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교포 강제 북송 사건에 대해 첫 정부 조사
’차별없는 지상낙원' 거짓 선전해
1959년 12월 14일 일본 니가타항에서 북한으로 떠나는 첫 북송선 앞에 3000여명 인파가 모여 있다. 북송선은 약 48시간 후 북한 청진항에 도착했다. /조선DB |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위원장 김광동)는 7일 “북한 정권이 거짓 선전으로 재일교포 17명을 강제 북송한 것은 인권유린에 해당한다”며 북한 정권에 대해 사과를 촉구할 것을 정부에 권고했다. 진실화해위는 광복 이후부터 노태우 정부까지 적대세력에 의한 테러·인권유린·폭력·학살 사건 등을 조사하고 있다.
재일교포 북송사건에 대한 정부 차원의 조사는 이번이 처음이다. 진실화해위에 따르면 북한 정권과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는 북송 사업을 사전에 기획, 1959년~1984년 거짓 선전으로 재일교포와 일본인 등 9만3340명을 강제 북송했다. 대부분이 남한 출신으로 북한에는 연고가 없었다. 조총련은 “차별·세금 없고 일한 만큼 분배 받는 지상낙원” “북한이 일본보다 잘 살고 인권을 보장한다”라며 거짓 선전했다.
그러나 실상은 달랐다. 북송자들은 평양이 아닌 양강도 혜산 등 시골에 배치돼 거주·이전의 자유를 탄압 받았다. 협동농장 농민, 광산·탄광에 종사하는 광부, 공장 노동자로 배치된 북송자들은 ‘성분조사’를 통해 적대계층으로 분류돼 철저한 감시와 차별을 받았다. 북송자 집안이 아닌 자와 결혼하려는 경우 강한 반대에 부딪히는 등 사회 생활에서도 불이익을 받았다.
탈북을 요구하거나 시도하면 보위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거나 아오지 탄광으로 추방되는 등 보복이 잇따랐다. 일본으로 돌려보내 줄 것을 요구했던 한 소년은 군인들에 의해 끌려가 행방불명된 지 5년이 지나 정신병자 수감시설에서 목격됐다. 한 강제 북송 피해자는 “북한에 도착하니 북한의 실상이 조총련의 선전과는 하늘과 땅 차이여서 눈앞이 깜깜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1971년 5월 재일교포를 태우고 북한으로 갈 선박이 일본 니가타항에 정박해 있는 모습. 북·일 양측은 1959년부터 1984년까지 9만3000여명의 재일교포를 북송했다. /조선D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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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화해위는 “재일교포 북송 사건의 1차적 책임은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이를 기획하고 거짓 선전한 북한 정권과 조총련에 있다”고 했다. 개인의 귀국 의사를 확인할 기회를 차단하고 강제로 승선시켰으며, 이를 거부하면 납치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일본 정부가 골칫거리였던 재일교포를 이주시키기 위해 인도 사업으로 포장해 북송 사업을 용인하고 지원했다는 점도 지적했다. 진실화해위는 “일본 정부와 일본적십자사는 북한의 현실과 북송 사업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었지만 의도적으로 북송사업을 지원, 북한 정권의 인권침해를 용인했다”고 했다.
앞서 강제 북송된 재일교포 본인과 후손들은 “북한 정권으로부터 재산·노동력을 착취당하고 거주지·교육·직업선택 등에 있어서 차별과 사생활 감시 등의 인권유린을 당했다”며 진실화해위에 조사를 신청했다. 진실화해위는 사건 연구 용역을 실시하고, 국가기록원과 외교부로부터 당시 작성된 공문서 등을 입수해 분석했다.
진실화해위는 재일교포와 일본인을 조직적으로 북송시킨 북한 정권에게 공식적인 사과와 북송자 생사 확인, 이동의 자유 보장 등을 촉구할 것을 우리 정부에 권고했다. 또 북송 사업과 관련한 피해 상황 등을 UN(국제연합)에 조사 요청하도록 권고했다.
[서보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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