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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8 (토)

[백영옥의 말과 글] [373] 할 수 있는 일을 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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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타이타닉’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았던 건 주인공들의 사랑이 아니었다. 대탈출의 아비규환 속에서도 끝까지 배에 남아 연주를 멈추지 않던 연주자들이었다. 실제 이런 일은 1992년 20만명의 희생자를 낸 보스니아 분쟁에서도 일어났다. 총알이 빗발치던 전쟁터에 덥수룩한 수염의 한 남자가 가방을 든 채 나타났다. 빵을 사기 위해 모인 사람들 머리 위로 폭격이 가해진 다음 날이었다. 남자의 이름은 베드란 스마일로비치, 그가 가방에서 꺼낸 건 첼로였다.

사라예보 관현악단의 수석 첼리스트였던 그는 전쟁과 가장 어울리지 않는 연미복 차림으로 아다지오 G단조를 연주했다. 연주는 같은 시각 같은 자리에서 22일간 이어졌다. 빵가게 폭격으로 사망한 22명 희생자의 숫자와 동일했다. 놀라운 건 죽은 자를 위한 위로였던 연주가 산 자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발포 명령에도 세르비아 점령군 중 누구도 그의 머리에 직접 총을 겨누지 않았다.

긴급한 수술실, 배를 열자 온 장기에 퍼진 암세포를 발견한 외과 의사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수술은 크게 의미가 없다. 안타깝지만 수술을 중단해야 한다. 그러나 모두의 예상을 깨고 그가 수술을 시작한다. “밥은 먹게 해드려야지”라는 말이 수술의 이유였다. 하지현 책 ‘꾸준히, 오래, 지치지 않고’에서 이 장면을 읽었을 때 먹먹해졌다. 상황이 얼마나 나쁘든 지금 할 수 있는 일, 해결 가능한 문제에 최선을 다하는 게 오랜 임상 경험을 가진 그의 직업 윤리였을 것이란 문장이 마음에 남았기 때문이다.

사라예보 시민으로서 그저 다른 사람들처럼 음악가인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뿐이라는 스마일로비치의 말처럼,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할 때 기적은 선물처럼 찾아온다. 그 일이 꼭 대단한 일일 필요는 없다. 뒷사람을 위해 문을 잡아주고, 집 앞에 쌓인 눈을 치우는 행동만으로 세계는 조금씩 변한다. 기적은 죽은 나무에 핀 꽃이 아니다. 진짜 기적은 절망의 그날에도 당신이 정원에 매일 준 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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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영옥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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