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텐션! 빅, 오션입니다!” 동아미디어센터에서 만난 K팝 최초 청각 장애 아이돌 그룹 ‘빅오션(Big Ocean)’ 멤버들은 이런 구호를 당차게 외쳤다. 팀 이름에는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고 싶다’는 포부가 담겨있다. 왼쪽부터 지석(메인 댄서) 현진(메인 보컬) 찬연(메인 래퍼).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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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4월 20일, 3인조 남성 아이돌 그룹 ‘빅오션(Big Ocean)’이 데뷔했습니다. 준수한 외모에 호감 가는 미소, 부드러우면서도 절도 있는 안무…. 언뜻 보기엔 매년 새롭게 데뷔하는 신인 아이돌 그룹 중 한 팀인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빅오션의 무대를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니 여느 신인 그룹과 다른 점이 보였습니다. 우선 안무 중간중간 수어가 들어가 있었고요. 관람석의 모습도 남달랐습니다. 무대에 가수가 등장하면 대개 팬들이 환호하며 응원봉을 흔들고 응원하는 구호를 외치기 마련인데, 오히려 조용했던 것이죠. 대신 팬들은 양 손을 하늘을 향해 들고 손목을 수평 방향으로 돌리며 ‘머리위로 반짝반짝’하는 제스처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빅오션을 따라 다니는 수식어가 하나 있습니다. ‘K팝 최초 청각 장애 아이돌 그룹’. 빅오션 멤버인 지석·현진·찬연 씨 모두 청각장애를 갖고 있습니다. 팬들이 특별한 응원 동작을 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습니다. 소리를 듣는 데 어려움이 있는 멤버들이 행여나 팬들의 환호 소리에 무대 시작 타이밍을 놓칠까 우려해 아티스트 ‘맞춤형’ 응원을 한 셈이죠.
그동안 청각에 장애가 있는 가수를 보기 어려웠던 것은, 노래하고 춤을 추려면 비트 하나도 놓치면 안되기 때문일 겁니다. 그렇다면 빅오션은 어떻게 무대를 준비해 팬들 앞에 서는 것일까요? 데뷔 자체부터 관성을 깼다고 할 수 있는 빅오션의 이야기를 〈브렉퍼스트〉 팀이 만나 들어봤습니다.
기술로 청각장애 한계 보완
고민 끝에 이들은 노래를 연습할 때 스마트폰의 튜너 애플리케이션(앱)을 활용하기로 했습니다. 자신이 내는 소리가 어떤 음이름에 해당하는지 알려주는 앱인데요. 이를 통해 어떤 근육에 어느 정도의 힘을 주면 어떤 높이의 소리가 나는지 체득해 나갔습니다. 반복 훈련을 통해 음정의 정확성을 높였고요.
노래를 녹음할 때는 인공지능(AI)의 도움도 받았습니다. 멤버들이 여러 번 노래를 부르면 AI가 멤버들의 목소리 데이터를 학습해 좀 더 정확하고 자연스러운 목소리로 보정하는 방식입니다.
“AI 딥러닝의 도움을 받으면서 ‘우리한테서 이런 소리가 나는구나, 많은 연습이 필요하구나’라고 생각하곤 해요. 언젠간 AI 딥러닝 기술을 사용하지 않고 라이브로 노래하는 무대를 보여드리고 싶어요.” (지석 씨)
빅오션 멤버들이 각자 착용한 스마트워치를 통해 박자를 맞춰보고 있다. 파라스타엔터테인먼트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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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칼군무’는 어떻게 맞춰나갔을까요. 빅오션은 시각과 촉각 등 다른 감각을 적극 활용했습니다. 빔 프로젝터에 숫자를 띄워두고, 박자에 따라 숫자가 변화하는 모습을 보며 함께 박자를 맞추기도 하고요. 발을 구를 때 발생하는 진동, 노래와 연동된 스마트워치가 음악의 BPM에 맞춰 전달하는 진동을 통해 멤버들이 박자를 인지하고 동시에 움직일 수 있도록 했습니다.
빅오션 멤버들이 스크린에 나타나는 숫자에 맞춰 안무 연습을 하고 있다. 파라스타엔터테인먼트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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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다양한 기술과 방법을 활용하더라도 이들은 보조적 수단일 뿐입니다. 결국은 반복과 반복, 노력에 더해지는 노력이 필요했다고요.
“기계에 완전히 의존할 수만은 없거든요. 연습하는 모습을 반복적으로 촬영해서 멤버 간 동작이 서로 일치하는지 계속 확인해야 해요.” (현진 씨)
조금 느리지만, 더 멀리 갑니다
빅오션 멤버들은 데뷔 전 각기 다른 일을 했습니다.
지석 씨는 알파인 스키 선수로 활동했습니다. 학창 시절 지석 씨의 뛰어난 운동 신경을 알아본 학교 선생님의 권유에서 시작했습니다. 현진 씨는 청각장애인 유튜버 크리에이터로 활동했는데요, 청각 장애에 대한 오해나 편견을 깨고 싶어서 관련된 주제로 영상들을 많이 촬영해 제작했다고 합니다. 찬연 씨는 고려대 안암병원에서 청능사(난청인의 특성을 고려해 청각기능의 평가와 재활을 담당하는 전문가)로 일했었고요.
알파인 스키선수 시절의 지석 씨 모습. 파라스타엔터테인먼트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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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에게 ‘아이돌’이란 먼 꿈입니다. 이들에게는 한 걸음 정도 더 멀었을 겁니다. 하지만 알게 모르게 저마다의 계기로 음악에 대한 관심을 키워나가고 있었습니다.
지석 씨는 음악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로 방탄소년단(BTS) 멤버 RM(본명 김남준·30)의 선행을 꼽았습니다. 2019년 9월 RM은 ‘청각장애 학생들의 음악 교육에 써달라’며 청각장애 특수학교인 서울삼성학교에 1억 원을 기부했습니다. 그 때 지석 씨가 재학생이었습니다.
“원래는 음악에 큰 관심이 없었어요. 악기를 배울 기회도 딱히 없었고요. 그런데 RM 선배님의 기부로 학교에서 다양한 악기를 배울 수 있게 됐거든요. 그러면서 음악에 대한 관심이 커지더라고요.” (지석 씨)
아이돌로서 출발은 늦었을지 모르지만, 이들의 ‘과거’는 현재 활동에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크리에이터로 활동했던 현진 씨는 카메라 앞에 섰기 때문에 데뷔 후에도 카메라가 낯설지 않습니다. 지석 씨는 운동신경이 있다보니 안무 습득을 빠르게 하는 편이고요. 찬연 씨는 청각장애에 대한 이해가 높습니다.
“청각장애 관련 전공을 공부했으니 멤버들의 청력이 어느정도인지 인지하고 ‘멤버들과 소통을 하려면 이정도로 말을 해야하겠구나’하고 이해할 수 있었죠. 또 간단히 응급처치가 필요한 경우 제가 하기도 해요.” (찬연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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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짓’으로 일으킨 파도, 미국 빌보드도 주목
요즘 아이돌들은 기본적으로 글로벌 활동을 병행합니다. 데뷔 전부터 해외 팬들의 관심을 얻는 경우도 많고요. 그래서 보컬 및 안무 연습뿐 아니라 외국어 공부도 열심히 하는데요. 빅오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그 외국어는 음성 외국어가 아닌, 나라별 수어입니다.
“수어도 언어기 때문에 나라마다 수어의 문법이 다르고 어순이 달라요. 다른 나라의 수어를 배우는 것은 새로운 외국어를 배우는 것과 같은 셈이죠. ‘보는 언어’를 통해 더 많은 팬들과 활발하게 소통하고 싶어요.” (현진 씨)
실제로 빅오션 팬의 국적을 살펴보면 미국이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달에는 미국 빌보드가 ‘이달의 K팝 루키’로 빅오션을 선정하고, “K팝의 핵심 메시지 중 하나인 자신의 이야기와 음악으로 리스너들에게 영감을 준다”고 평했습니다. 미국 뿐 아니라 유럽 팬들의 호응도 커지고 있고요.
BreakFirst 인터뷰 말미, 빅오션이 지난달 발매한 세 번째 디지털 싱글 ‘슬로우(SLOW)’에 맞춰 수어를 선보이고 있다. BreakFirst 영상 캡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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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오션 노래의 안무에는 수어도 상당수 반영돼있습니다.
“음악은 ‘들으며’ 즐기는 거잖아요. 하지만 저희는 수어를 사용함으로써 저희가 무대에 섰을 때 ‘보는 즐거움’까지 드리고 싶어요.” (지석 씨)
“언젠가 각 나라에서 콘서트를 하게 될 때 그 나라의 수어를 저희 노래에 추가해 더 많은 ‘파도(빅오션의 팬덤 이름)’를 만날 거에요.” (찬연 씨)
가뜩이나 치열하다는 아이돌 세계. 어떤 사람들은 빅오션의 가능성을 부정적으로 보기도 했을 겁니다. 하지만 빅오션은 그런 시선에 굴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자신들의 모습을 통해 대중들이 느낄 희망에 더 집중하겠다고요.
“사회의 틀, 고정관념 때문에 상처받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장애 유무를 떠나 하고싶은 일에 대해 자신감을 갖고 용기를 내면 어떤 일이든 해낼 수 있을 거라고 굳게 믿습니다!”
빅오션 멤버의 MBTI(성격유형지표)는 지석 INTJ(용의주도한 전략가), 현진 ENFP(재기발랄한 활동가), 찬연 INTP(논리적인 사색가)라고. 멤버마다 개성이 뚜렷하지만 여느 아이돌 그룹처럼 서로 합을 맞추며 재밌게 지낸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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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하경 기자 whatsup@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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