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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천주교 불교등 기성 종교들은 종교적으로 제도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국가 공휴일로까지 정해진 성인들의 탄생일 신앙생활 중에 납부한 헌금이나 보시금에 대해 세액공제를 해준다는 것만 봐도 그러하다. 신부와 사제 등 종교인들은 사회적으로도 존경을 받으며 정신적 스승이 되기도 한다. 사회적 제도적으로 견고하게 혜택과 지지를 받기에 그러한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전통적으로 사람들의 삶에 중요한 민간신앙으로 함께 해왔던 무속인들은 어떠한가. 무속이라는 특성상 제도적 인정과 지원을 받는 것이 수월치 않음이나 급한 일이 생기면 당장 달려가 의지한다.
그러면서 미신을 믿는 사람으로 치부될까 하여 비난한다. 오히려 부정하는 태도는 고상한 정신을 가진 사람으로 비치고 싶은 인간의 이중적 민낯이라 해야 할까. 신점이라는 것이 과학적으로 증빙해 내기도 힘들고 손에 잡히지 않고 보이지 않는 세계와의 밀접한 접신을 밑바탕으로 하다 보니 나름 부작용도 무시할 수 없다. 기성종교 제도권 적인 종교의 폐해는 그보다도 더 크지 않을까. 엄청난 살상과 반목을 가져온 이슬람과 기독교권의 투쟁은 현재진행형인 것이 그 방증이다. 큰 만신 무형문화재 김금화선생에 대해 생각에 잠기게 한다.
그분은 1982년 7월 미국 뉴욕 파크에비뉴에서 칼날 위에 맨발로 올라서서 굿판을 펼쳤다. 2003년엔 뉴욕 링컨센터 초청으로 9·11테러 참사를 위로하고자 대동굿도 펼쳤다. 무형문화재 말 그대로 문화의 한 유형으로만 인정한다지만 인간 내면의 심연을 두드리는 혼과 혼이 연결되어 순결한 모습으로 비춰지지 않았을까. 가장 가깝게 서민들의 삶과 애환을 함께 해온 것은 척하는 제도권 내의 성직자들이 아니라 폄하 속에서도 숙명처럼 신명을 받아들인 무속인들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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