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서울 올림픽 여자 배구에서 페루의 은메달을 이끌었던 세실리아 타이트 IOC 위원이 28일 서울 잠실종합운동장을 찾아 서울올림픽 엠블럼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박형기 기자 oneshot@donga.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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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미스터 박(Mr. Park)의 나라에 다시 오겠다는 오랜 꿈이 이뤄졌다.”
1980년대 여자 배구 세계 최고의 공격수 중 한 명이던 세실리아 타이트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62·페루)은 36년 만에 서울 한양대 올림픽체육관 코트를 다시 밟은 뒤 울먹이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타이트 위원은 선수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코트에 앉아 한동안 옛 기억에 빠져들었다.
2024 강원 겨울청소년올림픽 참관을 위해 지난주 한국을 방문한 타이트 위원은 페루로 돌아가기 전 한양대 올림픽체육관을 찾았다. 이곳은 페루와 소련의 결승전을 포함해 서울올림픽 여자 배구 경기가 열린 경기장이다. 그는 페루 여자 배구대표팀 일원으로 서울 올림픽에 출전했다.
28일 세실리아 타이트 IOC 위원이 1988년 서울올림픽 여자 배구 결승전을 뛰었던 한양대 올림픽체육관을 찾아 감회에 빠져 있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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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경기는 올림픽 배구 역사를 통틀어 가장 치열했던 명승부로 꼽힌다. 1, 2세트를 페루가 먼저 가져갔고 소련이 3, 4세트를 따냈다. 마지막 5세트에서도 4차례나 동점을 이루는 접전 끝에 소련이 17-15로 승리했다.
체육관을 가득 메운 한국 관중들은 은메달을 딴 페루를 일방적으로 응원했다. 당시 페루 대표팀 사령탑이 고 박만복 감독(1936~2019년)이었기 때문이다. ‘페루 배구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박 감독은 1974년 페루 대표팀 감독에 선임된 후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을 포함해 4차례 올림픽에서 페루 대표팀을 지휘했다. 타이트 위원은 “아빠 없는 가난한 소녀였던 내게 ‘미스터 박’은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 배구를 처음 시작한 내게 ‘세계 최고의 선수가 될 것’이라고 응원해준 분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코트 밖에서는 한없이 따뜻했던 박 감독이었지만 훈련만큼은 혹독하게 시켰다. 제대로 연습이 되지 않았다 싶으면 일요일에도 불려 나가 공을 받고 때려야 했다. 박 감독의 지도 아래 타이트 위원은 16세에 국가대표로 발탁돼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과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을 뛰었다. 이후 그는 ‘황금의 왼손(Golden Lefty)’으로 불리며 여자 배구의 한 시대를 풍미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무릎 수술을 받은 그를 다시 코트로 이끈 것도 박 감독이었다. 박 감독은 “이제 너의 시간이 왔다”며 혼자 재활에 열중하던 그를 주장으로 임명했다. 비록 금메달 직전에 멈춰섰지만 올림픽 은메달은 페루 배구대표팀이 거둔 역대 최고 성적이다.
서울 한양대 올림픽체육관에 설치된 고 박만복 감독 동판 앞에서 기념 사진을 남긴 세실리아 타이트 IOC 위원. 이헌재 기자 uni@donga.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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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트 위원은 “‘미스터 박’이 평생 눈물을 보인 건 서울올림픽 결승전에서 패했을 때가 유일했다”며 “나뿐 아니라 모든 선수들에게 아버지같은 존재였던 그가 울자 모든 선수들이 함께 눈물을 흘렸다”고 회상했다.
박 감독은 2016년 한국인 최초로 세계 배구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다. 타이트 위원을 비롯한 제자들은 당시 행사가 열린 미국 보스턴을 깜짝 방문해 그의 헌액을 현장에서 축하하기도 했다.
배구 선수에서 은퇴한 뒤 타이트 위원은 페루 국회의원을 지내며 여성과 청소년 스포츠 발전을 위해 애썼다. 이후 스포츠 행정가로 변신한 그는 지난해 인도 뭄바이에서 열린 제141차 IOC 총회에서 새 위원으로 선출됐다. 그는 “IOC 위원이 된 뒤 아버지의 나라에서 2024 강원 겨울 청소년올림픽이 열린다는 말을 듣고 뛸 듯이 기뻤다”며 “‘미스터 박’은 내가 지금 알고 있는 모든 걸 가르쳐 준 분이다.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면서는 페루 청소년들을 위해 일했지만 IOC 위원이 된 지금은 전 세계 모든 선수들을 돕고 싶다”고 말했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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