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의 여성 서사 아카이브 ‘플랫’은 30대 여성 기자가 야구 붐을 바라보는 짧은 연재 “‘얼빠’ 아니고 ‘야빠’인데요”를 시작합니다. 안타가 뭔지도 모르던 ‘야알못’이 어떻게 ‘야빠’가 되었는지, 야구장 ‘큰 손’이 된 여성 관객을 바라보는 시각은 어떤지 함께 이야기 나눠 봤으면 합니다.
[‘얼빠’아니고 ‘야빠’인데요①] “야구 룰은 다 아냐”고요?…룰 모르는데 경기를 어떻게 보나요
[‘얼빠’아니고 ‘야빠’인데요②] ‘40년 고인 물’ 아저씨 팬이 말했다 “크보는 여성 팬에게 투자하라!”
[‘얼빠’아니고 ‘야빠’인데요③] 서울에서 ‘흥참동’ 지방 구단을 응원한다는 것
2024 신한 SOL 뱅크 KBO 한국시리즈 기아(KIA) 타이거즈-삼성 라이온즈의 5차전이 열린 10월 28일 오후 광주 기아챔피언스필드에서 관람객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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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리즈를 쓰기 전 예상했던 것과 예상하지 못했던 게 있습니다. 예상했던 것은 ‘개인적인 감상인지 기사인지 뭔지 모르겠다(!)’는 반응이었고요,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여성들이 이렇게나 많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첫 회차에 여성 야구팬을 바라보는 차별적인 시선에 대해 쓰고 나서, 지인들에게서 많은 연락을 받았습니다. 입을 모아 “재미있게 잘 봤다. 너무 공감됐다”고 했어요. 평소 문제의식이 크지 않았던 사람도 “그래, 그런 게 있지”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고 했습니다.
기사 말미에는 스포츠 경기를 보거나 직접 운동을 하면서 겪은 에피소드를 남겨달라고 구글 문서를 덧붙여놓았는데요, 기다렸다는 듯 수많은 의견이 쏟아졌어요.
“집안이 3대째 팬인데 얼마나 억울했는지”
예린씨는 현재 서울 고려대 미디어학과 석사과정에 재학 중인 연구자입니다. 프로 스포츠계의 성차별적 인식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어요. 스포츠가 여전히 남성의 전유물로 인식되는 상황에서 올해 야구 부흥의 핵심 주체로 떠오른 여성 팬의 입지를 재확인하는 게 연구 목적입니다. 세부 전공은 ‘문화 연구’입니다.
문화 연구는 갈등 소재를 많이 다루는데, 예린씨가 선행 연구를 찾아보니 아이돌 등 K팝 팬덤을 대상으로 한 연구는 많았지만 스포츠 팬덤 연구는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예린씨는 프로야구 팬 8년차 이상의 성인 남녀를 대상으로 한 연구를 진행하고 논문을 쓸 계획입니다.
1983년 해태 타이거즈의 전기리그 우승 광고. 경향신문 자료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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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린씨네 가족은 무려 3대째 기아의 팬입니다. 본가가 전남 여수인데요,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 아버지 손을 잡고 광주의 기아 홈구장까지 갔다고 합니다. 스포츠 애호가 집안에서 자란 영향인지 중고교 시절 체대 입시까지 준비했었고요. 지금은 진로가 달라졌지만, 그에게 스포츠란 여전히 인생에서 뗄 수 없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이 주제를 선택하게 된 이유가 궁금해요. 야구를 오랫동안 보면서, 아니면 직접 운동을 하면서 ‘이건 좀 이상하다’라고 느낀 게 많으셨나요?”
“야구 경기를 보러 가서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인증 사진을 올리거나 야구계 관련 소식을 공유하잖아요. 그러면 주위에서 ‘쟤는 남자들한테 잘 보이려고 저러는 것’이라고 보는 인식이 있었어요. 스포츠 경기의 주 시청자가 남성이니까 제가 그걸 매개로 이성과 관계를 맺으려 한다고 생각하는 거죠. 아니, 집안이 3대째 팬인데. 얼마나 억울했는지 몰라요.”
2024 신한 SOL 뱅크 KBO 한국시리즈 KIA 타이거즈-삼성 라이온즈의 5차전이 열린 지난 10월 28일 광주 기아챔피언스필드에서 삼성의 팬들이 응원전을 펼치고 있다.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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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린씨는 이 경험을 사회학의 ‘상징 자본’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했습니다. 프랑스 사회학자 부르디외에 따르면 이는 개인이나 집단이 사회적 관계 내에서 얻는 인정, 명성, 평판 등의 자본을 의미합니다. 어떤 사람이 예린씨를 보고 ‘여자인데도 야구를 좋아한다고? 다른 여자들과 다르군!’ 하고 생각하면서 호감을 느낀다면 그 과정이 여기 해당하겠죠.
평소 저는 야구 말고 다른 스포츠도 즐겨보고, 스포츠카나 술 종류에도 관심이 많거든요.
그런데 이게 남자들이 좋아하는 분야라는 이유로 항상 비슷한 오해를 하더라고요.
심지어 취향과 관심사에 대해 친근하게 대화를 나눴을 뿐인데, 전혀 관심 없는 남자에게 고백을 받기도 했습니다. 여성스럽다, 남성스럽다 같은 건 누가 정하는 걸까요? 저는 그냥 저고, 스포츠, 자동차, 술을 좋아하는 것뿐입니다. 내가 뭘 좋아하든 그 안에 어떤 의도가 있다고 의심받지 않고 순수한 마음으로 편하게 ‘덕질’하고 싶어요.”
팬들 늘릴 것도 아니지 않나요?”
언제부터 여성이라는 이유로
팬들을 늘리는 사명까지 지니게 됐는지…
지난 9월 29일 프로야구 NC 다이노스와 한화 이글스의 경기가 열린 대전 한화생명이글스파크가 만원 관중으로 가득 차 있다. 한화는 이날을 끝으로 정든 한화생명이글스파크와 작별하고 다음 시즌부터는 신축 구장인 베이스볼 드림파크에 보금자리를 튼다.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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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린씨가 연구자로서 특히 주목하는 건 야구판의 여성혐오적 표현들입니다. 선수 얼굴만 본다는 ‘얼빠’, 특정 선수 이름을 붙여 극성 팬이라는 의미로 쓰이는 ‘○○ 맘’, 악성 개인 팬을 뜻하는 ‘○○○ 악개’, JTBC 예능 ‘최강야구’에 나오는 팀 최강 몬스터즈와 아줌마 팬을 합쳐 폄하하는 ‘몬줌’ 등이요.
현재까지 남성 팬 7명, 여성 팬 1명을 만나 인터뷰했다고 하는데요. 남성 팬 중에서도 여성 팬에 대한 시선을 어렴풋하게나마 인식하고, 문제라고 여기는 분들이 의외로 많았다고 합니다. 예린씨가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에 “아직까지 그런 게 남아 있는 것 같아요”라고 말한 남성도 있었고요.
10월 28일 광주 기아챔피언스필드에서 열린 2024 신한 SOL뱅크 KBO 포스트시즌 한국시리즈 5차전 삼성 라이온즈와 KIA 타이거즈의 경기. 삼성에 승리하며 7년 만에 통합우승을 달성한 KIA 선수들이 팬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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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성 팬은 남자인 친구에게도 ‘패션 야구팬’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친구가 경기엔 관심 없고 인증 사진만 찍는다고요. 야구 팬이 늘어나면서 전반적으로 새로 들어온 ‘뉴비(Newbie) 팬’들에 대한 불만이 있는데, 여성 팬이 많으니까 여성에 대한 비난으로 읽히는 것 같기도 하다는 게 예린씨의 이야기입니다.
오래된 남성 팬은 예린씨에게 억울(?)한 면을 털어놓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어 여자친구와 함께 야구장에 갔는데 중계 카메라가 본인은 쏙 빼고 여자친구만 잡는 모습 같은 거요. 본인도 중계에 등장하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거죠.
이들과 좀 더 깊게 이야기를 나눠보니 여전히 여성 팬들에 대한 이중적인 시선이 느껴졌습니다.
“남성들 대부분은 ‘여성분들이 야구장에 차별적인 시선을 느꼈다면 그건 당연히 잘못됐죠’라고 말해요. 그런데 정작 ‘○○ 맘’ 같은 표현을 아냐고 물어보면 ‘알죠, ○○ 맘들 되게 극성이잖아요. 되게 별로예요’라는 식으로 말씀하시거든요. 야구장의 여성혐오적인 문화를 약하게나마 인지하면서도, 정작 큰 문제라고 생각하지는 못하는 것 같아요.”
2024 신한 SOL 뱅크 KBO 한국시리즈 KIA 타이거즈-삼성 라이온즈의 5차전이 열린 10월 28일 오후 광주 기아챔피언스필드에서 한 관람객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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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린씨가 만난 한 남성 팬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여자 팬들 때문에 응원 문화가 무슨 아이돌 응원처럼 바뀌었어요. 팀이 아니라 개인, 특정 선수에 대한 과도한 응원이 야구장 분위기를 망치고 있어요. 야구를 유행처럼 소비하는 경향도 크고요. 여성 팬이 늘어난 게 실제로 무슨 도움이 되나요? 20대 여성들이 애 낳아서 팬들 늘릴 것도 아니지 않나요?”
스포츠 팬의 역할이란 경기 관람에 있는 거 아니었나요? 언제부터 여성이라는 이유로 팬들을 늘려야 하는(그것도 낳아서 말이죠) 사명까지 지니게 됐는지 저는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사실 여성 팬에 대한 이런 편협한 시각은 야구에만 한정되는 것도 아닙니다. ‘헤소니님’은 이렇게 써주셨습니다.
최근에는 손흥민 선수가 좋아서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를 챙겨보는데요, ‘손흥민만’ 응원하면서 축구 본다고 하면 안 된대요. 참나, ‘고귀한 취미’에 저같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끼어드는 게 정말 싫은가 봅니다.”
물론 남성 팬이라고 다 이렇게 생각하지 않겠지요.
하지만 남성이 스포츠를 좋아하는 건 당연하게 생각하면서 여성의 ‘애호’에는 ‘순수성’과 ‘진정성’을 의심하는 태도는 여전히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호기심이든 의심이든, 여성 팬을 그저 자신이 편한 어느 한 쪽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제가 알아서 할게요.”
▼ 김정화 기자 clean@kh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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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화 기자 clea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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