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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5 (목)

호주와는 달랐던 뉴질랜드 ‘마오리 르네상스’의 위기 [.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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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뉴질랜드 마오리족 출신 시민들이 이달 19일(현지시각) 웰링턴 의사당으로 가는 중심업무지구에서 건국조약 재정 움직임에 항의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웰링턴/A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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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 수도 웰링턴 의사당 앞에 19일 수만명이 시위했다. 아흐레 동안 마오리족 출신 시민들이 뉴질랜드 북섬 수백㎞를 걷는 평화행진(히코이)을 하고 이날 의사당 앞에서 항의 집회를 한 것이다.



발단은 ‘와이탕이(와이탕기) 조약’을 우파 정당들이 무력화하려고 한 것이었다. 1840년 영국이 마오리 부족 지도자들과 합의해 체결한 이 조약은 전문과 3개 조항으로 구성돼 있다. 마오리족의 땅과 소유물, 그리고 영국 신민으로서의 권리를 인정해주는 대신 주권을 영국 왕실에 이양한다는 내용이다. 다른 식민지들과 달리 영국 왕실과 마오리 부족장들이 ‘파트너’의 성격을 갖는다는 것이 핵심이다.



하지만 조약의 성격을 놓고 해석이 엇갈려 5년 뒤 전쟁이 일어났다. 근 30년간 저항했지만 결국 영국이 원주민들 땅을 몰수하거나 강압적으로 매입했다. 중남미에서 그랬듯이, 마오리도 유럽에서 온 질병에 노출돼 80만명 넘는 인구가 20세기 초 한때 5만명으로까지 줄었다.



언어와 문화가 사라질까 우려한 마오리족의 자각이 커졌다. 마오리 정치운동에는 뉴질랜드 원주민 마오리족의 인권 신장에 크게 기여한 아피라나 응가타라는 걸출한 지도자가 있었다. 20세기 전반기 내내 하원의원을 하면서 마오리를 위한 토지 정책을 추진했다. 뉴질랜드 50달러 지폐에 그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뉴질랜드가 1947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원주민의 자각과 정치 운동은 ‘마오리 르네상스’로 이어졌다. 마오리족이 빼앗긴 권리를 되찾기 위해 독립 전 정부들이 무시했던 조약을 헌법적인 근거로 내세우면서 와이탕이 조약은 더욱 중요한 위상을 갖게 됐다. 원주민들은 와이탕이의 날(2월6일)을 기념하기 시작했고, 1973년 공식 국경일이 됐다. 1973년 의회는 와이탕이 조약법을 통과시켜 정부의 위반 사례들을 조사하고 피해를 배상하도록 했다. ‘와이탕이 재판소’가 만들어졌고 정부가 여러 마오리 집단에 총 10억달러 규모의 배상금을 줬다. 와이탕이 조약이 현대 뉴질랜드 불문헌법의 기초가 된 것이다.



언어와 문화를 되살리려는 움직임도 컸다. 1970년대에 오클랜드대 학생들이 결성한 ‘나 타마토아’(젊은 전사들)라는 그룹이 대표적이다. 마오리들은 유럽계를 ‘파케하’라고 부르는데, 마오리가 문화를 잃고 ‘가짜 파케하’가 되어가는 것에 저항하고 삶을 개선하기 위한 운동을 조직했다. 뉴질랜드의 지명이 마오리 말과 영어로 표기되게 만든 것도 마오리 부흥운동이었다. 1979년 주요 ‘백인’ 정당들은 인종적 다양성을 인정하고, 마오리가 ‘파케하’의 관습에 매몰돼서는 안 되며 고유의 문화를 지킬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특히 1980년대 노동당 정부 때에 이러한 ‘이중문화적 접근’이 자리를 잡았다.



그 시기 마오리족은 자기네 말인 ‘테레오’를 살리기 위해 코항가 레오(언어 둥지 운동)라는 이름으로 돈을 모아 교육기관을 열고 토착 언어를 가르쳤다. 1987년에는 마오리 언어법을 통해 공용어로 지정됐고, 정부 산하 ‘마오리 언어 위원회’가 설치됐다.



오스트레일리아(호주)에서 원주민들이 절멸되다시피 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호주에도 애버리지니, 토레스해협 원주민, 태즈메이니아 원주민 등으로 불리는 토착민 집단들이 있었지만 이들은 대륙처럼 큰 땅에 흩어져 살고 있었기에 각개격파됐다. 호주 식민통치 당국은 조직적으로 이들을 학살하고 부모에게서 아이들을 강제로 떼어내 백인 가정이나 학교에 집어넣으며 문화와 언어를 말살했다. 원주민 인구는 현재 80만명, 호주 전체 인구의 3.2%에 불과하다.



반면 마오리족은 예전부터 강력한 부족사회를 운영해 왔다. 이들은 원래 폴리네시아 원주민인데 14세기에 카누를 타고 뉴질랜드에 이동해 정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오리는 영국과 협상하고, 전쟁하고, 저항과 부흥운동을 계속했다. 지금 뉴질랜드의 마오리 인구는 약 100만명에 이른다. 뉴질랜드 인구 540만명 중 68%가 유럽계이고 마오리가 18%다. 그와 비슷한 규모인 17%는 아시아계다. 인구조사에서 상당수 주민이 유럽계와 마오리와 아시아계 중에서 복수의 정체성을 고른다.



뉴질랜드가 호주와 달리 포용적인 사회로 경로를 잡은 데에는 마오리라는 큰 규모의 소수집단이 있었던 게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역대 정부들은 차별 철폐 조치(어퍼머티브 액션)를 통해 마오리와 유럽계의 사회경제적 격차를 줄이기 위해 애써야 했고, 쟁점이 생기면 와이탕이 조약을 바탕으로 부족 지도자들과 협상을 했다. 현재까지 이중문화적 접근은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정치적 대표성을 놓고 보자면 지난해 총선으로 구성된 현 의회에서는 마오리 의원이 33명으로 전체 의석의 27%를 차지하고 있다. 인구 비례보다 더 많다.



그럼에도 유럽계에 비하면 열악한 조건에서 살고 차별을 받아온 게 사실이다. 빈곤 지역에 몰려 있고, 실업률도 높다. 인구의 20%도 안 되는데 교도소 수감자 절반 이상이 마오리다. 미국 흑인들처럼 형사 절차에서 차별이 심하다. 기대수명은 마오리족이 아닌 이들과 마오리 사이에 7년 이상 차이가 난다.



그럼에도 마오리가 아닌 사람 중에는 과거 선조들이 저지른 잘못을 갚아준다는 이유로 정부가 마오리에 끌려다닌다 생각하는 이들이 적잖다. 세금으로 배상해주는 것에 대한 불만도 있었다. 2000년대 이후 고등교육 분야나 관리직, 전문직 일자리에서 마오리인의 비율이 올라가며 생겨난 유럽계의 반발도 저변에 깔려 있다. 이런 불만을 발판 삼아 우파 정당인 뉴질랜드행동당은 “와이탕이 조약이 국민을 인종적으로 분열시켰다”는 주장을 펼쳤다. 2세기 전 조약은 여러 나라에서 온 이주민이 늘어가는 시대에 맞지 않는다, 마오리를 위한 할당제들은 “평등권 원칙에 위배된다”고 주장한 것이다. 여러 민족-인종집단이 사는 나라에서 한 집단만 배려해주는 것은 역차별이라는 얘기다.



그래서 와이탕이 조약을 ‘재해석’하기 위한 법안을 내놓았다. 최근 시위는 거기에 반대해서 일어난 것이었다.



2019년 3월 크라이스트처치의 모스크에서 극우파가 총기를 난사해 51명이 숨졌다. 뉴질랜드에 아시아 무슬림 이민자가 늘어난 것에 대한 적대감이 백인 우월주의자의 테러로 표출된 것이다. 점점 입지가 줄어가는 유럽계의 반발심이 우경화를 부르고, 역사적으로 피해를 입어온 마오리족을 상대로 ‘공정성’을 외치는 상황이 됐다.



한국계 인구 비율이 한국 다음으로 높은 나라가 뉴질랜드라고 한다. 한국계 뉴질랜드인은 약 3만6천명. 우리 입장에선 많지 않은 것 같아도 뉴질랜드 전체 인구의 1%에 좀 못 미친다. 이민자 시대가 불러온 여러 풍경 속에서 토착민의 지위는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역사적 피해에 대한 배상과 책임의 한계는 무엇인지를 마오리들은 묻고 있다.



구정은 국제 전문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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