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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이자 남편, 효당 스님의 모든 것… 평생을 매달려 책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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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정복 반야로차도문화원 원장

‘효당 최범술의 불교와 차도’ 펴내

“스승이자 남편인 효당 최범술 스님의 일생과 업적을 정확히 남기고 싶었습니다.”

최근 ‘효당 최범술의 불교와 차도(茶道)’(민족사)를 펴낸 채정복(78) 반야로차도문화원 원장은 비장하게 말했다. 효당(曉堂) 최범술(1904~1979)은 어떤 범주에 묶기 어려운 ‘르네상스적 인물’. 승려이면서 독립운동가 박열과 함께 흑우회(불령선인회) 활동을 했고, 만해 한용운이 중심이 된 일제하 불교 비밀 결사 ‘만당(卍黨)의 핵심이었고, 원효대사를 현대적으로 재조명하는 데 앞장섰으며, 해인사 팔만대장경을 1937년 인경(印經)하고 광복 후엔 제헌 의원도 지냈다. 특히 당시까지 잊힌 한국 차 문화의 중흥조 초의(草衣) 선사를 세상에 널리 알리는 한편 저서 ‘한국의 차도(茶道)’를 펴내고 차의 대중화를 이끈 선구자다.

저자는 1969년 연세대 사학과 졸업 논문의 주제로 원효를 준비하며 효당을 처음 대면했다. 스승인 민영규(1915~2005) 교수가 “일본 대정대(大正大) 선배인데 원효 스님 자료가 많다”며 효당에게 지도받기를 권했다. 1969년 경남 사천 다솔사로 찾아간 저자에게 효당이 먼저 가르친 것은 마음을 내려놓는 ‘하심(下心)’. 어려서 ‘수재’로 소문나 기(氣)가 하늘을 찌르던 채 원장이었다. “저에게 ‘지적 욕구가 너무 강하다’며 얇게 깎은 대나무칼을 주면서 마당 잡초를 뽑으라고 했어요. 그 밖에도 댓돌에 가지런히 신발 벗어놓는 법, 문고리를 소리 없이 닫는 법…. 도(道)가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을 알려주신 것이죠.”

효당 문하에서 지도받고 졸업 논문을 쓴 그는 1971년 다솔사로 내려와 “부처님 앞에서 촛불 켜고, 향 피우며” 효당의 아내가 됐다. 효당은 1942년 만해 한용운의 권유로 결혼했다가 1964년 이혼한 상태였다. 원효의 ‘효(曉)’를 호로 삼은 효당은 채 원장에겐 ‘원(元)’ 자를 넣어 ‘원화(元和)’란 법호를 주면서 ‘도반(道伴)’으로 대우했다. 다솔사에는 효당을 찾아온 이은상·구상 등 문인, 허백련·장우성·변종하 등 화가, 작곡가 강석희 등 예술가들로 넘쳐났다. 유신 긴급조치 위반자들이 머리 깎고 들어오기도 했고, 정보기관원이 고시생으로 위장해 살기도 했다. 채 원장은 “화가들이 즉석에서 그림을 그려 병풍을 만들 정도였다. 마음은 풍요롭고 행복한 시절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1남 1녀를 얻은 결혼 생활은 짧았고, 지난한 현양 사업은 그의 몫으로 남았다.

효당은 생전에 ‘물을 돈 주고 사 먹는 시절이 오면 차도(茶道)가 성행할 것’이라고 했다. 효당 사후 ‘늪에 빠진 듯’했던 채씨는 “꽃꽂이 강습 때 차도를 가르쳐달라”는 권유로 시작해 1983년 ‘반야로(般若露)차도문화원’을 열었다. 생전에 차나무를 심고 가꾼 효당의 차 제조법과 문화를 그대로 이었다. 단순히 차를 마시는 것이 아니라 명상과 선사(禪師)의 어록을 강독하는 등 차와 선(禪)을 함께 가르쳤다. 차 문화를 보급하는 한편 2009년 한국외대 박사과정에 입학해 본격적으로 효당의 삶과 업적을 학문적으로 정리해 2년 전 박사학위를 받고 이번에 단행본으로 펴냈다. 채 원장은 “효당은 불교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했고, 항상 한국인으로서 정체성을 찾았다”며 “원효와 초의를 연구한 것도 불교와 차 문화의 자생적 원류를 찾으려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효당의 삶과 업적을 그렇게 정리했더니 ‘쉽게 이해된다’는 평이 있는데, 칭찬인지 핀잔인지 모르겠다”며 웃었다.

[김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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