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진도경찰서 기록을 근거로 진실규명 보류 판정을 받은 진도사건 학살 희생자 허훈옥씨의 모습. 1950년 10월20일 진도군 의신면 골짜기 밭에서 학살 당시 중학교 1학년이었다. 허경옥씨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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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사찰기록에 ‘암살대원’이라고 적혀 있다는 이유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에서 진실규명(피해 확인)이 보류됐던 ‘진도 군경에 의한 민간인희생사건’(진도 사건) 피해자 유족 4명이 “너무 억울하다”며 진실화해위에 재심의를 요구하는 진정서를 보냈다. 피해자 4명 중 3명은 미성년자로, 김광동 위원장이 주도해온 ‘부역자 색출’의 무모함을 상징하는 사례로 꼽혀왔다.
똑같이 경찰 사찰기록을 이유로 6명이 보류된 ‘영천 국민보도연맹 및 예비검속사건’과 관련해 영천유족회 김만덕(83) 회장도 이옥남 상임위원을 방문해 ‘신속한 재심의’를 요구했다. 진실화해위 조사기간 종료를 9개월여 앞두고 시간 부족 등을 이유로 무더기 진실규명 불능처리가 우려되는 상황에서 유족회와 유족들이 부역자 심사를 빙자한 부당한 조처에 대해 적극적으로 따지고 나서는 모양새다.
한국전쟁기인 1950년 9월 진도중학교 1학년생으로 경찰에 학살당한 허훈옥(당시 14살)의 동생 허경옥(87·광주 거주)씨는 13일 한겨레에 “진실화해위에 진정서를 등기우편으로 발송했다. 16일경 도착할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함께 진실규명이 보류됐던 진도 사건 김대환(당시 13살)의 동생 김재환(76)씨, 허윤(허균·당시 32살)의 며느리 이화자(79)씨, 허장오(당시 17살)의 동생 허장예(88)씨도 진정서에 서명했다.
‘암살대원’이라는 근거 없는 경찰기록에 의해 진실규명이 보류된 진도 군경에 의한 민간인 희생사건 피해자 4명이 억울하다며 진실화해위에 낸 진정서의 일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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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서에서 허경옥씨는 “허훈옥(당시 14살)은 1950년 8월 초 마을 이장 허OO의 거짓 밀고로 경찰 조사도 없이 억울하게 경찰에 의하여 처형되었다”며 ”진실화해위 심의 결과 망 허훈옥(당시 14살)의 암살대원 명기 조작 사실에 의하여 당시 미성년자였던 망 허훈옥의 명예회복이 부결됐다. 신청인 허경옥은 명예회복이 부결된 사실이 너무 억울하다”고 하였다. 허경옥씨는 허훈옥과 한 살 터울이 나는 동생이다.
한겨레는 지난 4월 진도 사건 희생자들이 죽임을 당했던 전남 진도군 의신면 만길리 현장과 광주 인근에서 이들 유가족을 만나 한국전쟁기 당시의 상황과 경찰 기록에 적힌 희생자들의 혐의 및 나이가 사실인지를 취재해 보도한 바 있다.
진정인들은 진실규명 보류의 근거가 된 ‘경찰기록 조작’을 지적했다. 허경옥씨는 “죄목은 13·14살 먹은 애기를 19~20살 먹었다고 조작하고(주민등록에도 안 맞고 족보에도 안 맞는 숫자 조작극), 애기가 사람을 죽였으면 언제 어디서 누구를 어떻게 죽였는지 내용이 있어야 하는데 아무 내용도 없이 글자 4자 ‘암살대원’뿐”이라고 했다. 여기에서 경찰 기록은 1969년 진도경찰서가 작성한 요시찰인 감시 기록인 ‘대공’을 말한다. 이 기록은 10대 초반이던 이들을 한국전쟁 당시 좌익세력 쪽의 ‘암살대원’이라고 적시하고 있으나 아무런 근거가 제시돼 있지 않다. 나이 또한 실제와 달리 19~20살이라고 적었다.
진도중학교 1학년 때 진도사건으로 목숨을 잃은 허훈옥의 연년생 동생 허경옥씨. 고경태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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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전남 진도군 군내면 용장리 자택에서 진도 사건으로 오빠를 잃은 허장예(오른쪽)씨와 남편 조규신씨를 만났다. 고경태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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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화해위 조사와 한겨레 취재 결과를 종합하면, 허훈옥의 경우 인민군이 물러간 뒤 마을에서 위세를 부리던 허광백(가명)이 논을 내놓으라는 등의 요구를 했는데도 아버지(허왕)가 듣지 않자, 아버지 대신 의신면 골짜기 밭 ‘도둑굴재’로 끌려가 같은 마을 주민 허윤·문진춘 등과 총살당했다. 함께 희생된 허윤의 경우 화장실을 달라는 허광백의 요구에 응했는데도 죽었다고 한다. 13살이었던 피해자 김대환은 고기잡이 일을 하던 아버지, 큰 형과 함께 죽임을 당했다, 허장오는 인민위 활동을 하였다 하여 잡혀간 아버지가 1살 짜리 동생을 업은 어머니와 함께 학살당할 때 외갓집으로 피신했으나 그 뒤 다시 끌려와 마을 목화창고에 갇힌 뒤 학살터로 끌려갔다.
진실화해위에서 ‘부역자 심사’를 주도하며 13·14살 아이까지 경찰기록에 따라 ‘암살대원’ 개연성이 있다며 진실규명 불능 처리를 주장해온 김광동 위원장, 이옥남 상임위원, 황인수 조사1국장.(왼쪽부터) 한겨레 자료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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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화해위는 지난 3월12일 제74차 전체위원회에서 진도 사건 희생자 41명 중 이들 4명에 대해 진실규명 불능(피해자 인정 불가) 의견으로 상정했다가 야당 추천 위원들 반대로 일단 보류했다. 해당 조사과가 작성한 보고서에는 4명에 대해 “한국전쟁 시기 경찰에 의해 사망한 것은 사실로 보이나 민간인 살해 등과 관련하여 진술과 경찰 기록이 일치하지 않아 진실 규명불능으로 판단된다”고 적힌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는 사건 발생 19년 뒤 작성한 진도경찰서 ‘대공’기록을 기정사실로 본 것이다. 김광동 위원장은 보류된 사건의 경우 2개월 안에 재상정한다는 방침을 밝혔으나 5개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올리지 않았다.
한국전쟁기 진도 군경에 의한 민간인 희생사건이 벌어졌던 전남 진도군 의신면 만길리 마을 모습. 60여 가구가 살고 있다. 고경태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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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경찰기록을 이유로 지난해 10월 진실화해위 전체위에서 심사 대상자 21명 중 6명을 보류했던 ‘영천 사건’과 관련해 김만덕 영천유족회장이 9일 서울 중구 퇴계로 남산스퀘어 진실화해위 사무실을 방문해 이옥남 상임위원과 만나 “6명에 대한 신속한 재심의”를 요구했다. 김만덕 회장은 한겨레에 “‘어떻게 30년 전 경찰기록을 맹신하고 결정을 할 수 있느냐’고 따졌고 이옥남 상임위원은 ‘위원 간 의견이 엇갈려 어려움이 있다’는 취지로 답했다고 전했다. 이옥남 상임위원은 이들 영천 희생자 6명에 대한 진실규명 불능을 가장 앞장서 주장해온 인물이다.
영천사건에서 보류된 6명은 영천경찰서가 각각 1979년·1981년에 작성한 대공인적위해자조사표(위해자조사표)와 신원기록편람에 ‘10·1 사건(1946년 10월 항쟁)에 가담 살인·방화·약탈 등 좌익활동하다가 처형된 자’ 등으로 적혀 있다. 물론 이 기록에도 아무런 근거자료가 첨부돼 있지 않다. 경찰은 당시 5살짜리 아이에 대해서도 ‘암살·방화범’으로 적어놓기도 했다.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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