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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5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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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진 남편 옆에 있던 아내, 살인서 자살방조로 혐의 바뀐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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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인사이드]

지난 2월 29일, 대구광역시의 한 모텔에서 50대 남성이 목에 노끈을 매고 숨진 채 발견됐다. 경찰은 자진신고한 A씨가 남편을 죽인 것으로 보고 ‘승낙살인’ 혐의를 적용해 검찰에 송치했다. 승낙살인은 다른 사람에게서 의뢰나 승낙을 받아 그 사람을 살해하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사건을 송치받은 검찰은 법의학자문, 필적 감정 등 과학 수사 기법을 이용해 혐의를 ‘자살방조’로 바꿔 기소했다. 자살방조는 자살하기로 결심한 사람을 돕거나 방치하는 경우 적용된다. 검찰이 경찰과 다르게 혐의를 적용한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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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지검 서부지청.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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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본지 취재를 종합하면, 이 사건을 수사한 대구지검 서부지청 형사3부(부장 서성목)가 파악한 사건의 전말은 부부의 동반자살 시도였다. A씨 부부는 작년 8~9월 같은 건물에 살고 있는 이웃들이 부부 사이의 대화를 지속적으로 엿듣고, 집 문이나 벽을 치는 식으로 괴롭힌다는 망상에 시달린 것으로 조사됐다. 망상이 심해지면서 남편은 직장을 그만 두고, “이웃들을 피해 모텔에서 지내자”며 A씨를 설득했다고 한다. 남편은 이때 “가진 돈을 다 쓰면 함께 자살하자”는 취지로 말했고, A씨도 이에 동의했다고 한다.

A씨 부부의 첫 자살 시도는 지난 2월 22일이었다. 이들은 모텔 방에서 굶어죽기로 결심했는데, 남편이 단식 3일차인 그달 24일 물을 마시는 바람에 실패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로부터 5일 뒤 남편은 노끈을 모텔 방문에 거는 방식으로 자살을 시도해 사망한 것으로 조사됐다.

당시 A씨는 남편이 자살을 시도한 지 1시간가량이 지나서야 끈을 자르고 남편을 내려 앉혔다고 한다. 그런데 남편의 몸에서 소리가 나자, A씨는 3분간 목에 걸려 있던 줄을 잡아당겨 남편의 목을 졸랐다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은 이 행위가 남편의 사망 원인이라고 보고 A씨를 승낙살인 혐의로 송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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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검찰청 전경.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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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은 과학 수사 기법을 활용해 보완 수사에 나섰다. 우선 검찰은 사망 시점을 파악하기 위해 법의학자문위원회에 도움을 구했다. A씨는 “남편을 내려놓은 뒤 몸에서 ‘컥’하는 소리가 들려 목에 있는 줄을 잡아당겼다”고 진술했는데, 자문위는 사망한 뒤에도 체내 가스 배출, 장기 움직임들로 소리가 날 수 있다는 점을 제시했다. 또 시신 사진을 토대로 남편이 목을 매달았을 때 이미 사망했다는 소견도 전했다고 한다. A씨가 남편 목을 조르기 전에 이미 사망했다고 본 것이다.

검찰은 증거로 수집된 A씨 부부의 필답(筆答) 노트도 복원했다. 이들은 이웃들이 엿들을 수 없도록 노트를 이용해 필답을 나누고, 대화가 끝난 뒤 덧칠해 내용을 보지 못하도록 지운 것으로 조사됐다. 그러나 대검찰청 과학수사부가 감정을 실시해 남편이 사망 전 “숨 안 쉬고 맥박도 안 뛰어야 한다. 1시간 후에 따라와라” 등 동반자살을 모의한 정황을 복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검은 위조 여권‧지폐 감별 등에 사용하는 ‘분광비교측정 장비’를 이용해 필적을 복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장비는 여러 파장의 빛을 쏴 잉크 성분과 글씨의 진한 정도를 분석할 수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남편과 아내가 쓴 메모를 비롯해, 내용을 알아볼 수 없도록 덧칠한 부분을 각각 분리했다는 것이다.

검찰은 과학 수사 결과를 토대로 혐의를 자살방조로 변경해 A씨를 기소했다. 이 사건 심리를 맡은 대구지법 서부지원 형사1부(재판장 도정원)는 지난 6월 A씨에게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하고, 정신심리 치료강의 40시간 수강을 명령했다. 재판부는 “자살방조 범행은 절대적으로 보호되어야 할 인간의 생명을 침해하는 범죄라는 점에서 그 죄책이 가볍지 않다”면서도 “A씨는 남은 인생 동안 죄책감과 후회 속에서 살아갈 것으로 보이는 점과 자수한 점 등을 고려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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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지법 서부지원 전경.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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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조계에선 “과학수사를 통해 사건의 실체를 정확히 밝혀낸 사례”라는 평가가 나온다. 자살방조죄와 승낙살인죄 모두 법정형이 징역 1~10년형으로 같지만, 고의로 살인을 저지르지 않은 점이 양형에 반영됐다는 분석이다. 한 현직 검사는 징역형 집행유예 판결이 선고된 데 대해 “두 혐의의 법정형이 같다 하더라도 죄질은 전혀 다른 사안”이라며 “저지른 범죄에 맞는 형이 선고된 것”이라고 했다.

[이민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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