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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30 (월)

서민은 왜 분노하는가 [삶과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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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기록적인 폭염으로 채소 가격이 크게 오른 지난달 24일 서울 한 마트에 배추 한 망에 4만9,800원이라는 가격표가 놓여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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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근 하나가 5,000원, 배추 한 포기가 9,500원이라 장을 보고 오면 10만 원을 넘기기는 우습다. 돌아오는 길에 김밥 한 줄을 사먹으려면 5,000원 아래는 없다. 유튜브를 보는 주부에게 가장 인기 있는 주제는 '2만 원으로 1주일치 반찬 만들기' 같은 것이다.

지난 4~6월 가구당 여윳돈이 월 100만9,456원이라고 한다. 소득에서 이자 세금 의식주를 뺀 실질 흑자액이다. 8분기 내리 줄기만 한 건 처음이라고 한다. 게다가 집집마다 학원비 의료비를 내고 나면 돈이 없어 빚으로 줄타기를 하는 집들이 늘어간다.

쉰 몇 살에 간신히 회사에 남은 친구는 "대출 갚고 나면 봉급이 스쳐간다"고 한다. 장사하는 친구는 "이자와 임차료를 내면 버나 마나다"라고 한다. 출세해서 회사 대표가 된 친구들은 여유가 있을 듯한데 "축하한다"고 카톡을 보내면 묵묵부답이어서 퇴직 후에나 전화해야 한다.

지난해 기준 가구당 평균 9,186만 원의 빚이 있다고 한다. 동창들의 채무는 주로 아파트를 사며 생겼다. "죽어라 일해 모은 돈보다 아파트값이 뛰어 번 돈이 몇 배나 많으니 빚내서 안 사면 '벼락 거지'가 된다"고 한다. (전세로 살자니 전셋값도 뛴다.) 일할 맛이 나겠는가? 아파트값이 뛰어야 숨을 돌리는 것이다.

최근에는 아파트값이 뛰는 지역이 정해졌다. 서울의 강남 용산 여의도 등지다. 그런데 공직자들이 공개한 재산과 우리의 경험을 통해 보면 국회의원과 국무위원, 판검사, 주요 방송사와 신문사의 고위 간부들, 주요 대학의 영향력 있는 교수들의 상당수가 이 지역에 집을 갖고 있다.

"'이런 파워 맨들이 자기 아파트값이 주저앉으면 가만히 있겠는가? 우리 경제는 건설업과 관련업 비중이 아주 크다. 게다가 아파트를 팔고 사야 세금도 많이 걷힐 게 아닌가? 은행을 지배하는 경제 관료들이 때때로 규제도 풀고 대출 혜택도 줘서 값을 올릴 건 보나마나다.' 이런 생각으로 전국에서 돈깨나 만지는 이들이 수십 년간 사들여서 올린 것이 이 지역의 아파트값이다." 이것이 서민 친구들의 민심이다. 이들은 여윳돈이 거의 없다.

체념과 슬픔이 어린 이런 생각을 느리고 희미하게나마 낙관으로 바꿔놓는 일을 하라고 서민들이 뽑아준 사람이 국회의원들이다. 그런데 이들이나, 수천 명을 헤아리는 국회의원 지망자들의 상당수 역시 서울의 요지에 아파트나 상가들을 가지고 있다. 이 자체를 탓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지역민의 이익을 대변하겠다'는 진정성은 있어야 한다. 4월 총선에서 수원에서 출마한 한 교수는 정의로운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서울의 요지 곳곳에 아파트와 상가를 갖고 있어서 "왜 수원에서 나왔는가?"하는 의구심을 자아내다가 낙선했다.

정치가들은 '나를 아껴준 이 지역의 살림이 기울면 나는 옥처럼 부서지겠다'는 결기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지역구에 '그저 주소만 올린' 사람은 '떠날 배를 나루터에 대놓고' 배수진을 치지 않는다. 그런데 현재 선거는 '오로지 내 이웃 서민들을 위해' 눈물 젖은 삼각김밥을 먹어가며 봉사하고, 경제와 지역개발 능력을 갈고닦은 정치가다운 정치가를 뽑지 못한다. 서민들은 기댈 데가 없어서 눈물을 흘린다. 뭔가를 바꾸고 갈아엎어야 살 것 같은데, 진정으로 그 일을 해낼 사람들이 보이지 않아서 분노한다.
한국일보

권기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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