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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3 (토)

[모던 경성]당대 작가들이 꼽은 해외진출작 1순위, 이광수 이기영 정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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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라이브러리속의 모던 경성]1936년 ‘삼천리’ 설문조사, 심훈 “내 작품 좀 보내줬으면”

조선일보

춘원 이광수는 당대 작가, 예술가들이 꼽은 '해외로 보내고 싶은 작품'에 가장 많은 추천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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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초 파인 김동환이 발행, 편집을 맡은 월간지 ‘삼천리’가 흥미로운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유명 작가, 예술가들에게 ‘영어 또는 에쓰어(語,에스페란토)로 번역하여 해외로 보내고 싶은 우리 작품’을 추천받은 결과였다. 근대 문학이 발돋움하던 90년전, 해외 독자까지 시야에 넣고 이런 기획을 했다는 게 신기하다. 한국문학번역원이 출범한 때가 1996년 이고, 2000년대 들어 한국 문학작품이 번역을 통해 해외에 본격적으로 소개된 것을 떠올리면 얼마나 앞선 기획이었는지 알 수있다.

삼천리 조사에 응한 유명 예술가는 23명. 양주동 유진오 채만식 염상섭 심훈 전영택 안석주 김안서 최독견 김태준 노자영 함대훈 장덕조 김광섭 장혁주 이일 홍효민 이무영 정내동 유치진 서항석 임화 민병휘이다.

◇이광수 ‘무정’ ‘흙’ ‘역사물’ 꼽혀

‘조선의 톨스토이’로 꼽히던 춘원 이광수는 다수의 지지를 받았다. 양주동은 ‘춘원의 역사물 2,3종’, 김광섭은 ‘초기 작품’, 김태준은 ‘무정’을 꼽았다. 전영택은 이광수의 ‘흙’을 꼽았고, 유치진은 “정지용씨의 시, 이광수씨의 소설 중 어떤 것을 세계 문단에 보내도 부끄럽지 않을 것”이라고 답했다. 문학평론가 홍효민은 이기영 장혁주 유진오와 함께 이광수를 꼽았다.

◇이기영의 ‘고향’, 김동인도 인기

1933~1934년 조선일보에 단편 ‘서화(鼠禍)’와 장편 ‘고향’을 잇달아 연재한 카프 작가 이기영도 두루 추천을 받았다. 카프 출신 평론가 임화를 비롯, 장혁주 홍효민 김태준 민병휘가 단수 또는 복수로 ‘고향’을 꼽았다. 특히 임화는 “세계에 자랑할 문학은 아직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라면서 ‘고향’을 단수로 추천했다.

김동인은 김안서, 김광섭,전영택의 추천을 받았다. 김안서는 ‘아라사 버들’, ‘광염소나타’ ‘명화 리디아’, 김광섭은 ‘김동인 단편 소설’, 이광수 ‘흙’을 꼽은 전영택은 김동인 ‘감자’도 함께 골랐다.

이태준도 다수의 추천을 받았다. 유진오는 이효석과 함께 이태준을 꼽았고, 중문학자 겸 기자 정내동은 이무영과 함께 이태준을 추천했다. 소설가 겸 평론가 장혁주는 이기영 ‘고향’과 함께 이태준의 ‘색시’, 유진오의 ‘T교수와 김강사’를 추천했다. 주요섭 ‘사랑 손님과 어머니’(노자영 추천) 현진건 ‘B사감과 러브레터’(김안서) 박화성 ‘백화’(白花, 장덕조)도 이름을 올렸다.

조선일보

정지용은 당대 작가, 예술가들이 뽑은 '해외로 보내고 싶은 작품'중 시인으로선 가장 많은 추천을 받았다.


◇시인은 정지용이 압도적

시인은 정지용이 압도적이었다. 양주동을 비롯, 유치진, 서항석, 이무영이 정지용을 꼽았다. ‘성북동 비둘기’를 쓴 시인 김광섭은 김동환의 ‘국경의 밤’과 함께 역시 ‘지용시(詩)’를 추천했고, 정내동은 청마 유치환와 함께 정지용시를 꼽았다. 여성 소설가 겸 기자 장덕조는 ‘모윤숙 시집’을 꼽았다. 민병휘 홍효민은 임화를 꼽았다. 김광섭, 정내동이 유치진의 희곡을 꼽은 것도 이채롭다.

◇'추천작 없음’

‘추천작이 없다’고 단칼에 자른 답변도 있었다. 채만식, 염상섭은 “아직 없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승방비곡’을 쓴 인기작가 최독견은 이렇게 답했다. 만문만화로 이름난 안석주는 “제 개인의 입으로는 말하기 싫습니다”라며 ‘춘향전’같은 고전을 추천했다. 일본에서 러시아 문학을 전공한 1세대 함대훈 역시 “대단 거북합니다”라고 했다. 안석주처럼 좁은 문단에서 특정 작품을 거론하기 곤란했거나 그럴 만한 작품이 없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영화배우, 감독, 신문기자 등 다채로운 경력의 작가 심훈은 호기롭게 답했다. “이 사람이 걸작을 낳거든 귀사(貴社)에서 한번 그렇게 해주십시오.”

조선일보

1931년 미국에서 영어로 출간한 자전적 소설 '초당'으로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킨 강용흘을 소개하는 기사. 뉴욕대 대학원에 다니던 한보용이 썼다. 조선일보 1931년 4월2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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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부터 길러야

한국 문학의 해외 진출을 위해선 먼저 번역가를 양성해야 한다는 선견지명을 내비친 응답은 눈길을 끈다. ‘영어, 애세불가독어(愛世不可讀語)로 번역하야 세계에 보내려고 우리 문단에서 작품을 수색하는 것도 좋을 듯하지만 우선 영어와 에세어(愛世語)학자를 양성하고 또 그보다 더 조선의 무엇이 테마가 된 작품을 읽어줄 관대하고 유한한 독서가가 세계 각국에 몇 명이나 있을는지 근년 조선 테마의 작품인 ‘초당’ ‘일본의 조선’을 읽은 외국 사람이 누구누구인지를 알고 싶습니다.’

이일은 번역가 양성은 물론 세계 출판시장에서 한국 문학을 읽어줄 독자가 누군지부터 파악해야한다는 의견을 냈다. ‘애세불가독어’(語)는 에스페란토를 가리킨다.

‘초당’(草堂, The Grass Roof)은 3.1운동 이후 미국에 건너간 강용흘(1898~1972)이 영어로 출간한 소설로 일제 지배와 3.1운동을 배경으로 한 자전적 작품이다. 한국인이 영어로 발표, 미국 사회에서 반향을 일으킨 최초의 소설이다. 뉴욕타임스와 뉴욕 헤럴드트리뷴 같은 유수 일간지에서 호평할 만큼 반응도 뜨거웠다.

◇뉴욕 유학하던 한보용, ‘초당’ 반향 현지 보도

당시 뉴욕대 대학원에 유학중이던 한보용은 ‘미국 문단에 조선 사람의 예술적 작품이 출현되기는 아마 이번이 처음일까 한다’(‘강용흘군의 영문소설 뉴욕에서 발행격찬’, 조선일보 1931년4월22일)며 현지 반응을 전했다. 한보용은 ‘젊은 조선 망명가 강용흘군의 이 한 권의 예술품은 만약 xxx민족에게 정치적 역사가 없다며 적어도 그들이 예술은 창조할 수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웅변한다’는 뉴욕타임스 북리뷰 기사를 인용했다. ‘조선은 극동의 xx이다. xxxxxxxxxxxxxxxxxxxxx이 같은 정세하의 이 책의 출현은 확실히 금일까지 서구에 나타난 지나(중국) 및 일본 문학에 일대 치욕을 던졌다’고 썼다. 독립이나 민족의식을 자극하는 표현이 많아 검열당국에 삭제당한 듯하다.

강용흘의 ‘초당’ 출간 소식은 국내에도 빠르게 전파돼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932년 뉴욕대 대학원을 졸업하고 귀국한 한보용은 이듬해 조선일보에 입사, 미국 및 세계정세를 분석한 심층 기획을 많이 쓰면서 정치부장, 논설위원을 지냈다.

한국 문학을 해외에 소개할 번역가를 기르고 한국 문학 작품을 읽어줄 해외 독서시장의 실태를 파악해야한다는 제안은 여전히 유효하다. 2000년대 들어 한국 문학의 세계 진출 또한 비슷한 공식을 따라 이뤄졌기 때문이다. 맨부커상에 이어 노벨문학상까지 수상한 한국 문학의 성취는 마땅히 축하할 일이다. 세계 10대 경제대국이자 영화, 드라마, K팝으로 세계인의 호감을 얻은 대한민국의 성취와 성찰이 없었다면 꿈꾸기 어려웠을 일이다. 한국 문학의 세계 진출을 꿈꾼 몇세대전 선인(先人)들의 글을 읽다가 든 생각이다.

◇참고자료

‘영어 또는 에쓰어(語,에스페란토)로 번역하여 해외로 보내고 싶은 우리 작품’, 삼천리 1936년2월

박숙자, 속물의 교양의 탄생,2012, 푸른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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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철 학술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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