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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30 (월)

[매경데스크] 서독은 '두 국가론' 용인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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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잊혀가던 정치인 임종석이 지난 열흘간 화제의 중심에 섰다. 공천 학살의 대상이 됐을 때보다 더 뜨거운 이슈였다. 그는 '임길동'이라고 불리며 수배를 피해 다닌 운동권 스타였다. 뜨거운 청춘을 보낸 대가는 컸다. 서른네 살에 국회의원이 됐고 갓 쉰을 넘어 청와대 비서실장에 올라 남북정상회담을 주도했다.

2018년 9·19 평양공동선언에는 "남북 관계 발전을 통일로 이어갈 것을 바라는 온 겨레의 지향과 여망을 정책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기로 했다"는 문구가 각인돼 있다. 그래서 불과 6년 뒤 9·19 기념식에서 임종석이 던진 화두는 더욱 도발적으로 다가온다.

논란이 커지자 남북은 1991년 유엔 동시 가입으로 '명실상부하게' 두 국가 상태라며 자신의 주장이 새로운 것이 아니라고 했다. 통일 유보론을 제시한 것이지 김정은의 '적대적' 두 국가론에 동조하지 않는다고 재차 선을 그었다.

하지만 3300자짜리 연설문 전체를 읽어보면 그가 작심하고 '미끼'를 던졌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기념사는 "통일, 하지 말자"로 시작한다. 곧이어 "객관적 현실을 받아들이고 두 개의 국가를 수용하자"로 이어진다. 그러면서 헌법 3조의 영토 조항을 지우든지 개정하고, 국가보안법과 통일부를 없애자고 주장했다.

임종석은 "통일 논의는 봉인하고 30년 후에나 잘 있는지 열어보자"고도 했다. 통일은 미래 세대의 권리이니 그들에게 선택지를 넘기자는 주장에 이르면 답답해진다. 그런 논리라면 대부분의 국가 정책이 유보돼야 한다. 윤석열 정부의 고위 관계자는 필자에게 "1945년 모스크바 3상 회의 이후 좌익 진영이 김일성 뜻에 따라 친탁(신탁통치 찬성)으로 돌아선 것과 똑같다"고 했다. 보수 진영의 반응은 대체로 이렇고, 진보 진영조차 돌출 발언으로 치부하며 파장을 줄이려는 분위기다.

봉인할 대상은 통일이 아니라 두 국가론이라는 점은 서독의 전례가 웅변한다. 1990년 독일 통일은 두 가지 동력으로 이뤄졌다. 보수와 진보를 오가며 정권이 바뀌어도 지도자들의 통일에 대한 신념이 바뀌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압도적 국력 차이를 만드는 데 집중했다.

동방정책을 주창한 사회민주당의 빌리 브란트는 통일은 많은 단계를 거쳐야 하며, 이를 위해 비열한 동독 체제와도 함께 가야 한다고 국민을 설득했다.

반면 동독은 1968년 헌법에서 통일을 지운 뒤 '두 국가론(Zweistaatlichkeit)'을 강하게 주장했다. 독일에는 두 개의 주권 국가가 존재하며 통일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브란트는 1972년 동서독 기본조약을 맺고 동독을 사실상의 국가로 수용했지만 이후에도 통일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서독 지도자들은 보수든 진보든 '독일은 하나'라는 원칙을 버리지 않았다.

한스 몸젠, 위르겐 하버마스 같은 서독 좌파 이론가들도 탈민족론과 유럽공동체를 통한 공존을 주장했으나 통일 폐기론 앞에서는 멈춰 섰다.

물론 독일 통일과 한반도가 마주한 현실에는 35년의 시차만큼이나 환경적 간극도 크다. 동독에는 김씨 왕조와 같은 공고한 독재가 자리 잡지 않았고, 서독은 신념 있는 정치 리더를 가졌다. 그래서 동독 내에 자발적인 민주화 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동베를린 알렉산더광장에 모여든 100만 시위대가 기어이 베를린장벽을 무너뜨렸다. 반면 우리는 냉온탕을 오가며 북한 핵무장을 속절없이 지켜보다가 마침내 두 국가론 앞에 섰다. 그럼에도 하나의 한국이라는 대원칙을 양보하지 않으면서 압도적 힘의 우위를 갖춰가는 것밖에는 도리가 없다. 통일은 수십 년, 수백 년 뒤에도 한반도를 살아갈 한국인에게 항구적 평화와 성장을 동시에 가져다줄 기회이자 선물이다. 그 점이야말로 불가역적 원칙 아닌가.

[신헌철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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