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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7 (금)

[단독] 인권위 “임신중지 의료서비스 보편 제공” 전향적 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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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지난해 4월9일 오후 서울 용산역 광장에서 ‘모두의 안전한 임신중지 권리보장을 위한 네트워크’ 주최로 열린 집회에서 참석자들이 “국가는 임신중지를 건강권으로 보장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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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법 공백으로 안전한 임신중지가 보장되지 않는 상황에 대해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가 임신중지 관련 의료서비스를 보편적으로 제공하고, 관련 의약품을 도입하라는 내용을 담은 전향적인 권고안을 내놨다. ‘안전하고 합법적인 임신중지를 위한 국제행동의 날’인 28일을 이틀 앞두고 나온 결정이다.



한겨레가 26일 입수한 인권위의 ‘임신중지 권리 미보장으로 인한 인권침해’ 결정문을 보면, 인권위는 보건복지부 장관과 식품의약품안전처장에게 여성의 임신중지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제도개선을 권고했다.



인권위 차별시정위원회(차별소위, 소위원장 남규선 상임위원)가 임신중지와 관련된 진정 사건을 형식적인 이유로 기각하면서도, 지속적인 입법 공백 상황으로 여성의 재생산권이 보장되지 않는 현재 상황을 방치할 수 없다며 보건복지부와 식품의약품안전처 등을 대상으로 권고에 나선 것이다.



인권위는 보건복지부 장관에게는 임신중지에 대한 처벌이 폐지됐음을 명확하게 공표하고 ‘낙태’, ‘중절’ 등의 부정적 용어 대신 ‘임신중지’ 또는 ‘임신중단’으로 관련 정책용어를 정비할 것과 임신중지 관련 의료서비스를 공공보건의료 전달체계 내에서 보편적으로 제공하고 건강보험을 적용할 것을 권고했다.



또한 의약품 사용에 의한 임신중지를 포함해 과학적 증거에 기반한 임신중지 의료서비스가 제공되도록 의료종사자를 교육하며, 임신중지 지원 가능 의료기관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라고 했다.



이어 모자보건법 제14조 ‘인공임신중절 수술의 허용한계’를 삭제하는 방향으로 법률개정을 추진하고 같은 법 시행령 제15조 ‘인공임신중절 수술의 허용한계’를 삭제해 포괄적 성·재생산 건강과 권리를 보장하라’는 권고도 덧붙였다. 식품의약품안전처장에게는 임신중지 의약품을 도입하여 필수의약품으로 지정할 것을 권고했다.



앞서 김나영 ‘모두의 안전한 임신중지권리보장을 위한 네트워크’ 대표는 인권위에 “‘낙태죄’ 효력이 없어졌음에도 일선 병원에서 모자보건법을 이유로 임신중지 관련 진료와 서비스 제공이 제한·거부되고, 진료비가 과도하게 책정되며 임신중지에 대한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아 여성의 건강권이 침해되고 있다”고 진정을 제기했다. 아울러 “세계보건기구가 필수핵심 의약품으로 지정한 유산유도제인 미페프리스톤을 도입하지 않고 ‘허가 외 사용’으로 돼 있어 여성의 자기결정권이 침해되고 있다”고 했다.



인권위 차별소위는 “해당 진정사건은 피해자가 구체적으로 특정되지 않은 이유로 각하하되, 헌법재판소의 2019년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이후 지속된 입법 공백과 2020년 안전한 임신 중지가 가능한 의약품 도입을 검토하겠다는 정부 발표 이후 달라지지 않은 현실을 고려해 정책권고를 검토했다”고 권고 배경을 밝혔다. 안전한 임신중지 서비스 및 임신중지 이후 양질의 의료에 대한 접근성 보장을 위한 정책 방안 마련을 더는 늦출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인권위 차별소위는 “임신을 중지할 권리는 유엔 여성차별철폐협약 등 국제인권규범에서 여성의 주요 권리로 명시되고 있음에도 현재 대한민국 여성은 △임신중지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병원을 찾기 어렵고 △건강보험 적용이 되지 않아 비용적 부담이 크며 △세계보건기구가 필수의약품 목록에 등재한 유산유도제를 2023년 현재 96개국에서 도입했으나, 대한민국은 유산유도제가 도입되지 않아 수술적 방법에 의존하거나 비공식적 경로를 통해 의약품을 구매해야 하는 등 임신중지의 이용 및 접근 가능성이 제한돼 있다”고 봤다.



더불어 “이런 상황은 국가가 국민의 기본권 보장 의무를 다하지 않은 부작위로 인해 최고 수준의 건강에 대한 권리를 포함한 자기결정권의 향유를 저해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며, 남성과 비교할 때 여성에게만 필요한 의료개입을 거부하거나 방치하는 것이므로 성별을 이유로 평등권을 침해한 것”이라 판단했다.



현재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 자유권위원회, 사회권위원회, 아동권리위원회 등 각 조약기구는 임신중지에 대한 비범죄화 입장을 명확히 밝히고 있으며 각종 일반 논평과 선언, 각국에 대한 권고 등을 통해 여성의 자기결정권은 물론 평등권, 차별받지 않을 권리 및 존엄권 등 인권향유에서 임신중지권이 반드시 필요한 요소임을 강조하고 있다. 인권위 또한 그간 헌법재판소와 국회의장 등에게 임신중지 비범죄화 입장을 견지하는 방향으로 개정안을 마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수차례 표명한 바 있다.



임신중지는 2019년 헌법재판소의 헌법불합치 결정 이후 입법공백 상태에 놓여있다. 헌재는 임신중지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수술을 한 의사와 여성을 처벌하도록 한 형법 제269조 제1항, 제270조 제1항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고, 두 조항은 2021년 1월1일부로 효력을 잃었다. 다만 이후로도 후속 입법이 이뤄지지 않아, 임신중지는 불법이 아니지만 안전한 임신중지를 보장할 법 체계도 마련되지 못한 상황이다.



보건복지부 장관은 인권위에 “임신중지에 대한 건강보험 적용, 의료체계 수립, 의약품 사용 등은 형법 및 모자보건법의 개정이 선행돼야 가능하다“고 답변했다. 식품의약품안전처장도 “유산유도제 허용을 단독으로 결정할 수 없어 형법 및 모자보건법 개정이 선행돼야 가능하다”고 했다. 유산유도제 품목 허가와 관련해 일부 제약회사가 수입허가 신청을 한 건에 대해서는 안전성·유효성 및 품질자료 등을 심사 중이라고 밝혔다.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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