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 표류한 김명수표 사법개혁
민사 4.2개월·형사 1.8개월 적체
승진제 폐지… 경쟁구조 붕괴 탓도
金 ‘사법 민주주의 확대’ 명분 앞세워
부장판사→법원장 오르던 방식 대신
법관들 투표로 법원장 후보 추천받아
열심히 일해 인정받는 제도 폐지되자
워라밸 맞춰 일하거나 로펌으로 이직
2023년 고법 판사 15명 사직 ‘역대 최다’
세계일보가 기획하고 서울지방변호사회가 실시한 ‘법조의 미래를 묻다’ 설문조사에서 변호사 10명 중 9명이 ‘재판 지연이 문제’라고 답하고, 47.29%는 ‘문제가 심각하다’고 한 데는 이 같은 문제의식이 반영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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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7년 9월 26일 김명수 대법원장이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강당에서 열린 신임 대법관 취임식에 참석하여 취임사를 하고 있다. 뉴시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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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전인 2017년 9월 김명수 전 대법원장이 국민에게 약속했던 ‘좋은 재판’이 결국 표류로 끝났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25일 대법원이 발간한 ‘2023사법연감’에 따르면 전국 법원의 민사소송 처리 기간이 최근 6년간 갈수록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민사합의 사건의 1심 판결이 나오기까지 평균 14개월이 걸렸다. 이는 2017년 9.8개월과 비교해 4.2개월이 늘어난 수치다. 2심의 경우 지난해 고등법원은 11.1개월, 지방법원(항소부)은 10.8개월이 소요됐다. 이 역시 2017년에는 고법 8.5개월, 지법 7.3개월이 걸린 것에 비해 처리 기간이 눈에 띄게 증가했다. 지난해 형사합의 사건 역시 1심 판결이 나오기까지 평균 6.8개월이 걸렸다. 2017년(5개월)에 비해 1.8개월이 늘어났다.
항소심과 상고심의 평균 처리 기간도 덩달아 증가했다. 민사합의 사건의 경우 지난해 1∼3심 사건의 총 처리 기간이 36.8개월로 집계됐다. 2017년(22.1개월)보다 무려 14.7개월이 늘어난 것이다. 지난해 기준 형사합의 사건의 1심에서 대법원까지 심급별 처리 기간을 더하면 총 15.2개월이 나왔다. 이 역시 2017년(12.8개월)보다 2.4개월 길다.
김 전 대법원장 취임 이후 장기미제사건이 급증한 점도 재판 지연 현상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지난해 1심만 2년 넘게 진행 중인 형사사건 피고인은 4781명이나 됐다. 김 전 대법원장이 취임한 2017년(1709명)에 비해 세 배 가까이 늘어난 것이다. 2년6개월이 넘게 심리 중인 민사사건은 지난해 7746건으로 2017년(2440건)에 비해 세 배 이상 증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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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설문조사에서 변호사들은 ‘재판 지연’ 문제의 최대 원인을 묻는 질문에 ‘법관 수 부족’(61.09%)을 가장 많이 꼽았다. 뒤를 이어 김 전 대법원장이 단행한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제 폐지’(86명·17.34%), ‘사법행정 역량 부족’(58명·11.69%), 법조 일원화에 따른 ‘법조 경력 5년(2029년부터 10년) 이상 법조인 법관 임용 제도’(20명·4.03%) 순으로 영향을 미쳤다고 봤다. 고법부장 승진제 폐지 등 인사제도 변화가 재판 지연의 주된 원인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를 가속화시켰다고도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다.
◆김명수 6년 재판지연 가속화
6년 전인 2017년 9월26일 김 전 대법원장은 “저의 취임은 그 자체가 사법부 변화와 개혁의 상징”이라고 호언했다. ‘사법행정권 남용 사태’ 극복이 급선무였던 김 전 대법원장은 재임 중 대법원장을 중심으로 한 법원의 수직적인 구조를 허물고, 이를 수평적·민주적 구조로 바꾸려 했다. 판결문 열람 공개를 확대하고 영상재판 확대, 형사전자소송 추진 등으로 국민의 사법 접근권을 강화하고 재판의 투명성을 높이기도 했다. 하지만 변화된 법관 인사 제도를 둘러싸고 여전히 잡음이 이어지고 있고 법관 이탈과 재판지연 문제는 오히려 심화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과거 법원은 수직적이고 관료적인 형태의 조직 체계를 가졌다. 각 법원장은 법관 평가와 사무분담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법원장이 되기 위해선 고법 부장판사를 거쳐야 했다. 반면 고법 부장판사 승진에 누락된 법관은 대거 사직했다. 이런 관료적 사법행정 체제의 정점에 있는 대법원장은 인사와 예산 같은 사법행정 권한을 독점해 ‘제왕적’이라는 평가가 따라붙었고 사법행정권 남용의 근본적인 원인으로 지목되기도 했다.
이에 김 전 대법원장은 취임 초부터 법원의 관료화 해체를 외쳤다. 그 일환으로 내놓은 것이 고법 부장판사 승진제도 폐지다. 단독·배석판사에서 지법 부장판사, 고법 부장판사, 법원장, 대법관으로 이어진 과거 법원의 승진 구조를 없앤 것이다. 고법 부장판사 승진제 폐지는 2011년 법관일원화 도입 논의 때부터 추진돼온 것이지만 양승태 전 대법원장 때 이를 보류하기 위한 내부 검토가 있었다. 그러나 김 전 대법원장이 취임하며 결국 폐지가 확정됐다. 이와 함께 도입된 법원장 후보 추천제는 법관들의 투표로 법원장 후보가 추천되면 그 가운데 대법원장이 법원장을 최종 선정하게 했다. 이로 인해 법원 내부 분위기가 민주적으로 바뀌었다는 긍정적 평가도 있다. 하지만 ‘사법 민주주의’ 확대를 명분으로 제시한 개혁안이 경쟁 구조를 무너뜨려 현 사법부의 ‘재판지연’을 악화했다는 지적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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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치 보여 쓴소리도 어려워져”
김 전 대법원장은 재판 지연의 원인으로 코로나19 같은 법원 외부의 요인을 강조했다. 실제 코로나19 영향으로 각 법원이 휴정하거나 재판 기일이 연기됐다. 법원행정처는 2020년 2월 말과 8월 말, 12월 말 3차례 휴정을 권고하기도 했다. 법원행정처는 휴정기 외에도 사회적 거리두기 단계 격상에 따라 수도권 법원에 재판 기일을 연기하거나 직원들에게 재택근무를 권고했다.
반면 법조계에선 법관의 사기 저하 같은 법원 내부 문제를 재판지연의 원인으로 지목한다. 열심히 일하면 능력을 인정받는 구조가 사라지자 판사들이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에 맞춰 일하거나 고액 연봉의 로펌 등으로 눈을 돌리게 됐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부장판사 출신의 한 변호사는 “전반적인 사회적 분위기가 달라졌기에 원인을 단정하긴 어렵지만 법원 내 제도 변화도 함께 맞물려 문제를 가속화시켰을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며 “변호사는 법관에 비해 경제적으로 풍족하고 자유롭다. 가족을 챙기기에도 변호사가 유리하기 때문에 요즘 세대 판사들은 기회가 있으면 (법원을) 나오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고법 부장판사 승진제 대신 도입된 법원장 후보 추천제가 ‘인기투표’로 전락했다는 점도 법원 내부 분위기가 가라앉게 된 원인 중 하나로 꼽힌다. 법관들이 투표로 법원장 후보를 추천하기 때문에 법원장들이 후배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수도권의 한 고법 부장판사는 “과거엔 선배 격인 판사가 업무량이 많은 판사는 격려하고 그렇지 못한 판사에겐 쓴소리를 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선후배 간 접점 자체가 줄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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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법판사 15명 사직, 역대 최다
이 같은 사기 저하는 법관 이탈로도 이어졌다는 분석이다. 법원의 허리 격인 중견 법관의 대거 이탈이 현실로 나타났다. 2023년 정기인사에서 사직 의사를 밝힌 법관 61명 가운데 고법 판사와 지법 부장판사, 부장판사급 재판연구관은 51명에 달했다. 이 중 고법 판사는 15명이 사직했다. 지난해 13명에 이어 역대 가장 많은 수다.
부장판사 출신의 한 변호사는 “사직하는 판사들 중에 ‘이 사람마저 나가나’라는 느낌을 주는 경우가 많다”며 “법원 내외에서 주요 보직을 거치거나 실력과 인품을 인정받아 온 사람들이 많기에 인재들이 빠져나간다는 인상이 더 심화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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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초구 대법원의 모습. 뉴시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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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정원법이 10년째 제자리걸음인 상태에서 법원에 남은 판사들은 과중한 업무를 떠안게 됐다. 2023년 사법연감에 따르면 지난해 법관 1인당 처리 사건 수는 1심 판사의 경우 503건에 달했다. 2심 판사는 95건, 대법관은 4083건이었다. 해외와 비교해도 압도적으로 처리 사건 수가 많다. 대법원에 따르면 2019년 기준 판사 1명이 한 해에 처리하는 사건 수는 독일 89건, 프랑스 196건, 일본은 151건이었다. 반면 같은 해 한국 법관 1명당 사건 수는 464건으로 집계됐다.
안경준 기자 eyewher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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