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1.24 (일)

이슈 종교계 이모저모

법정 스님의 미공개 강연, 책으로… “불행은 결핍 아닌 과잉에서 옵니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1970~2000년대 초반 16회 강연

글로 옮긴 책 ‘진짜 나를 찾아라’

조선일보

불일암을 떠나 강원도의 오두막에서 직접 땔감을 구하고 밭을 일구며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던 2008년의 법정 스님. 새로 출간된 미공개 강연집은 절제, 친절, 공생 등 스님이 생전에 강조한 삶의 자세를 담고 있다. /사진=이진한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정보화 시대라는 것은 피곤한 거예요. 거기에 속지 마세요. 편리한 것도 있지만 그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것을 빼앗겨요. 극장에서도 전화가 울리고 휴가지에서도 전화가 울립니다. 잠시 쉬고 싶어도 귀찮게 달달 부릅니다.”

전 국민 스마트폰 시대의 폐해를 지적하는 듯한 이 이야기는 법정 스님(1932~2010)이 지난 1997년 사단법인 ‘맑고 향기롭게’ 광주·전남 모임에서 했던 강연의 일부다. 지난해 8389만 회선이었던 이동전화 가입 규모가 691만 회선에 불과하던 때였다. 스님은 “편리를 가지려고 했기 때문에, 그래서 누리려고 했기 때문에 생긴 일”이라면서 “가슴이 따뜻해지려면 소유가 아닌 절제의 미덕을 지녀야 한다”고 말을 이어간다.

이를 비롯해 스님이 197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전국에서 행한 16회의 강연을 글로 풀어낸 ‘진짜 나를 찾아라’(샘터)가 입적 14년 만에 최근 출간됐다. ‘맑고 향기롭게’ 각 지역 모임과 길상사·운문사를 비롯한 사찰, 대학교·성당 등에서 열었던 강연 내용은 지금껏 책으로 발표되지 않은 것들이다. 스님의 목소리를 옆에서 듣는 듯 자연스러운 문장 속에 지금도 유효한 교훈과 위로, 격려가 스며 있다.

조선일보

그래픽=송윤혜


생전에 수필집 ‘무소유’(1976)를 비롯해 여러 저서를 남긴 스님은 문장가로도 널리 알려졌다. 이 책은 ‘글’에 가려 그간 주목받지 못했던 스님의 ‘말’을 보여준다. “가급적 말씀하신 내용을 그대로 싣고자 했다”는 주석에서 말을 글로 풀면 그대로 문장이 되는 경지를 짐작할 수 있다.

정갈한 글에서는 접하기 어려웠던 농담과 유머도 있다. “당국에서도 수고롭게, 기관에서 와 있습니다. 요즘은 제가 특별히 배터리를 충전하고 있는 그런 기간이기 때문에, 정부를 비방하거나 체제에 도전하는 그런 언동은 없을 것으로 미리 말씀드리니까 안심하시고 들으시기 바랍니다.”(1979년 부산중앙성당) 청중 어딘가에 섞인 기관원이 종교인의 강연에 신경을 곤두세우던 시대상과, 그런 불쾌한 상황을 한바탕 웃음으로 넘기는 스님의 풍모가 드러나는 장면이다.

속도와 양(量)에만 집착하는 현대인들에게 ‘맑고 향기로운’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내용이 많다. “무소유는 아무것도 갖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 것입니다.” “공존과 공생을 이루려면 이제라도 속도를 늦춰야 합니다. 천천히 흘러야 합니다.” “삶은 미래가 아닙니다. 지금 바로 이 순간이에요.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살 줄 알아야 합니다.” 곱씹을수록 깊은 의미가 우러나는 말들이다.

수십 년 전의 강연이 지금의 한국 사회를 비추는 거울처럼 읽히기도 한다. “우리가 절제하지 않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생태계가 망가지고 있는 거 아닙니까?” “생태계 관점에서 소비자라는 말을 보면 독립적이지 못하고 다른 생물체에서 영양분을 얻는 생물체라는 뜻이에요. 이 얼마나 모욕적이에요?” 1990년대의 강연은 자연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가 얼마나 달라졌는지 돌아보게 한다. “막대한 사교육비를 써서 비인간을 양성하고 있다”며 “가슴은 없고 머리만 있는 사회”를 비판하는 대목은 입시 기술만을 가르치는 우리 교육 제도에 내리는 죽비를 연상시킨다.

이 책은 스님이 1994년 창설한 시민운동 단체 ‘맑고 향기롭게’ 30주년을 기념해 나왔다. 스님이 평생 강조했던 절제와 공존의 자세가 서문 격으로 실린 단체의 취지문에 나타나 있다. “실질적인 선행(善行)을 했을 때 마음은 맑아진다. 선행이란 다름 아닌 나누는 행위를 말한다. 내가 많이 가진 것을 그저 퍼 주는 게 아니라 내가 잠시 맡아 있던 것들을 그에게 되돌려주는 행위일 뿐이다.”

☞법정 스님

1932년 전남 해남 출생. 1956년 출가 이후 해인사, 송광사 등의 선원에서 수행했다. 불교신문 편집국장 등을 지내고 1975년부터 송광사 불일암에 홀로 살며 청빈을 실천했다. 1994년 시민운동 단체 ‘맑고 향기롭게’를 창립하고 1997년 길상사를 창건했다. 2010년 입적했다. 저서로 수필집 ‘무소유’ ‘오두막 편지’ 등이 있다.

[채민기 기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