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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30 (월)

[특파원 리포트] 중국 경제의 희생양, 링링허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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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외곽 마쥐교(馬駒橋) 인력시장에서 큰 길 따라 500m 걸어가면 일용직 노동자들의 ‘일세촌(日貰村)’이 나온다. 4인실의 하룻밤 숙박료는 단돈 20위안(약 3700원). 취업난 속에 청년들이 요즘 이곳에 둥지를 튼다. 이달 초 방문한 한 숙박업소 마당 빨랫줄에는 ‘청년 분투(奮鬪)’란 문구가 적힌 티셔츠가 걸려 있었다. 희망의 흔적을 발견한 것 같아 숙박업소 주인에게 “청년들이 아직 투지가 남아 있는 모양이다”라고 말을 걸었다. 그랬더니 “미쉐빙청(저가 밀크티 프랜차이즈) 아르바이트생 유니폼인데요?”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중국 경제 위기로 인해 가장 큰 희생을 치르는 것은 ‘링링허우(2000년 이후 출생한 20대)’가 아닐까. 부동산 시장 침체·소비 부진, 지방정부 부채·과잉 생산 등 복합적인 난관 속에 이들의 미래가 발목 잡혔다. 경제 성장이 더디니 일자리가 줄었다. 설상가상으로 올해 여름 중국의 대학 졸업생이 사상 최다인 1179만명에 달했고, 코로나 기간에 누적된 실업자들도 취업 시장에 쏟아지면서 청년실업률이 18%(8월·재학생 제외 기준)를 돌파했다.

베이징에서 만난 중국 대학생들은 “부모님이 귀하게 키워주셨는데 ‘란웨이와(爛尾娃·취업 실패로 ‘미분양’된 아이)’로 전락해 죄송하다“고 하소연한다. 대도시의 청년들은 취직을 위해 중소 도시로 내려가고, 유능한 이들은 몸값을 깎고 또 깎는다. 중국 임시 노동자의 50%가 25세 이하(작년 11월 구직 사이트 즈롄자오핀 집계)란 통계도 있다.

“중국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해 한 세대의 희생은 불가피하다”는 말을 최근 들은 적 있다. 중국 정·재계에 발이 넓은 이의 말이었는데, 그의 머릿속에서 ‘중국’은 5000년의 생(生)을 이어가는 생물이었다. 큰 그림에서 미국의 대(對)중국 압박과 장기적인 내부 안정을 위해 당장의 경제 회복보다 ‘기술 돌파’ ‘국가 안보’에 국가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그러니 청년들의 고통은 거대한 용(龍)이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과정에서 생기는 생채기로 치부된다.

중국 소셜미디어에선 “청년들은 아무리 맞아도 잠잠[風平浪靜]하다”는 자조 섞인 글도 올라온다. 이에 대해 베이징에서 만난 20대 대학생은 “온(穩·가만히 있다)하지 않으면 어쩌겠느냐”면서 “인터넷 대출로 돌려막고, 부모님에게 의존하며 살 수밖에 없다”고 했다. CCTV 감시와 인터넷 검열이 촘촘하고, 애국주의 교육이 충분히 이뤄진 나라에선 반항도 낯설다.

그러나 청년들이 풀 죽으면, 당장의 경제 성장뿐 아니라 미래까지 저당 잡히는 악순환이 일어나지 않을까. 중국 베이징 상업 중심 지구인 궈마오의 쇼핑 거리 스마오톈제는 한때 청년들로 붐볐지만 이젠 가게들이 문 닫고 회전목마가 철거됐다. 이곳의 스산한 풍경은 청년들이 신음하며 식어가는 중국 경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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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이벌찬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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