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9월 불이회 회원들이 순천 송광사를 찾아가 구산 스님께 법문을 들었다. 구산 스님은 당시 '해인사 성철-송광사 구산'으로 불리던 선지식이었다. 사진 불이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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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출발은 서울 종로구 인사동의 현대화랑이었다. 70년대 초만 해도 서울에 별다른 문화 공간이 없었다. 미술과 전통 등 문화에 목마른 여성들이 화랑을 찾았고, 현대화랑의 박명자 회장은 기꺼이 공간을 내주었다. 고(故) 윤용숙 불이회 명예회장은 “화랑을 찾다 보니 서로 알게 됐다. 한 달에 한 번꼴로 모여서 미술관이나 박물관 나들이를 했다. 하루는 서로 감회를 나누다가 모두가 불자(佛子)라는 걸 알고 깜짝 놀랐다”며 “소중한 불연(佛緣)을 헛되게 하지 말자는 뜻으로 여성불자모임을 제안했다. 만장일치로 통과됐다”라고 불이회 창립 배경을 회고한 적이 있다.
사실 70년대 초만 해도 여러모로 척박했다. 여성의 사회적 활동은 매우 제한적이었고, 불교계도 그랬다. 여성 불자의 신행 활동도 주로 기복 불교에 머무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달랐다. 전국에 있는 선지식을 찾아다니며 법문을 청하고, 불교 학자들을 초청해 공부도 했다.
창립 직후였다. 아직 모임의 명칭이 없었다. 회원들은 경남 양산의 통도사를 찾았다. 경내로 들어서는 길에 팔작지붕을 한 출입문이 있었다. 그 문의 이름이 ‘불이문(不二門)’이었다. 그걸 본 한 창립회원의 제안으로 모임의 명칭이 ‘불이회’로 정해졌다.
불교에서 ‘불이(不二)’라는 말은 깨달음으로 들어서는 문턱이다. 부처님이 설한 크나큰 자비(大慈大悲)의 뿌리이기도 하다. 나와 상대, 세속과 열반, 있음과 없음을 둘로 보지 않는 불이의 눈을 통해 세상은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경남 양산의 통도사 경내로 들어서는 출입문 중 하나가 불이문이다 일명 해탈문으로도 불린다. 이 문의 명칭에 담긴 뜻을 따라 불이회란 이름을 지었다. 중앙포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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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 후 10년 가까이 불이회는 우리 사회의 복지 사각지대를 도왔다. 고아원과 양로원을 찾아가기도 하고, 군부대를 찾아가 장병들을 위문하고, 가정형편으로 상급 학교에 진학 못 한 학생들을 후원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한 가지 일에 집중적으로 장기적 후원을 하자”는 데 뜻을 모았다.
당시 불이회가 조언을 구한 사람이 이기영(1922~96) 박사였다. 그는 원효 연구에 매진한 세계적 불교학자이자 재가불교운동을 주도한 실천적 불교인이었다. 사실상 불이회의 지도법사 격이었다. 이 박사는 “불교계의 인재를 키우자”고 제안했다. 불광회를 세운 광덕 스님(1927~99)도 여러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이때부터 불이회는 불교계 미래지도자를 키우는 ‘인재불사(人材佛事)’에 힘을 쏟았다. 불교의 미래를 약속하는 가장 중요한 사업이라 판단했다.
1980년대에 불이회 회원들이 이기영 박사와 함께 서있다. 이 박사는 원효 연구에 탁월한 업적을 남긴 세계적인 불교 학자였다. 불이회의 지도법사 역할도 했다. 사진 불이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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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이회는 1986년 불이상을 제정했다. 처음에는 연구ㆍ실천ㆍ장학ㆍ출가면학의 네 분야에 걸쳐 수상자를 선정했다. 특히 포교를 위해 현장을 누비는 실천 분야를 따로 정한 것이 의미심장했다. 당시만 해도 불교계에 뚜렷한 상이 없었다. 대한불교조계종의 포교대상도 불이상이 제정된 이듬해에서야 만들어졌다. 그만큼 불이상은 선도적이었다.
1974년에 불이회 회원이 된 홍라희 여사가 98년부터 회장을 맡고 있다. 홍 회장은 “저희는 작은 모임으로 시작헀지만, 벌써 강산이 다섯 번 바뀌는 시간이 흘렀다”며 “그 시작은 예술에 대한 관심이었지만 불법(佛法)에 대한 신심이 있었기에 저희는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을 발원했다”고 불이회의 정신과 지향을 설명했다.
‘상구보리 하화중생’은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한다는 뜻이다. 깨달음과 전법. 보살의 마음이자, 대승불교의 정신이다. 불이회의 정관 제2조에도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정신이 분명하게 명시돼 있다.
이어서 홍 회장은 “불이회는 매월 2회에 걸쳐 법문과 강좌를 개최해 왔다. 당대의 큰스님들과 각계의 전문가들이 불이회 법석과 강단에 오르셨다”며 “그분들과 늘 공부하는 시간을 가졌다. 덕분에 초심을 잃지 않고 오늘날까지 정진하는 마음으로 올 수 있었다”고 말했다. 서옹ㆍ탄허ㆍ구산ㆍ광덕ㆍ성파 스님 등 선사들을 비롯해 이기영ㆍ정병조ㆍ고익진 교수 등 쟁쟁한 불교 학자들이 법설을 펼쳤다.
2012년 10월 불이회 홍라희 회장(둘째줄 왼쪽에서 세 번째)과 회원들이 비구니 사찰인 석남사를 찾았다.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성철 스님의 딸이기도 한 불필 스님이다. 사진 불이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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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이회 회원들이 2013년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과 함께 백제 불교의 자취가 서린 일본 나라의 흥복사를 찾았다. 사진 불이회 |
정병조 전 금강대 총장(동국대 명예교수)은 “1970년대 초반 한국 불교계는 암울했다. 종권 다툼으로 종단은 불화했다. 당시 불이회의 등장은 잔잔한 충격을 주었다”며 “첫째 여성불자들의 모임이자 그들의 목소리를 집약했고, 둘째 여성 불자에 대한 경시 풍조가 있던 당시에 엘리트 여성 불자의 등장이었다. 셋째 격려의 배려가 없던 불교계에 불이상을 만들었다. 수여 대상을 강사 이상 조교수 이하, 즉 앞길이 창창한 젊은 신진 학자로 삼은 점이 불교의 미래를 내다보는 탁견이었다”고 평가했다.
올해 제39회 불이상 수상자는 연구 분야 이필원(동국대 WISE캠퍼스 교양융합교육원) 부교수, 실천 분야 홍성란(조계종 국제전법단) 상임포교사다. 상금은 각각 2000만원이다.
백성호 종교전문기자 vangog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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