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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0 (토)

경기 침체가 낳은 ‘어둠의 알바’… 잔혹 범죄에 日 공포 [세계는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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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전” SNS 광고… 생활고 청년 유혹

지시역, 실행역에 살인강도 등 강요

주모자가 필리핀 감옥서 원격 지시

545억원 강도 피해 ‘루피사건’ 경악

범행 역할 세분화… 범죄 의식 약화

익명 SNS도 야미바이토 확산 한몫

일본 국민 10명 중 3명 “치안 불안”

가정집도 고가 방범장치 설치 급증

“언제, 어디서 강도가 들어올지 모르니까….”

얼마 전 이웃에서 강도사건이 발생한 걸 목격한 일본 간토지방(도쿄도, 지바현 등 수도권) 한 주민은 자신의 집에 새로 방범 카메라를 달았다. 그는 아사히신문과 인터뷰에서 자신이 피해자가 될 수 있었다는 생각에 지금도 공포심은 지워지지 않았다고 했다. NHK방송이 지난 15일부터 사흘간 1213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거주지 치안이 나빠졌다는 응답이 32%에 달했다. 일본 국민 10명 중 3명 이상이 범죄에 대한 불안을 느끼고 있다는 의미다.

‘야미바이토’(‘어둠’을 뜻하는 ‘야미(闇)’와 ‘아르바이트’를 의미하는 ‘바이토(バイト)’의 합성어)에 의한 사건이 잇따른 데 따른 결과다. ‘어둠의 아르바이트’ 야미바이토 범죄는 지난 2∼3년 증가하며 경각심을 키웠고 지난 8월 이후 간토지방을 중심으로 잇달아 발생하며 위기감을 높였다. 특히 최근 주목되는 것은 살인까지 서슴지 않는 흉포화다. 정부가 나서 대책을 강구하고 경각심을 높이기 위한 조치들이 취해지고 있지만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아 일본의 ‘안전신화’가 무너지기 시작했다는 진단까지 나오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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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수도권에서 야미바이토와 관련된 사건이 잇달아 발생하는 가운데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 주택가에 살인 사건이 일어난 지난 17일 경찰이 현장 주변을 통제하고 있다. 요코하마=교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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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에 빠진 가난한 젊은이

야미바이토에는 직접 범행을 저지르는 종범 ‘실행역’과 실행역을 모으고, 범행 대상을 물색해 지시를 내리는 주범 ‘지시역’이 있다. 지시역과 실행역, 실행역 사이에 평소 친분이 있는 것이 아니어서 범행에 따라 구성이 달라져 ‘유동형 범죄’로 규정되기도 한다.

둘 사이를 잇는 매개는 대개 사회관계망서비스(SNS)다. 지시역은 “당일 지불”, “일당 5만엔(약 45만원)부터”, “봉투 전달, 교통비 지급” 등 단기간에 손쉽게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SNS 광고로 실행역을 유인한다. 광고를 보고 연락하면 “돈을 전달하는 일이니 본인과 가족 신분증, 연락처를 보내달라”는 식의 요구를 하는데 여기에 응하면 본격적으로 범죄의 수렁에 빠져들기 시작한다. 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내비치면 확보한 개인정보를 활용해 “가족들을 해치겠다”는 등의 협박을 일삼는다. 일단 범행을 저지를 인원이 만들어지면 단속을 피하기 위해 익명성, 보안성이 강한 메신저로 연락을 주고받는다. 범행은 지시역이 정한 곳을 대상으로 하며, 경우에 따라 구체적인 범행 방식까지 오가며 이뤄진다. 지난 16일 요코하마시의 한 주택에서 75세 남성이 손발이 묶인 채 피를 흘리며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다. 같은 날 지바현 시로이시에서는 70대, 40대 모녀가 사는 집에 강도가 침입, 모녀를 결박한 뒤 현금 등을 빼앗는 사건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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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루피 사건’은 야미바이토에 대한 경각심을 크게 높인 계기로 꼽힌다. 주모자인 ‘루피’가 필리핀에 거주하며 일본에 있는 행동역을 조종해 강도 사건을 벌이고 약 60억엔(약 545억원)의 피해를 낳아 일본을 경악하게 했다. 놀라운 점은 루피 등 주범들이 필리핀 수용소에 수감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주범 이마무라 기요토(今村磨人), 후지타 도시야(藤田聖也) 등은 필리핀에서도 범죄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었는데 일본에서의 범행이 드러나며 양국 정부의 협의 아래 일본으로 송환됐다. 이들의 범죄가 알려진 계기는 지난해 1월 도쿄에서 일어난 강도살해 사건이었다. 단독주택에 사는 90세 여성이 지하 1층에서 사망한 채 발견됐고, 시계 3점과 반지를 도난당했다. 경찰은 범인들이 사용했던 휴대전화에서 피해자 주소와 함께 ‘지하에 현금’, ‘장갑, 모자 준비 하라’ 등의 지시가 내려진 메시지가 남아있는 걸 확인했다.

실행역들은 대체로 10∼30대 젊은층이 많다. 경찰이 지난 8월 이후 체포한 50명 중 20대가 34명으로 가장 많고, 30대와 10대가 각각 8명, 7명이었다.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게 이들의 공통점이다. 쉽게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란 실행역의 허망한 희망은 범행을 위한 소모품 취급을 당하며 처참하게 무너진다. 사이타마에서 체포된 복수의 남성들은 “후회하고 있다. 보수도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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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미한 범죄의식

야미바이토가 ‘치안강국’ 일본을 불안에 떨게 할 정도로 확산된 배경에는 범죄의 심각성에 대한 인식 부족이 있다는 분석이다.

아사히는 야미바이토 관련 사건 재판에 참여했던 법조인, 야미바이토로 복역한 경험이 있는 이들에 대한 취재 결과 “다수의 실행역들이 야미바이토를 명확하게 범죄라고 보지 않고 ‘그레이(회색) 바이토’라고 인식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리스크가 있지만 SNS에서 가볍게 응모할 수 있는 단기 고액의 아르바이트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아사히는 “‘단기고액’ 등의 문구를 보며 처음에는 ‘위험한 다리를 건너는 것은 아닐까’라는 의식을 하지만 지시역이 ‘범죄는 아니야’라고 이야기하면 망설이면서도 범죄에 깊이 빠져들어 간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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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로 역할이 세분화되어 있다는 점도 범죄 의식을 약화시키는 요인으로 지목된다. 야미바이토의 ‘주종목’이라고 할 수 있는 ‘특수사기’(보이스피싱)의 경우 ‘전화역’, ‘운반역’, ‘감시역’ 등으로 역할이 나뉜다. 범죄의 전체상을 파악하지 힘든 구조이기 때문에 위법한 일을 하고 있다는 의식을 가지기 힘든 것이다. 사용하는 표현에서도 이런 인식을 읽을 수 있다. 야미바이토 경험이 있는 이들이 ‘매상’, ‘경비’, ‘(범행 성공했을 때 받는) 위로휴가’ 등의 단어를 쓰는 것은 범죄가 아니라 ‘일’로 인식하고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정보통신기술의 발달도 야미바이토 확산에 한몫하고 있다. SNS는 ‘보통의 젊은이’를 쉽게 유혹하는 매개체가 되고 있다. 여기에 익명성이 높은 통신수단을 활용함으로써 증거를 최소화하며 범행을 저지를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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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에서 수감 중 ‘루피’ 등의 별명을 사용하며 일본에 있는 실행역에게 연락해 범죄를 지시한 혐의로 지난해 2월 일본에 송환된 용의자들. 도쿄=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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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가 보안장비 수요 증가

야미바이토의 심각성에 불안을 느낀 일본인들은 나름의 대책을 세워 대응하고 있다. 고가의 방범 장비 설치가 늘어나고 있는 게 대표적인 현상이다.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에 따르면 범인들의 침입경로가 되기 쉬운 창문을 보강하는 이들이 크게 늘고 있다. 사설 보안경비회사인 세콤의 방범 카메라 지난해 판매량은 2019년의 약 1.6배, 고객당 구매액은 1.7배가량 증가했다. 이 회사는 지난 5월 기존 제품보다 강도가 약 5배 강한 유리창을 개발해 판매를 시작했다. 1㎡당 가격이 약 2배 정도인 17만6000엔(159만원)이지만 일반 가정의 문의가 많다. 다른 경비업체인 ALSOK의 가정용 방범 카메라 판매대수는 4년 전에 비해 18배나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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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케이는 “보다 강한 안심감을 원하는 이들은 고기능의 카메라에 눈을 돌리고 있다”며 “기업용으로 만든 30만엔(272만원)이 넘는 카메라는 전방위 녹화가 가능해 지정된 범위 내에 사람이 침입하면 알려주는데, 가정에서 도입하는 사례도 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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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히로시마현이 공식 웹사이트에서 게재해 놓은 '아미바이토' 경고포스터. "야미바이토는 범죄입니다"라고 적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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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들의 불안감에 정부, 정치권도 대책 마련을 서두르는 중이다. 아무래도 경찰의 움직임이 두드러진다. 쓰유키 야스히로(露木康浩) 경찰청 장관은 지난 18일 도도부현(광역지방자치단체) 경찰 본부장을 소집해 야미바이토 근절을 강조했다. 그는 “국민들의 체감 치안이 현저하게 악화되고 있다. 매우 중대한 사태로 각 지역 경찰이 협력해 한시라도 빨리 주모자를 체포해야 한다”고 독려했다. 특히 “중심 인물의 검거, 범죄수익의 박탈 등 전략적인 단속을 실시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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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권여당인 자민당은 당내 ‘치안·테러대책조사회’를 ‘치안·테러·사이버범죄대책조사회’로 확대개편해 야미바이토 강도 사건에 대해 추가 대책 마련에 착수했다. 조사회장에는 지난 9월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2위를 기록한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 전 경제안보상을 앉혀 무게감을 뒀다. 자민당은 야미바이토가 “국민들에게 치안상의 큰 위협이 되고 있다”며 지난 총선 당시 공약으로 실태 규명, 단속 강화를 내세웠다.

도쿄=강구열 특파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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