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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30 (월)

[특파원 칼럼/이상훈]‘공기를 안 읽는’ 이시바, 기시다보다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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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이상훈 도쿄 특파원


일본 차기 총리인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집권 자민당 총재를 만난 건 6년 전이다. 해외연수차 일본 와세다대 방문연구원으로 있던 2018년 11월, 그가 특강을 하러 와세다대 캠퍼스를 찾았다. 그해 10월 대법원이 일제강점기 강제 동원 피해자 배상 판결을 확정하면서 한일 관계가 최악으로 치닫던 때였다. 그로서는 2개월 전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총리에게 패하면서 암중모색(暗中摸索)하던 때다.


금기 개의치 않고 대담한 주장


‘강제 동원 판결로 얼어붙은 한일 관계를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 맨 앞자리에서 연구자 자격으로 질문을 던졌다. 몇 초간 생각하던 이시바 총재가 입을 열었다.

“판결은 국제법적으로 잘못됐다. 하지만 합법적으로라도 독립국이었던 한국을 합병하고 (조선인의) 성을 바꿨다. 그런 역사가 있었다는 것을 어떻게 인식하느냐가 중요하다.”

냉기가 느껴질 정도로 강의실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2시간에 걸친 강연과 질의응답 중 이 부분만 다음 날 일본 언론에 보도돼 한국에도 전해졌다.

그날의 에피소드를 일본인들에게 들려주면 2가지 반응이 나온다. 일본에서 누구도 한일 관계를 입에 못 올리던 시기에 돌직구 질문을 던져 신기하다는 게 첫 번째 반응이다. 자민당에서 작심하고 ‘한국 때리기’에 나서던 시기에 여당 유력 정치인으로 한국을 알아야 한다고 말해 놀랍다는 게 두 번째다. ‘공기(空氣)를 읽는다’는 표현이 있을 정도로 눈치와 분위기 파악이 중요한 일본 사회에서 ‘공기를 읽지 않은’ 연구자와 정치인의 문답은 6년이 지나 새 총리의 한국 관련 발언으로 다시 주목받고 있다.

자민당 보수 강경파들이 ‘혐한 선동 경쟁’을 하던 최근 십수 년간, 그는 한국을 알고자 하던 몇 안 되는 정치인이었다. 이시바 총재는 과거 강연에서 “일본이 다른 나라에 점령당해 오늘부터 ‘너는 스미스다’라고 하면 어떻겠나”라고 말했다고 한다. ‘후손에게 사죄 숙명을 지우지 말자’(2015년 아베 담화)며 가해 책임에 입을 닦은 아베 전 총리와 분명 다르다.

하지만 주변 눈치 보지 않고 할 말을 하는 그의 취임 후 첫 일성은 ‘아시아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창설이다. ‘한국 때리기’에 동조하지 않았던 그는 이제까지의 금기도 개의치 않는다. 동아시아 관여에 일정 수준 이상을 넘지 않으려는 미국의 눈치도, 해양 진출을 강화하는 중국의 압박도 개의치 않고 할 말을 하겠다는 입장이다. 핵 반입을 공공연하게 주장하며 ‘핵은 만들지도, 갖지도, 반입하지도 않겠다’는 60년간의 ‘일본 비핵 3원칙’도 벗어던질 태세다.

4년 7개월간 외상을 지낸 ‘외교의 달인’ 기시다 총리와 방위 정무직만 3번을 역임한 ‘국방 전문가’ 이시바 총재는 다르다. 한국으로서는 더 어려운 카운터파트(counterpart)다. 차기 이시바 정권이 과거사에 과감하게 전향적 입장을 취하면서 집단 방위 체제 참여를 제안한다면 어떻게 될까. 과거사는 손을 잡고 ‘아시아판 나토’에선 발을 빼는 취사 선택이 가능할까. 주한미군을 주둔시키는 미국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


‘아시아판 나토’ 한국에 어려운 도전


한국은 이제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도전에 직면해 있다. 일본은 우크라이나, 중동의 2개 전선으로 힘겨워하는 미국을 파고들며 ‘미일 동맹을 축으로 아시아 집단 안보 체제를 구축하자’는 정치인을 리더로 세웠다. 우리에겐 눈살을 찌푸리게 할 정도로 순진한 대일 인식의 현 정부와 “중국에도 셰셰(謝謝·고맙다), 대만에도 셰셰 하면 된다”는 야당 말고는 선택지가 없다. 상황 파악조차 제대로 못 하는 정치권을 바라보는 국민 등에서 식은땀이 흐른다는 걸 한국 정치인들은 알기나 할까.

이상훈 도쿄 특파원 sanghu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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