숱이 적은 머리를 정성스럽게 빗어 넘긴 마른 몸매의 남자가 흰 셔츠에 검은 양복을 입고 독일 연방 의회에 모습을 드러냈다. 단상으로 향해 걸어가는 그의 모습은 다소 긴장돼 보였다. 약 2년 전 러시아 연방 대통령으로 당선된, 곧 40대가 될 블라디미르 푸틴이었다. 의석 첫째 줄에서 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 총리가 앉아 있었고, 그 뒷줄에는 연방 의원이던 앙겔라 메르켈도 보였다.
마리옹 반 렌테르겜/ 권지현 옮김/ 롤러코스터/ 1만8700원 |
9·11테러가 발생한 지 2주 뒤인 2001년 9월25일, 러시아어로 연설을 시작한 푸틴은 2분30초 뒤에 느닷없이 독일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예정된 연설 30분 가운데 나머지 대부분 시간을 괴테, 실러, 칸트의 언어로 두 나라의 우정을 강조하는 데 할애했다. 이어서 공동의 적인 이슬람 세력에 맞서야 한다고 강조한 뒤, 마지막에야 자신이 바라던 경제협력 메시지를 던졌다.
“오늘날 독일은 러시아의 최대 경제 파트너입니다… 우리가 이 정도에서 기뻐하고 이만한 성취에 만족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러시아와 독일이 마주 잡은 협력은 아직 성장 잠재력이 충분합니다.”
푸틴이 연설을 하기 전인 4월에 이미 발트해 해저에 러시아와 독일을 잇는 가스관을 건설하기 위한 타당성 조사를 결정한 두 나라는 연설 2년 뒤에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맺고 가스관 건설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부터 경제 협력을 강화한 두 나라는 1973년에는 가스관 건설을 통해서 독일은 값싼 천연가스를 받고 소련은 자금과 설비를 챙기는 계약을 맺었다. 독일은 이후에도 꾸준히 대체에너지를 찾다가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터지자 값싼 러시아 천연가스로 돌진한 것이다.
러시아와 푸틴은 서유럽으로 향하는 가스관이 자신들과 적대적인 폴란드와 우크라이나를 경유해 가는 것에 늘 골치를 앓았다. 경유국에 가스관 사용료를 내야 했을 뿐만 아니라 가스관이 마치 인질처럼 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푸틴은 폴란드와 우크라이나를 경유하지 않고 곧장 독일로 향하는 가스관을 구상했고, 이것이 바로 노르트스트림1, 2였다. 노르트스트림은 푸틴이 잃어버린 소련의 위대함을 되찾기 위해 유럽 전역에 깔아놓은 덫이고 인질이자, 유럽 한복판에 던져놓은 현대판 트로이 목마였다.
책은 노르트스트림을 중심으로 수백 명의 관련자들을 인터뷰해 과대망상에 가까운 푸틴과 러시아의 야욕이 어떻게 시작되었고, 어디에서 힘을 얻었으며, 서방 국가들은 어떻게 동조했는지 추적한다. 이를 통해서 유럽과 러시아, 미국의 국가적 이해관계와 각 개인의 욕망과 전략적 오판 등이 뒤엉켜 만들어진 21세기 국제관계를 재구성한다.
푸틴과 러시아의 야욕은 막판에 좌절됐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7개월째 되던 9월26일, 발트해 해저에 설치된 노르트스트림1, 2 가스관이 익명의 공격에 의해 철저히 파괴됐다.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 세상을 보는 눈, 세계일보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