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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7 (금)

이슈 질병과 위생관리

"소 귀표 바꿔 보험금 타내"…축산물 이력제 허점 악용한 농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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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전북경찰청 형사기동대 소속 수사관들이 26일 청사 브리핑룸에서 소 귀표를 바꿔치기해 가축재해보험금을 타낸 혐의(보험사기방지법 위반)로 검찰에 송치된 축산업자 A씨 축사에서 압수한 귀표를 정리하고 있다. 사진 전북경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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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험사기방지법 위반 혐의 24명 송치



키우던 한우가 죽거나 질병에 걸리면 가축재해보험에 가입한 소인 것처럼 보험사를 속여 보험금을 타낸 축산업자와 이를 도운 축협 직원이 무더기로 붙잡혔다. 이들은 정부가 축산물 안전성을 확보하기 위해 도입한 '귀표'를 보험 사기 수단으로 악용했다.

전북경찰청 형사기동대는 26일 "보험사기방지법 위반 혐의로 A씨(30대) 등 축산업자 22명과 이를 눈감아준 B씨(50대) 등 축협 직원 2명을 검찰에 송치했다"고 밝혔다. 경찰에 따르면 군산에서 한우 약 500마리를 사육하는 A씨는 지난 3월부터 5월까지 보험에 가입되지 않은 소 32마리가 폐사하자 보험사에 가축재해보험금을 청구, 17마리에 대한 보험금 3400만 원(1마리당 평균 200만 원)을 가로챈 혐의를 받고 있다.

조사 결과 A씨는 관할 축협 담당 직원에게 "소 귀표를 분실했다"고 속여 새 귀표를 다시 받았다. 15마리 보험금은 지급 심사 중 경찰 수사가 시작돼 미수에 그쳤다. 실물 귀표 바꿔치기 수법을 쓴 보험 사기를 밝혀낸 건 전국 최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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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경찰청 심남진(경정) 형사기동대 2팀장이 26일 전북경찰청에서 브리핑을 열고 보험사기방지법 위반 혐의로 검찰에 송치한 축산업자 A씨의 범행 수법 등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 전북경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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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값 폭락해 범행" 자백



귀표는 가축과 축산물 이력관리에 관한 법률(축산물이력법)에 따라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이 소·돼지 등 가축 한 마리마다 부여한 고유 번호(개체식별번호)를 표시하기 위해 문자·숫자·바코드 등을 적어 귀에 붙이는 것을 말한다. 귀표 미부착 가축은 유통될 수 없고, 도축도 금지하고 있다.

경찰은 "가축재해보험을 비정상적으로 과다 청구하는 사례가 수두룩하다"는 첩보를 바탕으로 수사에 착수했다. A씨는 지난 1월 29일 한우 145마리를 가축재해보험에 가입한 뒤 한 달여 뒤부터 75차례에 걸쳐 보험금을 청구해 약 1억1300만 원을 받았고, 5200만 원은 심사 중인 것으로 조사됐다. 이는 가축재해보험금 지급 청구율 전국 평균(6.5%)의 약 8배(52%)에 해당한다고 경찰은 전했다.

경찰은 A씨가 긴급 도축한 소 36마리 중 한우 혈통 정보가 있는 33마리 DNA(유전자)를 대조한 결과 28마리가 일치하지 않은 것을 확인했다. 이와 함께 A씨가 축사 안에서 보관하던 원 귀표 24개(인쇄형 18개, 단추형 8개)와 재교부된 귀표 50개를 압수했다. A씨는 경찰에서 "소 값은 폭락하는데 사룟값은 올라 경영난이 심각했다"며 "주변에서 '귀표를 바꿔치기해 보험금을 청구하면 적자를 일부 회복할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범행하게 됐다"며 혐의를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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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재한 농촌진흥청장이 지난 11일 자가배합사료를 사용해 사료비를 절감하고 있는 충남 금산군 한우 농가를 방문해 현장을 살펴보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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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산업자도 축협 조합원…관리 허술"



이번에 송치된 나머지 축산업자(30~70대)도 최근 2년간 무주·진안·장수·고창 등에서 A씨와 비슷한 방식으로 보험금을 부당 청구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 중엔 가족 명의로 축산업 허가를 받아 소를 키운 축협 직원 1명도 포함됐다. 그러나 대부분 중간에 귀표를 바꿔치기한 사실이 들통나 보험금이 지급되진 않았다고 한다.

경찰 조사 결과 축협의 귀표 관리는 허술했다. 귀표 등 축산물 이력 관리는 농림축산식품부 위탁을 받아 농협중앙회 소속 축협(축산업협동조합중앙회)이 한다. 귀표는 150마리 이상은 자가 부착, 50마리 이상은 자가 부착을 신청해 승인되면 농가에서 직접 부착할 수 있어 사실상 대부분 자가 부착을 한다는 게 경찰 판단이다.

실제 도내 한 축협 지점장인 B씨는 보험 청구 과정에서 이력제 담당 직원에게 "보험을 들지 않은 소인 것 같지만, 새 귀표를 달아 주라"고 지시한 혐의로 입건됐다. B씨 등이 축산업자에게 따로 대가를 받지는 않았다고 한다. 경찰 관계자는 "귀표가 떨어지거나 훼손되면 축협 이력제 담당 직원이 현장에 직접 가서 이를 확인한 뒤 해당 귀표를 회수하고 새 귀표를 재교부·부착해 줘야 하는데, 이런 절차가 대부분 생략됐다"며 "축산업자도 모두 조합장 투표권이 있는 축협 조합원이어서 서로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식으로 유야무야 넘어간 것 같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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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미령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이 지난 10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추석 성수품 수급 점검 및 수확기 쌀값·한우 가격 안정 대책 민당정 협의회에 참석해 인사말을 하고 있다.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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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50% 보험료 지원…눈먼 돈"



경찰에 따르면 전국적으로 귀표 바꿔치기 현장 적발 건수는 2021년 29건, 2022년 29건, 2023년 35건, 2024년 24건 등 전체 117건으로, 보험금 청구액은 3억 원 수준이다. 이에 대해 경찰은 "이는 빙산의 일각"이라며 "실제론 30배가량 많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 배경으로 보험에 가입할 때 정부·지자체가 주는 보조금을 눈먼 돈으로 여기는 관행을 꼽았다.

가축재해보험은 풍수해·폭염·설해 등 자연재해와 화재·사고·질병 등으로 가축이나 축사 피해가 발생할 때 신속한 복구로 축산 농가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보험이다. 보험료의 50%를 국가에서 보조하고, 지자체가 각각 10%(광역단체), 15%(기초단체)를 지원해 농가 자부담은 25%다. 전북에서만 올해 가축재해보험 가입 지원 예산으로 140억 원이 책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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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옥 기자





농식품부, 전국 실태 조사 방침



가축재해보험은 1년 단위로 가입하고, 사육 중인 소의 80% 이상만 가입하면 된다. 어린 소일수록 보험료가 비싸고 늙은 소일수록 싸지만, 농가에선 보통 보험에 가입할 때 일시불로 1000만 원(100마리 기준)을 납입한다고 한다. 경찰은 농가가 보험료를 회수하기 위해 저가 보험에 들거나 아예 보험에 가입되지 않은 소 귀표를 고가 보험에 가입한 소 귀표로 바꿔치기하는 범죄가 널리 퍼져 있는 것으로 판단, 농식품부에 제도 개선을 요구하는 의견서를 보냈다.

농식품부는 전국적으로 실태 조사를 한 뒤 문제가 확인되면 수사를 의뢰할 방침이다. 심남진 전북경찰청 형사기동대 2팀장은 "한우 농가의 보험금 부정 청구를 막기 위해선 비용이 더 들더라도 현재 사용 중인 인쇄형 플라스틱 귀표 대신 전자칩을 삽입한 귀표를 도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주=김준희 기자 kim.junh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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