있었던 시각이었지만, 자신의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꾸민 짓이었다. 김씨의 위장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당일 오후 5시까지도 A씨에게 여러 차례 메시지를 발송했다. "오빠가 SM 플레이(가학적 성관계) 해서 삐진 거야? 오빠만 좋은 건 아닌 것 같은데 내가 실수한 건 아니지? 오빠 00 보러 갈 건데 저녁 같이할래?" 등이었다. A씨 죽음을 몰랐으며 자신은 무관한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수법이었다.
김씨의 범행 은폐 시도는 계속됐다. 오후 8시 18분쯤 김씨는 다시 A씨의 집에 들어갔다. A씨의 아이폰을 포함한 휴대폰 2대, 아이패드, 노트북, 카드와 신분증이 들어있는 지갑, 목걸이 등을 훔쳤다. 지갑 속에 있던 현금 3만 원도 절취했다. 또 A씨의 태블릿 PC 등에서 증권회사 아이디와 비밀번호, 계좌번호를 촬영하고 신용카드 번호 등을 찍었다. 그리고 훔친 물품들을 갖고 나와 고속터미널, 용산역, 영등포역 인근 등에 분산해서 버렸다. 집에 강도가 든 것처럼 위장하려는 속셈이었다. 또 A씨 사체 위에 샤워기로 물을 뿌렸다. 이 역시 증거인멸을 위한 행동으로 추정된다. 그는 오후 9시 22분 최종적으로 건물 밖을 나섰다.
김씨의 범행을 도운 이도 있었다. 범행 한 달 전 협의 이혼한 김씨의 전처였다. 김씨는 전처에게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이 죽었다'고 전하며 수사기관을 피해 도피 중이라는 것을 알렸다. 전처는 12일부터 15일까지 총 290만 원을 김씨 계좌로 송금했다. "화장실이나 붐비는 데 가서 잠바, 모자, 가방을 다 바꾸라"는 조언도 잊지 않았다. 부부는 사실 김씨의 경제적 빚으로 위장 이혼을 한 것이었다. 김씨는 전처에게 "(피해자를) 처음 만나러 간 거고 다툼이 있었고 정신을 차려보니 죽어 있었다"는 식으로 얘기했다고 경찰에 진술했다.
"DNA 발견 안 돼"... 재판부가 찾아낸 '반전'
법원. 한국일보 자료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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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는 재판 내내 가학적 성관계 과정에서 벌어진 '실수'라는 입장을 고수했다. "피해자의 목을 감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쾌감을 위해서였다. 피해자 심장이 뛰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 심폐소생술 등을 시도했다"고도 강조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심지어 '성관계'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의구심을 표했다. 시신 부검과 유전자 감정 결과, A씨 몸에서 김씨의 유전자(DNA)가 검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액 반응도 음성으로 나왔다. 유전자 감정관은 법정에서 "일반적 성범죄의 경우 사정을 안 해도 최소한 DNA는 검출된다. 사망한 피해자가 씻지 않았으면 이렇게 나오는 경우는 굉장히 드물다"고 진술했다. 또 "입술하고 손톱 외에 피고인의 DNA형이 아무 곳에서도 검출되지 않았다는 건 지금까지 본 케이스 중 처음"이라고 덧붙였다.
재판 과정에서 김씨가 이미 비슷한 수법으로 살인을 저지른 적이 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그는 만 19세였던 1999년, 당시 17세 여성을 살해했다. 피해자 목 부분을 양손으로 힘껏 조르고, 전화선을 피해자 목에 감은 다음 양손으로 힘껏 잡아당겼다. 피해자 사인은 A씨와 같은 '경부 압박에 의한 질식사'였다. 김씨는 당시에도 피해자 사체가 부패해 악취가 나자 증거를 없애기 위해 집에 LPG 가스 밸브를 열고 가스라이터를 사용해 불을 질렀다. 법원은 이듬해 4월 살인, 현주건조물방화, 사체손괴 혐의로 징역 장기 12년, 단기 7년을 선고했고, 형이 확정됐다. 소년법상 만 19세 미만 미성년 범죄자는 성인과 달리 형의 상·하한을 나눈 부정기형이 선고된다. 단기형을 채운 뒤 교정당국 평가에 따라 형 집행이 조기에 종료될 수도 있다.
재판부는 "살인 전과의 범행 수법이 매우 유사하고, 이 사건 범행 이후 피고인이 피해자 사체를 화장실로 옮겨놓고 도주했다는 사정은 피해자의 사체를 그대로 방치해 뒀던 위 살인 전과의 범행 후 정황과 흡사하다"고 지적했다. 또 "이 사건 범행 피해자도 위 살인 전과의 피해자와 마찬가지로 면식 있는 여성"이라고 판결문에 적시했다.
범행 후 검거된 김씨는 사이코패스 검사를 받았는데 재범 위험이 높다는 결과가 나왔다는 사실도 파악됐다. 평정척도가 총 24점으로 사이코패스 성향에 따른 재범 위험은 중간위험군 중 가장 높은 점수였다. 폭력범죄 재범위험성 결과도 22점으로 '높음' 단계로 나왔다. 성일탈검사를 통해 성적 가학, 피학적 경향성도 있다는 점도 시사됐다. 김씨는 "남부구치소에서 약을 처방받아 몽롱한 의식상태에서 평가를 받아 결과를 납득할 수 없다"고 항변했지만 재판부는 약 복용 전 검사에서도 결과가 비슷하다며 김씨 주장을 물리쳤다.
재판부는 △피해자 유품을 훼손해 버린 이유에 대해 '다른 사람이 주워서 사용하면 내가 책임을 지게 돼 파손해서 버렸다'는 납득이 어려운 변명을 하는 점 △도피 도중 A씨를 아는 제3자에게 "피해자가 갑자기 도망간 것 같다, 인터넷 방송으로 얻은 돈을 쓰고 오는 것 같다"며 A씨를 모독하는 메시지를 보낸 점 △만화방에서 체포된 점을 들어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고 죄책감을 느끼는 정황을 찾아볼 수 없다고 질타했다.
결국 김씨는 살인, 절도, 재물은닉 혐의로 징역 25년을 선고받았다. 또 15년간 위치추적 전자장치 부착 명령이 내려졌다. 김씨의 도피를 도운 전처에겐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1년이 선고됐다. 김씨는 지난달 8일 법원에 항소장을 제출했다. 징역 30년을 구형했던 검찰도 1심 판결에 불복해 현재 항소심 재판이 진행 중이다.
서현정 기자 hyunju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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