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옥 기자 |
공직선거법 제24조의2는 “국회는 국회의원 지역구를 선거일 전 1년까지 확정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지만, 22대 총선이 6개월 남짓 다가온 8일 현재 선거구 획정은 감감무소식이다. 국회의원선거구획정위원회(이하 ‘획정위’)가 선거구 획정의 기준으로 삼아야 할 지역구·비례 의석 숫자 등 기준 자체를 국회가 마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야는 “선거법 논의가 공전을 거듭하고 있다”는 상황 논리를 댔지만, 선거구 획정 기한을 국회가 지킨 선례 자체가 없다. ‘선거일 전 1년’이라는 획정 기한이 선거법에 신설된 건 19대 국회 시절이던 2015년 6월이다. 당시 여야는 부칙에서 20대 총선 선거구 획정일을 같은 해 10월 13일(선거일 전 5개월)로 못 박았으나, 실제 선거구 획정은 이듬해 2월 28일(선거일 45일 전)에야 마무리됐다. 준(準) 연동형 비례제가 도입된 2020년 21대 총선 당시엔 마감이 더 늦어져, 선거일 39일 전 선거구 획정이 마무리됐다. 이 때문에 정치권 안팎에선 “정치 상황이 아니라, 획정시기를 강제하지 못하는 선거법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획정위에 따르면, 내년 총선을 앞두고 선거구별 주민등록인구가 획정 기준(인구 비례 2대 1)에 부합하지 않아 재조정이 이뤄져야 하는 국회의원 지역 선거구는 무려 30곳에 달한다. 서울 강동갑과 부산 동래, 경기 수원무ㆍ평택갑ㆍ평택을ㆍ고양을ㆍ고양정 등 18곳이 인구 상한을 초과해 분구(分區) 가능성이 있다. 부산 남갑ㆍ남을ㆍ사하갑, 인천 연수갑, 경기 광명갑ㆍ동두천연천 등 11곳은 인구수가 하한에 못 미쳐 선거구 규모를 늘려야 한다. 부산 북ㆍ강서을은 획정 기준에 맞지 않아 지역구를 아예 재조정해야 한다.
이번에도 국회 논의가 늦어지자 획정위는 지난달 11일 국회 정치개혁특위에 “국외부재자신고 개시 1개월 전인 10월 12일까지 내년 총선의 선거구 획정 기준을 마련해 달라”고 촉구했다. 최소한 국회의원 숫자는 정해져야 선거구 획정 논의가 가능하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정치권에선 “여야가 극한 대립을 이어가고 있는 정치상황을 고려하면 예년처럼 선거법 개정이 총선 직전에야 될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이 많다.
피해는 고스란히 A씨 같은 정치신인들에게 돌아간다. 출마를 준비하던 선거구가 갑자기 확 넓어지거나, 공들였던 지역이 선거구에서 제외될 수 있어서다. 최악의 경우 당내 경선을 준비하기 위해 열심히 모집한 동네 당원이 통째로 옆 지역구 유권자가 될 수도 있다. 선거구 재획정 예상지역에 출마할 예정인 국민의힘 소속 B씨는 “선거구 획정이 늦어지면 아예 가본 적이 없는 지역에서 선거운동을 해야 할지 모른다”며 “지역이 너무 넓어지면 현역 의원들도 선거운동을 하기 힘든데, 시간도 돈도 없는 원외 신인들은 어떡하느냐”고 말했다.
2012년 2월 15일 국회 의원회관 앞에서 새누리당 여상규 의원(왼쪽·경남 남해-하동)이 주성영 정치개혁 특위 여당 간사를 붙잡고 선거구 획정안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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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신인들은 선거구 획정 과정에서 현역 의원들의 이해관계에 맞게 선거구 조정이 이뤄지는 이른바 ‘게리맨더링’이 발생할 가능성도 우려한다. 획정위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산하 독립기구라지만, 정당 추천 몫 인사가 참여하고 획정안이 정개특위의 의결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과거 획정위에 참여했던 전문가는 “선거구 획정이 늦어질수록 ‘지역주민 혼란을 피하려면 조정을 최소화하는 게 맞다’는 현역 의원 요구도 커지는 게 사실”이라고 전했다.
2012년 19대 총선 직전 이뤄진 선거구 획정에선 영ㆍ호남 지역구 감소를 피하기 위해 수도권 분구를 최대한 줄이려는 여야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행정구역에 맞지 않는 ‘누더기 선거구’가 다수 발생했다. 경기 용인 기흥구는 일부 동을 떼어내 처인구에 붙이는 방식으로 분구를 피했다. 경기 수원 권선구 역시 서둔동만 떼어내 팔달구에 붙였다. 이에 분구를 예상하고 출마를 준비하던 예비후보들은 “지역주민들을 무시하는 처사”라며 크게 반발했고, 일부 주민들은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냈다.
지난해 10월 11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 관악청사에서 열린 제22대 국회의원선거 선거구획정위원회 출범 현판식에서 송봉섭 위원장(왼쪽 네번째) 등이 현판 제막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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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문에 정치 신인들은 “선거구 획정 지연이야말로 현역 의원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는 행위이고, 이를 가능케한 선거법은 ‘현역 우대법’”이라고 주장한다. 분구 가능성이 있는 수도권 지역구에 출마 예정인 더불어민주당 원외 인사 C씨는 “현역 의원들이 신인들의 발을 묶기 위해 선거구 획정을 의도적으로 미루고, 막판에는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게리맨더링을 해버리는 것 아니냐”며 “여야를 떠나 현역 대 신인의 진입장벽이 높다”고 주장했다.
전문가들은 선수에게 심판까지 맡긴 기존 정치 관행과 법규를 바꿔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윤종빈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지역구 분구·합구는 쉽게 합의할 수 없는데, 이를 정치권에만 맡겨놓으니 답이 없는 것”이라며 “선거구 획정과 관련된 법 개정은 늦어도 선거일 1년 전에 마무리될 수 있도록 제도적 조치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김형준 배재대 석좌교수는 “선거구 획정 기한 전에 선거법을 개정하지 않으면 기존 선거법으로 총선을 치르게 해서라도 기한을 지키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성지원 기자 sung.jiw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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