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효고현 지사 보궐선거를 둘러싼 논란
편집자주
우리에게는 가깝지만 먼 나라 일본. 격주 토요일 연재되는 ‘같은 일본, 다른 일본’은 미디어 인류학자 김경화 박사가 다양한 시각으로 일본의 현주소를 짚어보는 기획물입니다.일본판 트럼프 사태라고 할 수 있는 일본 효고현 지사 보궐선거 결과는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충돌, 중우정치에 대한 우려, 소셜미디어에 밀리는 레거시미디어의 여론 형성능력 등 빠르게 변하는 현재 민주주의의 지평을 보여주고 있다. 일러스트 김일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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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효고현지사 보궐선거를 둘러싼 논란
요즘 일본의 연구자 동료들과의 채팅방에서 가장 뜨거운 화제는 얼마 전에 마무리된 효고현(兵庫県) 지사 보궐선거 결과다. 일본의 정치적·사회적 이슈에 대해 비교적 활발하게 의견을 주고받아온 커뮤니티인데,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이번 보궐선거 결과를 상당히 충격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단순히 당선자의 정치적 성향이나 지도자로서의 자질에 대한 논란은 아니다. 그보다는 대의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라는 두 개념의 본질적인 충돌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례로 보고 있다.
논란의 보궐선거의 경위는 이렇다. 사이토 모토히코 전 효고현 지사가 지자체 의회에서 만장일치로 불신임을 받고 지사직에서 물러났다. 그의 비리와 ‘갑질’에 대한 내부 고발로 비롯된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의회의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고 “주민들의 평가를 받겠다”며 보궐선거에 출마했고, 결국 다시 지사로 당선됐다.
주민들의 선택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만, 제3자의 입장에서는 사이토 전 지사의 행동이 부적절했다고 볼 근거가 충분했다. 특히 비리 폭로 이후 그가 보인 행태는 문제가 많았다. 그는 당장 내부 고발자 색출에 나섰고, 정년 퇴임을 몇 달 앞둔 간부 직원을 징계 처분하는 방식으로 압박했다. 이 간부 직원은 PC를 압수당하고 몇 달 동안 극심한 스트레스와 압박에 시달리다가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적 결말에 이르렀다. 이 사건으로 여론이 들끓었고, 효고현 의회는 그의 책임을 물어 불신임 결의를 내렸다.
내부 고발 중 일부가 사실이 아닐 가능성도 있다. 사이토 전 지사 본인은 억울하다고 느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지사가 자신을 고발한 직원을 색출하고 징계한 행위는 누가 보더라도 명백한 권력 남용이었다. 자기 때문에 직원이 극단적인 선택까지 한 상황에서, 재차 지사직에 도전장을 내민 것도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그런데 더욱 충격적인 것은 주민들이 다시 그를 선택하며 의회의 법치주의적 판단을 무력화했다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시민들이 정치인에게 “비리와 ‘갑질’을 저질러도 괜찮다”는 면죄부를 준 셈이 됐다. 한 연구자 동료는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 재선과 유사한 일이 일본에서도 일어났다”고 한탄했다.
실제로 이번 사례는 최근 미국의 대통령 선거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차기 대통령으로 당선된 사건과 구조적으로 유사한 점이 많다. 트럼프라는 인물을 둘러싼 평가는 다양하지만, 그가 2016년에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후 지금까지 보여준 언행은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와는 거리가 멀다는 비판이 지배적이다. 특히 2020년 재선에 실패한 뒤 선거 결과에 불복하며 부정 선거 의혹을 제기한 바 있고, 일부 지지자들의 의회 난입 사태를 부추겼다는 의혹을 받았다. 누가 봐도 헌법적 질서를 훼손하는 이런 행동은 그가 과연 법치주의 국가의 최고 책임자로서 자격이 있는지 의문을 제기하게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시민은 트럼프를 차기 대통령으로 선택했다. 이 점이 효고현 사례와 닮아 있다. 두 사건 모두 민주주의에서의 다수결이 법치주의와 정치적 책임을 무력화한 사례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레거시 미디어에 대한 소셜미디어의 압승
그렇다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일본의 기존 정치계와 매스미디어는 소셜미디어를 이번 선거결과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지목하고 있다. 실제로 소셜미디어는 이번 선거의 주전장(主戰場)이었다. 사이토 전 지사는 무소속 후보로서 조직적 지원 없이 인터넷을 중심으로 선거 캠페인을 전개했다. 기존 레거시 미디어에서는 직전에 제기된 ‘갑질’ 의혹과 의회의 불신임 결의 등을 집중 보도하며 그에 대한 부정적인 뉘앙스의 보도가 많았지만, 유튜브 등 소셜미디어에서는 정반대로 그를 부당한 내부 고발의 피해자로 묘사하는 콘텐츠가 높은 조회 수를 기록했다.
선거 당일 이뤄진 출구조사에 따르면, 유권자가 후보를 선택하는 데에 가장 많이 참고한 미디어는 TV나 신문 같은 레거시 미디어가 아니라 소셜미디어였다. 특히 유튜브 등 동영상 플랫폼의 영향이 두드러졌다. 즉, 이번 보궐선거에서는 소셜미디어가 레거시 미디어의 영향력을 압도하며 여론을 주도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사이토 전 지사의 당선에 비판적인 이들은 소셜미디어에서 확산된 가짜뉴스나 왜곡된 정보가 유권자들을 현혹시킨 것이 아니냐고 우려한다. 특히 선거 과정에서 PR업체가 소셜미디어 캠페인을 조직적으로 이끌며 감정적 호소를 앞세운 해시태그를 퍼뜨리는 등 전략적으로 개입했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일본에서는 홍보업체에 선거운동을 맡기는 것이 불법인 만큼 선거법 위반 논란도 뒤따르고 있다. 어찌 됐든, 결국 이번 선거에서는 이성적 판단보다 감성적 호소가 더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 전략이었다는 분석이 타당해 보인다.
그동안 일본에서는 시민들의 정치적 무관심이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시급하게 극복해야 하는 과제로 언급돼 왔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또 다른 차원에서 경고를 던진다. 포퓰리즘이 민주주의를 좀먹을 수 있다는 경고를 던지고 있다. 소셜미디어의 포퓰리즘적 특성이 우민(愚民)을 양산한다는 조악한 비판도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이런 현상의 근본 원인이 소셜미디어에 있다고 보지 않는다. 그보다는 기존 정치판과 레거시 미디어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이 유권자의 관심을 소셜미디어로 이끌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일본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관찰되는 미디어 현상이기도 하다.
◇새로운 위기, 세계 곳곳에서 격화하는 법치주의와 민주주의의 충돌
법 앞에 모두가 평등하며 법에 의해 사회가 지배된다는 법치주의는 권력 남용을 방지하고 공정한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원칙이다. 반면 민주주의는 국민 주권과 다수결의 원칙을 바탕으로 시민들의 의사를 정치적 결정에 반영하는 체제다. 두 원칙은 상호 보완적이지만, 때로는 충돌을 일으킨다.
일본의 효고현의 사례와 미국의 대선은 민주주의적 선택이 법치주의의 기본 가치를 무력화한 대표적인 예다. 이런 상황이 일본과 미국에 국한되진 않는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정권하의 독일은 이 갈등의 가장 극단적인 사례다. 선거로 선출된 지도자 히틀러는 ‘합법적’ 명분하에 수백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정당성을 결여한 전쟁을 벌이고 있는 정치 지도자들이 존재한다. 그들 역시 각각의 나라에서 민주주의적인 절차를 통해 선출된 권력을 행사하는 이들이다. 사회에 만연한 불신의 빈틈을 파고드는 포퓰리즘이 현대 정치에 얼마나 큰 위협이 될 수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한국 사회는 또 다른 방식으로 법치주의와 민주주의의 충돌을 겪고 있다. 법치주의라는 명분 아래 여론과는 괴리된 정책이나 사법적 판단이 이뤄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법이 모든 것을 합리적으로 결정한다는 착각이 정당한 민의(民意)를 억누르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법치주의의 기준이 누구에게는 엄격하고 누구에게는 한없이 관대하게 적용되면서, 공권력에 대한 시민들의 신뢰가 현저하게 약화됐다.
결국 법치주의와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기반은 신뢰다. 법이 추구하는 궁극적 가치와 시민들의 판단력에 대한 상호 신뢰가 없이는 두 원칙이 조화롭게 공존하기 어렵다. 한국, 일본, 미국, 나아가 전 세계가 신뢰의 위기를 겪고 있다.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우리 시대가 풀어야 할 가장 복잡하고 어려운 과제일 것이다.
김경화 미디어 인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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