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 국회 본회의에서 채상병특검법 처리 문제를 둘러싼 필리버스터 종료에 대한 표결이 시작되자 국민의힘 의원들이 우원식 국회의장을 향해 항의하고 있다.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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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치가 국회의 일방입법과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가 꼬리를 무는 ‘무한 루프’에 빠졌습니다. 그 사이에 ‘감초’처럼 끼는 게 여당의 필리버스터입니다. 소수당인 국민의힘이 야당의 법안 표결을 막기 위해 필리버스터를 시작하면 야당은 국회법의 강제 종결 조건에 맞춰 24시간 뒤 필리버스터를 중단시킨 뒤 법안을 표결해 통과시킵니다. 그러면 다시 여당은 윤석열 대통령에게 재의요구권(거부권) 행사를 건의하고, 대통령은 기다렸다는 듯 그 권한을 행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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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대 국회 문턱을 넘은 7개 법안 모두 이 순환 고리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윤 대통령은 지난달 9일 ‘채 상병 특검법’에 거부권을 행사했고, 나머지 6개 법안도 거부할 가능성이 큽니다. 당연히 ‘민생은 뒷전’이라는 따가운 시선이 국회와 대통령실을 향해 내리꽂힙니다. 상황은 조금도 변하지 않는데 같은 모습이 도돌이표처럼 반복되니 필리버스터를 해야하는 여당도, 지켜보는 야당도 곤혹스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를 위한 무제한 토론인가”라는 ‘필리버스터 무용론’이 곳곳에서 튀어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필리버스터는 머리수를 앞세운 다수당의 일방 입법을 소수당이 합법적으로 방해하는 제도입니다. 1973년 국회법 개정으로 사라졌다가 2012년 5월 18대 국회 마지막 본회의에서 ‘국회선진화법’(국회법 개정안)이 통과되면서 39년 만에 부활했습니다. 해머와 최루탄, 전기톱까지 등장했던 ‘동물 국회’를 멈추고, 소수 의견 개진 기회를 보장해 민주적 숙의를 강화하자는 취지로 도입됐습니다. 당시 여야 원내대표가 합의해 공동 발의한 법안이지만 이를 두고 “스스로 식물국회를 만드는 법”(심재철 전 새누리당 의원)이라는 비판과 “시간은 걸리지만 대화와 타협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법”(김성곤 전 민주통합당 의원)이라는 기대가 팽팽히 맞서기도 했습니다.
필리버스터가 실제 시행된 건 19대 국회 시절인 2016년 2월입니다. 당시 여당(새누리당) 출인 정의화 국회의장이 테러방지법을 직권으로 상정하자 야당인 더불어민주당과 정의당, 국민의당이 필리버스터에 돌입했습니다. 38명의 야당 의원들이 192시간 동안 본회의장 단상에 서서 테러방지법 도입 반대 이유를 설파했습니다.
테러방지법을 막아내진 못했지만, 흥행에선 크게 성공한 필리버스터였습니다. 43년 만에 부활한 필리버스터를 직접 보기 위해 방청객들은 주말에도 국회 본회의장을 찾았습니다. 의원석은 텅텅 비었지만, 방청석은 가득 차는 진풍경이 펼쳐지기도 했습니다. 당시 온라인에선 필리버스터 첫 주자로 나선 민주당의 김광진,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른 강기정, 12시간 31분 발언을 하며 당시 최장기록을 세운 이종걸 의원 등이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높아진 주목도는 필리버스터를 주도한 민주당과 정의당의 지지율을 소폭 끌어올렸습니다.
19대 국회만큼은 아니었지만 20·21대 국회에서 진행된 필리버스터도 나름 시선을 끄는 데는 성공했습니다. 2019년 12월 당시 야당인 자유한국당이 공직선거법 개정안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법(공수처법)을 두고 필리버스터를 벌였는데 여당인 민주당도 이례적으로 필리버스터에 참여해 찬성 토론으로 맞불을 놓은 겁니다. 코로나19 유행기였던 2020년 12월 21대 국회에선 벌어진 공수처법 개정안 처리를 저지하기 위해 무제한 반대토론에 나선 윤희숙 당시 국민의힘 의원이 마스크를 쓰고 12시간 47분을 발언하며 최장 기록을 경신해 화제가 됐습니다.
그런데 같은 풍경이 반복되니 식상해진 걸까요? 22대 국회 필리버스터는 국민뿐 아니라 여야 정치인들 사이에서도 별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필리버스터가 더는 국회에서 희귀한 풍경이 아닌 이유도 있지만, 양극화와 대결정치의 흐름을 타고 필리버스터가 너무 자주 펼쳐지니 하는 이도 바라보는 이도 무덤덤해져 버린 탓입니다. 지난달 3일부터 이달 3일까지 한 달 사이 국회에서 필리버스터가 진행된 날은 11일입니다. “들어보면 새로운 주장이 하나도 없다. 누가 거기에 관심을 가지겠나?” 조국혁신당 소속 한 의원의 말입니다.
여당의 필리버스터를 ‘용산 눈맞춤용’이라고 의심하는 시선도 있습니다. 윤 대통령에게 거부권 행사의 명분을 주기 위한 요식행위가 됐다는 것입니다. 물론 국민의힘 의원들은 이런 얘기에 ‘발끈’ 합니다. 이 당의 한 중진의원은 “거대 야당의 폭주에 맞서 대통령에게 재의요구를 건의하려면, 일단 그 법이 왜 부당한지를 국민께 설명해 드려야 할 것 아닌가. 일언반구 설명도 없이 재의요구를 건의하는 것과 필리버스터를 한 뒤 하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말도 뜯어보면 필리버스터가 ‘거부권 명분쌓기용’이란 실토에 가까워 보입니다.
상황이 이러니, 이제 그만 필리버스터 정국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지적이 여야를 가리지 않고 나옵니다. 국민의힘의 한 초선 의원은 “의원들 사이 회의론, 무용론이 나오고 있다. 실무적으로 필리버스터를 준비하는 것도 벅차다. 출구 전략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민주당의 한 보좌관도 “지금 상황은 국회선진화법이라는 좋은 법이 얼마나 오용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좋은 법뿐 아니라 좋은 정치가 필요한 때”라고 했습니다.
다시 국회선진화법이 통과된 2012년 국회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정의화 국회의장 직무대행은 국회선진화법 통과 뒤 의원들을 향해 “선진 국회는 결코 제도로만 달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정치문화와 관행이 선진화돼야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지금의 22대 국회 상황을 미리 내다보고 하신 말씀 같아 씁쓸합니다.
강재구 기자 j9@hani.co.kr 손현수 기자 boyso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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