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 10년...이젠 설명할 수 있는 '그날의 실패'
전 국민이 충격과 비탄에 빠졌던 2014년 4월 16일로부터 10년이 흘렀다. 어떻게 그런 참혹한 일이 일어난 것인지 밝히기 위해 10년 동안 9개의 국가기관이 가동됐다.
참사 직후부터 검경합동수사본부 수사와 해양심판원 조사, 감사원 감사, 국회 국정조사가 잇달아 진행됐다. 2015년부터는 특별법으로 설립된 416세월호참사특별조사위원회(특조위)가, 선체가 인양된 2017년부터는 세월호 선체조사위원회(선조위)가, 그리고 2018년부터는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사참위)가 조사 활동을 이어갔다. 사참위 활동 기간 중 검찰 세월호 특별수사단과 세월호 DVR 특별검사의 수사도 있었다.
10년에 걸친 수사·감사·조사 과정에서 확보된 사실관계들과 기록들을 토대로, 이제 세월호 진상 규명의 두 축인 '침몰 원인'과 '구조 실패 이유'가 합리적으로 설명될 수 있게 됐다.
10년의 진상규명 노력을 통해 그날 304명이 희생된 이유는 이렇게 설명된다. 세월호는 ▲사소한 기계적 결함도 견디지 못하고 쓰러질 정도로 취약했고, 결코 사람을 태워선 안 되는 배였다. ▲선원은 승객을 대기시켜 놓은 채 자신만 살기 위해 먼저 탈출했다. ▲해경은 지휘부부터 말단까지 집단적으로 무능하고 조직적으로 무책임했다. (기사 보기 : 세월호 진상규명 10년..."왜 침몰했고 왜 못 구했나")
국민 90% 세월호 침몰 원인 몰라...3차례 조사위원회 실패가 결정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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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의 수사와 조사를 통해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된 참사의 원인을 대다수 국민들이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는 이 상황은, 세월호 특조위와 선조위, 사참위 등 3개의 국가 조사위원회들이 안팎의 이유로 제대로 성과를 내지 못한 것과 연관이 있어 보인다.
세월호 참사는 특별법에 따른 국가 조사위원회가 사회적 재난·참사에 대한 진상규명을 담당하도록 한 역대 첫 번째 사례다. 성수대교 붕괴, 삼풍백화점 붕괴, 대구지하철 화재 등 세월호 이전의 대형 참사들은 검찰과 경찰의 수사 결과가 곧 진상규명 결과였다. 즉, 참사가 발생하면 즉시 수사를 벌여 책임자를 형사처벌하는 것으로 진상규명을 완료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세월호 참사는 검찰과 경찰 수사가 국민들의 신뢰를 얻지 못하면서 국회가 특별법을 만들어 조사위원회로 하여금 진상을 조사하도록 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수사'와 '조사'의 차이다. 수사의 목적은 책임자에 대한 형사처벌이다. 참사의 원인이 누군가의 위법이나 범법 행위 때문이었다고 보고, 그 사람을 찾아내 기소하고 재판해 법적으로 처벌받게 하는 것이다. 이때 위법과 범법을 입증하기 위해선 엄격한 증거가 필요하다. 그러나 모든 재난이나 참사는 반드시 법적으로 처벌할 수 있는 원인 때문에만 발생하지 않는다. 예컨대 제도 자체가 잘못돼 있었거나 시스템이 오작동한 경우, 또 위법은 아니지만 편법적인 관행이 있었거나 특정 행위자의 나태 혹은 안일한 판단이 있었을 경우에는 법적 처벌이 어렵다. 그러나 이런 요소들이 우연히 비극적으로 결합하는 순간 대형 재난이나 참사가 발생할 수 있다.
따라서 재난과 참사에 대한 진상조사는 법적으로는 처벌할 수 없더라도 분명히 참사의 원인을 제공한 모든 요소들이 어떤 인과관계로 얽혔는지 확인해 보고서로 정리하는 것, 그리고 재발을 막기 위한 제도적 보완책을 권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런 측면에서 3개의 세월호 조사위원회들은 '조사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다만 그렇게 된 이유는 각 조사위원회마다 차이가 있다.
정부 방해와 탄압으로 좌초한 세월호 특조위
참사 직후 검경합수부 수사와 감사원 감사, 해양심판원 조사, 국회 국정조사가 잇달아 진행됐다. 그러나 국민적 의혹을 해소하는 데에는 모두 한계가 있었다. 유가족과 시민단체가 특별조사위원회를 통한 진상 규명을 요구했다. 국회에 특별법 제정을 청원하는 서명에 무려 650만 명의 국민이 참여했다. 여야 협상 끝에 2014년 12월 세월호 특별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고, 2015년 1월 1일부터 세월호 특조위가 출범했다.
특조위는 이석태 위원장을 포함한 5명의 상임위원과 12명의 비상임위원 등 모두 17명의 조사위원으로 구성됐다. 여야 정치권이 각 5명씩, 유가족이 3명, 변호사협회와 대법원이 각 2명씩을 추천했다. 17명 중 14명이 변호사나 법학 교수 등 법률 전문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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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풍파는 멈추지 않았다. 2015년 11월 특조위는 전원위원회에서 참사 당일 청와대와 대통령이 적정하게 대응했는지를 조사하는 안건을 부의할 방침이었다. 이때부터 여당 추천 조사위원들과 새누리당 국회의원들의 합동 공세가 시작됐다. 여당 추천 황전원 위원은 특조위가 청와대 조사를 개시한다면 여당 추천 조사위원 전원이 사퇴할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고, 새누리당 국회의원들은 이석태 위원장 사퇴를 요구하며 특조위 해체도 검토하겠다는 강성 발언을 내놓았다. 이는 해수부가 미리 작성해 공유한 '대응 문건'에 담긴 시나리오대로 진행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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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인설과 열린안...엇갈린 2권의 보고서 발간한 선조위
특조위가 해산한 직후인 2016년 말부터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농단이 드러나며 촛불 정국이 형성됐다. 결국, 박 대통령은 탄핵됐다. 그리고 2017년 3월 23일, 2년 가까이 시도한 선체 인양이 성공해 세월호는 1,703일 만에 물 위로 떠올랐다. 세월호는 특조위를 탄압했던 박근혜 대통령이 구속된 날 목포신항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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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렵 국회에서는 선조위에 이후 진상조사를 이어갈 사참위의 법적 근거를 담은 특볍법안이 패스트트랙으로 본회의에 상정돼 있었다. 권영빈 소위원장은 전원위원회 등에서 선조위가 세월호 침몰 원인에 대해 반드시 결론을 내릴 필요는 없다는 취지의 발언을 수 차례 내놓았고, 일부 조사위원들이 이에 반발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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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가족협의회 진상규명분과장이었던 고 장준형 군 아버지 장훈 씨는 "그때 가족들에게는 그런 사소해 보이는 이유들보다는 뭔가 불가항력적인 사고가 있었고 그걸 은폐한 세력이 있었다는 서사가 아이들에게 덜 미안하게 느껴지는 분위기가 있었다"고 털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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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자 처벌' 집착해 과도한 의혹 제기성 조사 치중한 사참위
선조위 조사가 마무리로 치닫던 2018년 3월 말, 사참위가 전원위원회를 열고 활동을 시작했다. 조사위원은 9명. 가습기살균제 참사 조사도 병행해야 했던 이유로 보건환경 전문가 등 다양한 분야로 구성됐다. 사참위는 2018년 12월 조사 개시를 공식 선언한 뒤 2020년 말 특별법 개정으로 활동 기한을 더 보장받아 2022년 6월까지 조사를 벌였다. 그러나 전체적인 조사의 기조가 '책임자 처벌의 근거 마련'으로 형성된 끝에 과도한 의혹 제기성 조사에 치중했고, 참사의 핵심 원인에 대해서는 사실상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한 채 3년 3개월의 긴 활동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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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참위 박병우 진상규명국장은 당시 채증영상 속에서 임경빈 군의 산소포화도가 69로 나타나 있다며, "다수의 응급의학 전문의들에게 자문한 결과, 산소포화도 69는 생존했다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도저히 사망했다고도 볼 수 없는 수치로 긴급하게 병원으로 이송해야 했다는 게 공통된 의견이었다"고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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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임경빈 군에 대한 원격 의료지도를 했던 목포한국병원 의사가 사참위에 진술한 내용도 대동소이했다. 영상 속 임경빈 군의 상태는 이미 사망한 지 오래된 것으로 보이며, 당시 현장 응급구조사들은 의료법상 사망 판정을 내릴 수 없기 때문에 병원으로 데려오라고 했던 것이라고 진술했다. 그럼에도 사참위는 발표 당시 이런 조사 내용들을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해경의 초동대응 조사를 담당했던 이준태 전 사참위 조사관은 뉴스타파와의 인터뷰에서, 임경빈 군 사건에 대한 내부 조사 보고서들을 뒤늦게 공유받아 읽은 뒤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조사 윤리의 문제라고 판단해 위원장과 국·팀장 등에게 문제를 제기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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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사참위는 "외력 가능성을 조사했지만 외력이 침몰 원인인지 확인되지 않았다"는 모호한 결론을 종합보고서에 담았다. 선조위와 사참위 종합보고서 외부 집필진으로 참여했던 전치형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는 "외력에 대한 집중적 조사를 벌이고도 그 결과가 전문기관 검증을 통과하지 못했다면 기각 결론을 내리고 다른 합리적 설명을 내놔야 했다. 그러나 많은 예산과 인력을 투입하고도 성과를 내지 못했다는 비난과 유가족들의 실망이 두려워 용기를 내지 못하고 사실상 아무것도 밝히지 못했다는 식의 결론을 내린 것"이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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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의혹들에 대한 조사에 그토록 집착한 것은 왜였을까. 박병우 진상규명국장이 사참위 인트라넷 게시글의 일부에서 단초가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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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참사와 미래의 또 다른 재난들, 어떻게 조사해야 하나
사참위가 세월호 침몰 원인에 대한 명확한 결론도, 구조 실패에 이유에 대한 구조적인 설명도 담지 못한 종합보고서를 발간하고 활동을 마친 얼마 뒤, 서울 한복판 골목길에서 150여 명이 압사하는 믿을 수 없는 참사가 발생했다. 세월호 참사 발생 9년을 향하고 있던 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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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태 전 세월호 특조위원장은 "이렇게 하면 유가족과 국민들은 정부가 뭔가 엄청난 책임을 숨기고 있다고 여길 수밖에 없게 된다"며 '우매한 대응'이라고 지적했다. 세월호 특조위를 정부가 방해해 과도한 의혹들이 확산되고 그로 인해 진상 조사가 자꾸만 굴절되었던 것처럼, 어쩌면 이태원 진상 조사의 첫 단추도 이미 절반쯤은 잘못 끼워진 것일지 모른다.
22대 총선에서 야권이 압승하면서 이태원 유가족들에게도 다시 희망이 생겼다. 다시 특별법 제정을 위해 신발끈을 죈다. 그런데 만약 특별법으로 조사위원회가 만들어지기만 하면 진상이 밝혀지는 것일까. 이태원 조사위원회가 3개의 세월호 조사위원회들과는 다른 길을 걸어 다른 결과를 만들어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조사위원의 구성이다. 3개의 세월호 조사위원회는 큰 틀에서 여야 정당이 추천하는 조사위원의 비중이 절대적이고 일부를 유가족이나 대법원 등에 배분하는 방식이었다. 국회가 민의를 대표하는 기관이라는 취지가 반영된 것이긴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여야 정당의 정치적 입장 차이가 참사 조사라는 영역으로 그대로 이식되어 정쟁으로 귀결되는 양상을 보였다. 국회 여야 추천의 취지는 살리되 비중은 크게 줄이는 방식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참사의 성격에 맞는 전문성을 갖춘 조사위원 구성도 중요하다. 대다수 재난·참사의 원인에는 기술적 시스템의 오작동이 포함된다. 심지어 자연재해에 따른 재난의 경우에도, 재해 방지를 위해 구축한 기술적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피해가 커지기도 한다. 세월호 참사는 해상에서 운항하던 선박에서 발생했음에도 특조위와 사참위 조사위원 가운데는 조선해양 전문가가 1명도 없었고, 이는 특히 사참위에서 침몰 원인 관련 결론을 제대로 못 내린 것과 관계되었을 수 있다. 이태원 참사의 경우라면 도시설계, 경찰행정, 응급의학 등 참사 관련 전문 분야를 먼저 고민해 조사위원을 구성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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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재난·참사 조사의 의미와 한계, 그리고 조사위원회의 최종 목표에 대해 출범 단계부터 명확한 인식과 합의가 있어야 한다. 재난·참사에 대한 조사는 타임머신을 타고 되돌아가지 않는 이상, 발생 당시의 상황들을 100% 완벽하게 복원해낼 수 없다. 세월호 모형시험을 통해 참사 당일의 항적을 완벽하게 재현할 수는 없고, 경향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으면 조사는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 또한 모든 조사는 일정 시간이 지나 이뤄지므로 그 사이 일부 증거나 자료들이 소실됐을 여지도 있다. 세월호 증개축 이후 무게중심을 측정한 경사시험이 엉터리로 이뤄졌지만 얼마나 오차가 있었는지는 영원히 확인할 수 없고, 사고 당시 세월호에 실려 있던 정확한 평형수 양을 알 수 있는 자료도 어디에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 조사위원회는 주어진 조건 속에서 최선의 설명이 가능한 결론을 도출해 보고서의 형식으로 피해자와 국민에게 보고하는 것이 최종 임무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선조위와 사참위 모두 이 임무를 지키지 못했다. 이태원 조사위원회에선 반복되지 않아야 한다.
뉴스타파 김성수 sskim@newstap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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