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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0 (월)

[김정탁의 인문지리기행] 일본 근대화 도운 영국 상인 남편 따라 인천서 살다 묻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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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청량산과 ‘나비부인’의 외동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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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탁 노장사상가


인천의 옛 송도유원지 뒤편으로 청량산이 있다. 해발 170m의 작은 산인데 산 아래로는 인천상륙작전 기념관이 자리한다. 청량산에는 얼마 전만 해도 인천 유일의 외국인 전용 묘지가 있었다. 11개 나라에서 온 66명의 외국인이 묻혔는데 원래는 월미도 부근 자유공원에 있었다. 이들은 1965년에 도시계획에 따라 청량산에 안장되었다가 지금은 부평의 인천가족공원 납골당에 옮겨졌다. 묘지의 주인공들은 인천항이 개항되면서 입국해 체류한 의사·선교사·교관 등이다. 이들 중 하나가 푸치니 오페라 ‘나비부인’의 실제 모델이었던 일본인 여성의 외동딸 하나 글로버(Hana Glover, 1871~1938)다.



아버지는 ‘스코틀랜드 사무라이’

일본서 상사 차려 군함·기차 수입

서구 상인, 무사 계급과 이해 맞아

료마 도와 메이지 유신에도 영향

어머니 극적인 삶 오페라에 영감

남편과 인천 신포동·항동서 40년

게이샤 출신 어머니 나비 좋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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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산에서 바라본 인천 풍경. 멀리 송도 신도시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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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어떻게 해서 청량산에 묻혔을까? 그녀의 아버지 토머스 글로버는 일본 나가사키에서 오랫동안 활동한 스코틀랜드 출신 무역상이다. 그에게는 이미 ‘카가 마키’라는 일본인 아내가 있었지만 오사카를 여행하다가 이혼녀로 게이샤가 된 ‘단가와 시루고’(일명 쓰루)를 만나 결혼해서 외동딸을 낳았다. 그 딸이 하나 글로버다. 그녀의 어머니 쓰루는 나비를 좋아해서 사람들이 나비부인이라 불렀는데 존 롱이 그녀의 일대기에 영감을 받아 소설을 쓰고, 이 소설이 데이비드 벨라스코에 의해 희곡으로 완성되면서 푸치니가 오페라로 만들었다.

‘나비부인’은 막부(幕府) 말기에 단지 정치적 입장의 차이로 친정에 의해 사무라이 남편과 강제로 이혼당해 방황하는 17세 유부녀의 가련한 삶을 근대적 시각으로 각색한 오페라다. 푸치니는 일본을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는데 이 오페라를 통해 자살로 마감하는 나비부인의 비극과 동양 여성의 모성애 사이의 틈새를 멋진 미학으로 승화시켰다. 또 ‘나비부인’의 무대인 나가사키를 서구에 신비로운 도시로 알려 일본에 몇 안 되는 개방항의 이미지를 더욱 매력적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약 50년 후인 1945년 이 도시에 원자폭탄이 떨어졌으니 안타깝기 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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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공원에서 내려다본 인천 내항. 하나 글로버는 사진 왼쪽 인천우체국이 있던 곳과 오른쪽 올림포스 호텔 자리에 있던 주택에서 살았다. [사진 김정탁, 최원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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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부인의 딸 하나는 1896년 영국인 월터 베넷과 나가사키 부모의 집인 ‘구라바엔’에서 결혼식을 올린 뒤 남편을 따라 생면부지의 땅 인천에 도착했다. 그녀의 남편은 인천에서 광창양행(廣昌洋行, 영어명 베넷상사)이란 무역회사를 차린 뒤 인천 주재 영국 영사도 겸했다. 광창양행은 장인 토머스 글로버가 나가사키에서 운영하던 글로버상사의 조선 측 파트너사다. 하나 글로버는 인천 앞바다가 한눈에 바라보이는 신포동(구 인천우체국 뒤쪽 주차장)에서 살다가 항동(현 올림포스호텔 터)으로 이사한 뒤 1938년 67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인천에서 40년을 살았다.

한편 글로버상사는 토머스 글로버가 21세 때 이화양행(怡和洋行, 영어명 Jardine Matheson Holdings)의 주재원으로 일본에 들어와서 3년 후에 차린 회사다. 이화양행은 스코틀랜드 출신 무역상들이 일찌감치 중국 광저우에 세운 회사인데 아편 밀수와 중국 차의 영국 수출을 통해 막대한 부를 쌓았다. 그 후 이화양행은 영국 의회를 움직여서 아편전쟁까지 일으키고, 또 아편을 팔아서 번 돈을 영국으로 송금하기 위해 홍콩상하이은행(HSBC)도 설립했다. 이런 이화양행의 일본 측 파트너사가 글로버상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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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글로버 부부가 살았던 자리에 서 있는 올림포스호텔. [사진 김정탁, 최원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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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광저우의 이화양행은 아편을 팔아서 중국을 구렁텅이로 빠뜨린 데 반해 나가사키의 글로버상사는 일본 근대화에 적지 아니 기여했다. 글로버상사도 처음에는 차·생사·은·도자기 등 일본 특산품을 유럽에 수출하는 평범한 무역회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막부 말기의 혼란한 시기를 틈타 웅번(雄藩) 중 하나인 사쓰마번과 일본 근대화의 선구자인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가 운영하는 해운회사 가메야마사추(龜山社中)로부터 총과 군함의 수입을 비밀리에 의뢰받으면서 메이지 유신 주역들과 깊은 유대를 형성했다. 그러면서 막부가 독점한 외국과의 무역 체제를 무너뜨린 뒤 큰돈을 벌었다.

일본 젊은 인재 영국 유학도 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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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 후 인천에 지어진 서양 주택 모형. [사진 김정탁, 최원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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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버는 이렇게 번 돈으로 막부와 대립한 조슈번과 사쓰마번을 몰래 그리고 통 크게 지원했다. 1863년 조슈번이 막부의 허가 없이 ‘조슈 파이브’라 불리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야마오 요조(山尾庸三), 이노우에 마사루(井上勝),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엔도 긴스케(遠藤謹助) 등 5명의 젊은 인재를 영국에 유학 보낼 때 이화양행의 배에 몰래 태워서 이들의 밀항을 도왔다. 2년 후 사쓰마번 소속 청년 15명이 영국에 비밀리에 유학 갈 때도 이와 똑같이 도왔다. 막부가 알면 극형감이었는데 일본 근대화를 위해 이 정도 위험은 감수했다.

글로버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이들이 런던 유니버시티 칼리지 등에서 공부할 때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그래서 영국인들은 이들을 가리켜서 ‘매더슨 보이스(Matheson Boys)’, 즉 매더슨상사(이화양행)가 돌보는 아이들이라고 불렀는데 실제로는 글로버가 막후에 있었다. 놀라운 건 이들이 영국에서 돌아온 뒤 존왕양이(尊王攘夷)를 부르짖던 수구적 젊은이에서 개화의 선봉장으로 180도 변했다는 점이다. 글로버가 이들을 후원한 건 미래를 보고 투자한 건데 메이지 유신의 성공으로 대박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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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부인 쓰루. 딸 하나 글로버가 결혼하고 난 후 불과 2년 밖에 더 살지 못해 딸을 만나러 인천에 왔을 가능성은 작다. [사진 김정탁, 최원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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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유신이 성공한 데는 앙숙지간이던 사쓰마와 조슈 두 웅번 사이의 동맹, 즉 삿초(薩長) 동맹이 크게 자리한다. 이 동맹을 위해 료마가 주도적으로 움직였는데 글로버의 역할도 무시할 수 없다. 료마는 가메야마사추를 통해 글로버와 동업자 관계를 유지했어도, 이 회사는 사실상 글로버가 료마를 얼굴마담으로 내세운 위장회사다. 그러니 료마만큼은 아니더라도 삿초 동맹 체결에 글로버도 적지 아니 기여했다. 글로버는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메이지유신 후 서양인 최초로 일본 정부로부터 훈장을 수여받았다. 일본인도 그를 가리켜서 ‘스코틀랜드 사무라이’라고 불렀다.

참고로 군함 운양호(雲揚號)를 수입해 일본에 판매한 사람도 글로버다. 운양호는 1876년 강화도 포격 사건을 일으켜서 조일수호조약을 맺는 데 결정적 단서를 제공했다. 이 배는 글로버의 고향 스코틀랜드 애버딘 조선소에서 1868년에 건조돼 죠슈번이 몰래 구매해 사용하다가 메이지유신 후 일본 해군에 편입되었다. 그래서 강화도 포격에 동원되었다.

글로버는 메이지유신이 성공한 후에도 일본 근대화를 위해서 또다시 헌신했다. 항구 도시 애버딘에서 살았던 경험을 바탕으로 나가사키에 서구식 항구를 조성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또 일본 최초로 증기기관차를 들여와서 철도회사를 차리고, 미쓰비시조선의 전신인 조선소도 만들었다. 그리고 맥주(기린 맥주)·성당·주택 등에 ‘일본 최초의 서구식’이란 수식어가 붙어 다닐 정도로 일본에 서구화의 바람을 크게 일으켰다. 이에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라는 칭호까지 주어졌다.

조선 근대화는 왜 늦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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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글로버 가족. 뒷줄 오른쪽 끝이 토머스 글로버. 토머스 글로버부터 시계 방향으로 며느리, 딸 하나 글로버, 여동생, 첫 번째 부인 사이에서 난 아들, 남동생. 나가사키의 저택 구라바엔에서 찍었다. [사진 김정탁, 최원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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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 일본 무사들은 글로버와 같은 서구 상인들의 도움을 받아서 막부를 타도하고, 메이지 유신을 통해 일본을 근대화로 이끌었다.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선데 이 과정에서 일본 무사들은 서구 상인들에게 끌려다니지 않고 일본을 부강하게 만드는 데 이들을 적절히 활용했다. 시대를 앞서가는 예지력과 세상을 주도하는 실천력을 갖추었기에 가능했다고 본다. 이에 비해 갑신정변 주역들은 실천력은 갖추었는지 몰라도 예지력이 부족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일본을 너무 믿고 서둘러서 행동하다가 실패한 게 좋은 증거다.

당시 조선에도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 도움을 준 서양인이 있었다. 언더우드·아펜젤러·헐버트·베델 등이다. 이들은 의료·교육·종교·언론 제 분야에서 우리를 헌신적으로 도왔는데 어째서 조선에선 근대화 바람이 일본처럼 거세게 불지 않았을까? 조선 문사(文士)들에게는 서생적 문제의식은 넘쳐났어도 상인적 현실감각이 무디어서다. 하긴 조선에선 상업을 말업(末業)이라고 해 오랫동안 천시해왔으니 이들에게서 어찌 현실감각을 기대할 수 있으랴. 그러니 나비부인 남편과 같은 존재가 있었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고 본다.

김정탁 노장사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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