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kimsphoto@hanmail.net)]
지난 글(연재 34)에서 피고측 변호사들이 지연 전략을 쓰면서 재판의 피로감을 높이면서 피고들에게 무죄 판결이 내려지길 바랐다고 썼다. 하지만 재판 결과는 그들이 바라던 대로 나오진 않았다. 도쿄 재판에서 A급 전쟁범죄 피고 28명 가운데 7명이 사형 언도를, 아라키 사다오(대장)를 비롯한 16명이 종신형을 받았다. 나머지 5명 가운데 2명이 유기금고형, 2명은 판결 전 사망, 1명(오카와 슈메이)은 재판 도중에 풀려났다.
6 대 5 판결, 1표 차이로 죽은 히로타
도쿄제국대학에서 인도철학을 전공한 극우 선동가 오카와 슈메이는 일제의 ‘대동아공영권’ 허상을 요란스럽게 부추겼던 자다. 패전 뒤 A급 전범으로 붙잡힌 그는 도쿄재판 첫날 법정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도조의 바로 뒷자리에 앉았다가 도조의 대머리를 손바닥으로 내리쳤기 때문이었다. 그런 일이 있은 뒤 법정에 불려나오지 않았고, ‘매독 부작용으로 비롯된 정신이상’ 판정을 받아 풀려났다. 교활하기 그지없었던 오카와가 지어낸 꾀병이었다는 얘기도 들린다. 1948년 12월23일 교수형으로 처형된 7명은 다음과 같다.
△전시내각의 우두머리였던 도조 히데키(대장), △난징 학살의 주역이었던 마쓰이 이와네(중지나방면군 사령관, 대장), △1931년 관동군 참모장으로 만주 침략 음모를 꾸몄던 이타가키 세이시로(조선군사령관, 육군대신, 대장), △오랫동안 중국에서 공작활동을 폈던 특무기관장 출신으로 동남아 침략을 이끌었던 도이하라 겐지(제7방면군 사령관, 대장), △마쓰이 사령관 밑에서 부참모장으로 난징 학살에 관계했고 필리핀을 침공했던 무토 아키라(필리핀 제14방면군 참모장, 중장), △‘버마의 학살자’란 악명을 지닌 기무라 헤이타로(버마방면군 사령관, 대장), △외교관 출신의 히로타 고키(전 총리, 외무대신).
사형수 7명 가운데 해군 장성은 하나도 없다. 6명은 육군 고위 장성들이고, 히로타 고키(広田弘毅) 혼자 외교관 출신이었다. 소련 주재 일본대사(1928-1932), 외무대신(1933)을 거쳐 총리(1936-1937)를 지내면서 일본의 침략전쟁에 나름의 책임이 있지만, 일본 군부의 강경파들을 상대하느라 마음고생을 했다.
군 출신이 아닌 히로타의 사형 판결을 두고 말들이 많았다. 네델란드 출신 버트 뢸링 판사는 그의 ‘소수의견서’에서 히로타는 무죄라고 주장했다. 도쿄 재판에서의 형량은 판사 11명의 과반수 찬성으로 정해졌다. 판사 11명 가운데 5명은 히로타 사형을 반대했다. 한 표 차이로 히로타의 운명이 엇갈린 셈이었다.
사형 확정되자 자살 막으려 감시 강화
A급 주요전범자들을 가둔 스가모 감옥의 미군 감시병들은 구치소장의 지휘를 받지 않았다. 미군 헌병대장 A,S. 켄월시의 지휘를 받았다. 헌병대장은 맥아더 사령부에 직접 보고하고 지시를 받았다. 수감 초기와는 달리, 재판 후반부엔 이들 주요전범들은 대하는 감시병들의 태도가 확 부드러워졌다. 도쿄재판의 11인 판사 가운데 1명이었던 메이루아오는 훗날 유고로 남긴 책에서 그 무렵의 분위기를 이렇게 전하고 있다.
[스가모 구치소 안에서 피고들에 대한 그(헌병대장 켄월시)의 태도는 상냥했을 뿐만 아니라 요구하는 대로 다 들어주었다. 거물 죄수들에 대한 그의 보살핌은 눈물겨울 정도로 빈틈이 없었다. 재판이 종결될 무렵 피고들은 그에게 3m 길이의 매우 정교하게 표구가 된 감사장을 모두의 친필을 담아 그에게 주었다. 감사장에는 낯간지러운 문구들로 가득했다](메이루아오, <도쿄전범재판: 중국 대표 법관의 미완성 기록> 민속원, 2019, 134쪽)
1948년 11월12일 도쿄 법정에서 교수형이 확정되자, 다시 감시는 강화됐다. 독일의 헤르만 괴링처럼 처형을 바로 앞둔 날 밤에 신발 밑창에 숨겨두었던 독극물(청산칼륨)을 마시고 죽은 사실도 영향을 끼쳤다. 미국인들이 보기에 ‘일본인들은 할복을 비롯해 자살을 미화하는 민족’이라 여겼기에 감시를 소홀히 하기 어려웠다. 담배는 줘도 성냥은 주질 않았다. 구치소 안 마당 산책도 엄격하게 통제됐다. 마당 한 가운데에 판자를 깔아놓고 그 위를 걸어 다니게 했다. 혹시나 마당에 버려진 못이나 유리로 자해를 할지 모른다는 걱정에서였다.
▲ 야스쿠니 신사는 전범자들을 호국영령으로 받들면서 일본 극우의 정신적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김재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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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황 폐하 만세'와 '대일본제국만세' 삼창
도조를 비롯한 7명의 교수형 집행은 1948년 12월22일 밤 12시 가까이부터 시작해 23일 새벽에 끝났다. 미군 작업복을 입고 처형장으로 끌려가는 죄수들의 등과 어깨에는 죄수(prison)를 뜻하는 영문 대문자 P자가 박혀 있었다. 양쪽 발목에는 족쇄가 채워져 두 명의 덩치 큰 미군 병사가 죄수를 끌고 갔다. 뉘른베르크 처형 때는 카메라맨이 처형 장면을 찍었는데, 도쿄 처형에선 따로 카메라맨을 들이지 않았다.
4명이 먼저 처형장으로 끌려갔다. 도조 히데키, 마쓰이 이와네, 도이하라 겐지, 그리고 무토 아키라였다. 이들 4명은 처형장에서 ‘천황 폐하 만세’와 ‘대일본제국만세’를 세 번씩 함께 외쳤다. 두 손이 묶여 있어 손을 떨어뜨린 채였다. 첫 처형이 이뤄진 것은 오전 0시 1분. 그 뒤로 나머지 3명의 교수형 집행이 이어졌다.
맥아더 사령부의 보도부는 오전 1시에 형 집행이 끝났다고 발표했다. 오전 2시5분 미군 트럭 2대가 7명의 관을 싣고 스가모 구치소를 빠져나왔다. 목적지는 요코하마의 시립 구보야마 화장장이었다. 오전 8시쯤 화장을 마친 유골은 미군 수송기에 실려 요코하마 동쪽으로 30마일(48㎞)쯤 떨어진 태평양에 뿌려졌다. 이런 내용을 담은 문서는 당시 현장 책임자였던 미군 소령이 쓴 ‘전쟁 범죄인의 처형과 시신의 최종 처분에 관한 상세 보고’라는 제목의 문서로,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 보관돼 있다.
유골 빼돌려 비석 세우고 군신(軍神) 추앙
유골을 유족에게 전해주지 않은 것은 뉘른베르크 재판 때와 마찬가지였다(헤르만 괴링을 비롯한 11명의 시신은 화장된 뒤 뮌헨 가까운 이자르 강의 콘벤츠 지류에 뿌려졌다). 처형장에 입회를 했던 교회사 하나야마, 그리고 변호사들이 나서서 유골을 돌려달라고 했지만, 그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지만 미군 몰래 일부나마 유골이 빼돌려졌다.
도쿄재판의 변호사였던 산몬지 쇼헤이, 요코하마의 구보야마 화장장 대표, 요코하마의 절 주지 등 3인은 처형 다음날 소각장으로 가서 남은 유골을 긁어모았다. 그 유골은 시즈오카현 아타미시 이즈 산에 있는 관음상에 감춰졌다. 그 관음상은 마쓰이 이와네가 난징학살에 책임을 지고 붙잡히기 전에 중국인들에게 속죄를 한답시고 세웠던 것이다.
유골이 7명의 전범 가족들에게 조금씩 나뉘어 전해진 것은 1952년 4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발효(조인은 1951년 10월)로 피점령국 일본이 미국으로부터 ‘독립국’이 된 뒤였다. 미국이 우려했던 일은 그 뒤에 벌어졌다. 1959년 관음상이 있던 이즈 산에 ‘7사(士)의 비’가 세워졌고 전범들은 군신(軍神)으로 받들어졌다.
같은 전범 출신인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1878-1967)가 이 비석에 서명을 했다(1930년대에 이탈리아와 영국 주재 일본 대사였던 요시다는 패전 뒤 A급 전범으로 감옥에 갇혔다가 재판 없이 풀려난 뒤 미국의 눈에 들어 일본 총리를 오래 지냈다). 1960년엔 아이치현 하즈초 산가네산 국립공원 꼭대기에 ‘순국 7사의 비’가 세워졌고 유골도 일부나마 이곳에 묻혔다. 그때도 요시다 시게루가 나서서 도왔다.
미군이 전범 7명을 처형·화장한 뒤 유골을 비행기에 실어 바다에 뿌린 것은 일본의 추종자들이 전범들의 묘소를 만들고 추모집회를 여는 등 훗날의 불씨를 만들지 않으려는 뜻에서였다. 그럼에도 추종자들은 소각장을 파헤쳐 유골의 일부를 모아 몰래 감춰 두었고, 비석까지 세우며 ‘순국 7사’니 어쩌니 하며 호국영령의 군신(軍神)으로 받들어 모셨다.
전범자가 순난자(殉難者)이자 호국영령?
전범 추앙의 끝판은 1978년 가을 야스쿠니신사(靖国神社)의 제신(祭神)으로 둔갑하게 된 일이다. 1948년 12월 처형된 지 30년 만에 ‘쇼와 순난자’(昭和殉難者)란 이름으로 야스쿠니에 합사(合祀)된 A급 주요전범자는 모두 14명(도조 히데키를 비롯해 교수형으로 처형됐던 7명, 재판 도중에 병으로 죽은 2명, 판결 뒤 감옥에서 병으로 죽은 5명).
일본 국민의 싸늘한 여론도 여론이지만 세계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기에, A급 주요전범자들의 합사 사실을 처음엔 쉬쉬 했다. 하지만 다음해인 1979년 그런 사실이 알려졌고, 지금껏 논란을 빚어왔다. 야스쿠니엔 이들 A급 전범들뿐 아니라 BC급 전범자로 처형된 948명을 포함해, 약 1000명의 전범들이 제신으로 합사돼 있다.
전몰자 명단인 영새부(靈璽簿)에 이름이 오르면 지난날 전쟁범죄자의 이미지는 희석되고, 호국영령이자 제신이 된다. 그런 마법이 통하는 곳이 야스쿠니다. 도조 히데키를 비롯한 전범자들이 제신으로 모셔졌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일본 안에서도 비난여론이 높았다. 이들을 야스쿠니가 합사를 철회하고 다른 데로 옮겨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하지만 야스쿠니 신사 쪽에서는 ‘그럴 수 없다’고 손을 내저었다. 야스쿠니 책임자인 마쓰다이라 나가요시 궁사(宮司)의 말을 들어보자.
"그것은 절대로 못한다. 신사에는 자리(座)라는 것이 있다. 신이 앉는 방석이다. 야스쿠니에는 다른 신사와는 달리 '자리'가 하나밖에 없다. 250만 주의 영령이 하나의 방석에 같이 앉아 있다. 그것을 떼어낼 수는 없다"(다카하시 데쓰야, <결코 피할 수 없는 야스쿠니 문제> 역사비평사, 2005, 72쪽).
그러면서 마쓰다이라 궁사는 '일단 혼령을 신으로 모시고 나면 빼낼 수 없다'고 못 박은 야스쿠니의 교의(敎義)를 들먹였다. 야스쿠니엔 청일전쟁, 노일전쟁을 거쳐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에 이르기까지 여러 전쟁의 전몰자 246만 명이 등록돼 있다. 전범 합사와 더불어 야스쿠니의 또 다른 문제는 조선인 출신 전몰자 2만1000여 명이 타이완 출신 전몰자 2만8000여 명과 함께 합사돼 있다는 사실이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안 한국·타이완 유족들이 합사에서 빼내달라고 요구하고 소송도 했지만 헛일이었다(본 연재 9와 10 참조).
▲ 8.15를 맞아 극우대원들이 야스쿠니 신사로 몰려들었다. 욱일기를 든 구 일본군 차림의 대원과 철십자훈장을 가슴에 단 나치독일 군복의 대원. Ⓒ김재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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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조 외손녀, "분사는 타국의 간섭에 굴복하는 것"
마쓰다이라 궁사는 정치적인 배려 때문에 합사를 철회하고 다른 데로 분사(分祀)한다는 것은 ‘신을 제사 지내는 일에 대한 모독’이라 했다. 일본 국왕을 절대자로 받드는 황도주의의 심장부인 야스쿠니 책임자가 '모독' 운운하고 있지만, 그야말로 궤변이나 다름없다. 야스쿠니가 호국영령으로 받들어 모시는 전범자들이 어떤 자들인가. 그들이 일으켰던 아시아·태평양전쟁으로 2,000만 명 이상이 죽고, 위안부 ‘성노예’와 강제동원 등으로 숱한 사람들이 고통을 겪었다. 야스쿠니가 전쟁범죄의 가해자들을 제신으로 받드는 것은 그 수많은 희생자들을 그야말로 모독하는 것이다.
야스쿠니 전범 합사를 바라보는 동아시아 사람들의 눈길은 싸늘하다. 그런 부담 때문일까, 전범자 유족들이 ‘야스쿠니 합사에서 빠지겠다’는 움직임을 편 적도 있다. 도조 히데키와 함께 교수형을 받았던 7명의 주요전범 가운데 하나인 이타가키 세이시로(전 조선군사령관, 육군대신, 대장)의 유족인 이타가키 다다시 참의원의원이 앞장섰다. 1985년 그는 합사철회를 바란다는 내용이 적힌 서명부를 들고 유족들을 두루 만났다. 그 결과 6명의 유족들이 서명을 했지만, 1명의 유족은 동의하지 않았다. 다름 아닌 도조 히데키의 유족이었다. 도조의 유족을 대표해 외손녀 도조 유우코는 이런 궤변을 늘어놓았다.
"숙부(도조 히데키의 차남 도조 데루오)는 ‘육친의 정 때문에 분사(分祀)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타국의 간섭에 굴복하는 형태로 분사하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는 편지를 보내왔다. 합사 철회는 도쿄재판이라는 승전국의 일방적인 단죄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면 한결같이 일본국과 가족만을 생각하며 사라져간 246만 영령을 볼 낯이 없다"(다카하시 데쓰야, 73-74쪽).
'영령을 볼 낯이 없다'는 말은 외손녀 유우코의 혼잣말이 아니다. 일본 극우들이 입에 달고 사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전사자는 국가 안보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싸우다 죽었기에 그 죽음을 추모한다. 때로는 종교행사에서 전사자의 넋을 기리는 추도가 이뤄지기도 한다. 하지만 야스쿠니에선 전사자의 영령이 신(神)으로 높이 받들어진다. 그리곤 ‘영령을 볼 낯이 없다’는 것이 침략전쟁의 명분으로 내세워진다. 이와 관련한 이시다 다케시(도쿄대 명예교수, 일본정치학)의 글을 보자.
[일본의 경우에는 '영령'으로서 전사자 자체가 신으로 여겨진다. 그 결과 평화를 구하고 전쟁 확대를 비판하는 목소리는 '영령'의 이름으로 봉쇄된다. 청일·러일전쟁 이래 중국대륙에서 피를 흘린 ‘영령’에게 죄송하다는 구실 아래 중국침략의 군사행동을 해왔다. 그리고 아시아·태평양전쟁 직전의 미일교섭 때 중국으로부터의 철병 조건을 거부하게 한 것도 군이 주장하는 ‘영령에게 뵐 면목이 없다’라는 논리였다](일본의 전쟁책임 자료센터, <야스쿠니 신사의 정치> 동북아역사재단, 2011, 35쪽).
도쿄 재판의 최대 결함은 히로히토 불기소
1978년 도조 히데키 등 A급 전범자들이 야스쿠니 제신으로 모셔지자, 히로히토는 이에 불만을 품고 1989년 죽을 때까지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끊었다. 일본군 대원수 직함을 지닌 히로히토는 어전회의에서 진주만 공습을 비롯한 일본의 침략전쟁을 최종 재가했었다. 침략전쟁의 주범인 히로히토를 도쿄 재판에서 감싸며 그의 전쟁범죄 책임을 끝까지 입에 담지 않고 죽었던 부하들은 지하에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우린 주군으로부터 버림 받은 희생양”이라며 히로히토의 냉혹함을 탓하지 않았을까.
도쿄 재판의 가장 커다란 결함을 꼽자면, 전범 총책인 히로히토의 불기소다. 미국의 일본 점령정책은 일본을 안정적으로 다스리면서 친미 반공국가로 만든다는 것이었다. 히로히토를 기소할 경우 생겨날 혼란을 미국은 바라지 않았다. 하지만 전범 총책 히로히토의 불기소는 많은 논란과 비판을 받았다. 먼저 도쿄 극동국제군사재판을 맡았던 판사진에서 불만이 쏟아져 나왔다(본 연재 7 참조).
도쿄 전범재판을 맡았던 11인 판사 가운데 프랑스에서 파견된 베르나르 앙리 판사는 ‘전쟁을 선포했던 주범은 도망가고 종범들만 처벌받게 되었다는 것은 부끄러운 현실’이라 한탄했다. 호주 출신의 재판장 윌리엄 웹도 히로히토의 불기소에 매우 비판적이었다. 그는 히로히토를 가리켜 ‘검찰에게 면죄부를 받은 범죄단체의 두목과 같다’고 비난했다. 프랑스 언론인 에드워드 베르가 히로히토의 됨됨이를 비판적으로 분석한 책에서 관련 대목을 옮겨본다.
[연합국(미국)의 이해를 최대한 고려해서 천황의 면책이 결정되었다는 주장을 반박한 웹 재판장은 "세상의 어떤 통치자도 야만적인 전쟁을 일으킬 권리를 갖고 있지 않다. 또 전쟁의 책임을 물었을 경우 그 통치자의 신변이 위험해지기 때문에 범죄적 행위에 대해서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고 강하게 항의했다](에드워드 베르, <히로히토, 신화의 뒤편> 을유문화사 2002, 496쪽).
“도쿄 재판은 교훈과 학습의 장이 못 됐다”
히로히토 일왕의 불기소뿐 아니다. 도쿄 재판에서 이시이 시로 중장을 비롯한 일본의 세균전쟁 범죄자들을 아예 기소조차 되지 않았다. 악명 높았던 731부대 관련자들은 미국에게 세균전 자료를 건네주는 조건으로 면죄부를 받았다. 1948년 12월23일 전범자 7명을 처형한 다음날 크리스마스를 맞아 스가모 구치소에서 제2차 도쿄 전범재판을 기다리던 주요 전범 17명은 불기소 처분으로 모두 풀려났다.
그렇게 도쿄 재판은 흐지부지 끝났다. 하종문(한신대, 일본근대사) 교수는 일본의 양심적인 사학자 아라이 신이치(荒井信一, 1926-2017)를 추모하는 글「세계·일본·한국을 잇는 역사화해: 아라이 신이치」에서 히로히토 불기소와 나머지 전범 석방으로 말미암아 도쿄 전범재판이 일본인들에게 ‘교훈과 학습의 계기’가 되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하교수의 글을 보자.
[도쿄 재판은 1948년 말 도조 히데키 등 7명의 사형 집행과 더불어 종결되고, 구치소에 수감 중이던 전범 용의자들에게는 석방 명령이 내려졌다. 이렇듯 3년 남짓한 재판 과정은 물론 그 결말조차 미완이었다. 무엇보다 보통의 일본인들이 전쟁을 되돌아보고 반성하도록 하는 교훈과 학습의 계기가 되지 못했다. 우익적 입장에서 보면 부당한 ‘승자의 재판’이었고, 좌익 쪽에서는 최대의 전범인 천황을 면책한 불충분한 결말이었다. 좌도 우도 도쿄 재판을 전면 긍정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지 못했다](서종진·하종문 외, <근현대 지식인과 한일 역사화해> 동북아역사재단, 2020, 70쪽).
일본인의 집단적 책임은 없나
지난 글에서, 패전 뒤 많은 독일인들이 뉘른베르크 재판을 긍정적으로 바라본 데엔 ‘집단적 죄의식’으로부터의 해방감이라는 심리적 요인이 자리 잡고 있음을 살펴봤었다. 헤르만 괴링을 비롯한 독일 지도자들이 나치 독일이 저질렀던 전쟁범죄의 책임을 뉘른베르크 법정에서 짊어짐으로써, 집단적 책임이란 부담을 지녔던 독일의 일반 시민들은 ‘나는 그 범죄로부터 자유로워졌다’는 생각을 품었다(본 연재 33 참조).
같은 패전국이었던 일본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8.15 야스쿠니 취재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읽은 8월17일자 <요미우리(讀賣)신문>에는 도쿄재판이 벌어질 당시 일본인들의 반응이 어땠는지에 대한 우시무라 케이(국제일본문화센터, 역사학) 교수의 코멘트가 실려 있다. 내용은 이러하다.
"대다수 일본인은 군·정치 지도자의 전쟁범죄를 심판하는 점령정책으로서의 도쿄재판이 지닌 의미를 알지 못했다. 재판에서 밝혀진 사실이 보도돼도 하루하루의 삶에 한껏 관심을 기울일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도쿄재판은 연합국에 대한 전쟁범죄를 재판하는 자리였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직면한 고통스런 삶을 야기했던 ‘패전의 책임’을 자신들을 대신해서 추궁해 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讀賣新聞, 2023년 8월17일).
일본 보수성향의 언론사인 요미우리에 실린 글이지만, 일본의 보통사람들이 느꼈던 감정은 패전 뒤 독일의 시민들이 느꼈던 감정과 다르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전쟁 후반부 겪었던 고통스런 상황에서 비롯된 피해의식, 전범국가 시민으로서의 집단적 죄의식이 뒤섞인 상태에서 전범재판을 바라보면서, 전쟁지도자들의 처벌로 "나는 자유로워졌다"는 일종의 안도감을 느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나치 히틀러 정권을 지지했던 독일인들이 전쟁범죄의 하수인이자 공범자였듯이, 전쟁 초기 잇달아 들려오는 승전 소식에 열광했던 일본의 보통사람들도 전쟁범죄의 하수인이자 공범자였다. 하지만 히로히토가 불기소되는 것을 보면서 많은 일본인들은 "전쟁의 총책임자인 히로히토가 책임을 지지 않았으니, 내가 책임의식을 느낄 필요는 없다"는 생각을 품기 마련이다.
▲ 야스쿠니 신사 바로 옆 전쟁박물관(유슈칸)에서 군신으로 받드는 전범들. 오른쪽부터 도조 히데키, 우메즈 요시지로 전 육군참모총장, 난징학살 책임자 마츠이 이와네 대장. Ⓒ김재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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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재판으로 끝났다. 더 이상 사과할 일 없다"
특히 패전 뒤에 태어난 일본인들이 지난날 일본의 침략전쟁에 대해 어느 정도의 책임을 져야 하는가는 논란거리다. 전후세대에게 도조 히데키의 전쟁범죄를 사과하라고 하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을 수도 있다. 코케츠 아츠시(야마구치대, 일본근현대사) 교수 같은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들은 일본의 전후세대가 직접적인 ‘정치적 책임’을 지는 것은 아니더라도, 역사적 문맥에서 ‘도의적 책임’을 져야 한다고 여긴다.
코케츠 교수는 독일의 예를 들면서, 독일 언론인인 랄프 지오르다노의 글에 공감을 나타낸다. 지오르다노는 나치 히틀러 집단이 저질렀던 죄를 ‘제1의 죄’라 일컫는다면, 그 죄를 묵인·은폐·왜곡·부정하려는 행위는 ‘제2의 죄’라 했다. 전후 독일에선 네오 나치를 비롯해 히틀러의 전쟁범죄를 옹호하는 목소리들이 줄곧 문제가 돼왔다. 심지어 '유대인 홀로코스트는 없었다'는 극단적 주장도 튀어나왔다. "난징 학살이나 위안부 '성노예'가 없었다"고 우기며 전쟁범죄를 부인하는 일본 극우의 목소리는 독일보다 훨씬 더 크다. 코케츠는 이런 일본의 현실에 대해 비판적이다.
[일본과 비교해서 훨씬 더 철저히 과거의 극복에 대한 노력을 쌓아가는 독일에서조차 제2의 죄가 논의되고 있다. 일본의 경우 빈약하기 그지없는 역사인식으로 인해 전쟁책임이 애매하게 되어, 전후책임 문제는 (미국의 공습과 원폭 투하로 비롯된) 피해를 강조하며 매몰되고 있는 느낌이다](코케츠 아츠시, <우리들의 전쟁 책임>, 제이엔씨, 2013, 251쪽).
문제는 일본의 극우세력의 교활한 역사인식이다. 이들은 도조 히데키를 비롯한 전범 처형은 ‘승자의 정치재판으로 잘못된 일’이지만, 일단은 도쿄 재판으로 전쟁범죄에 얽힌 '일본의 과거사는 청산됐다'고 주장하면서, '일본의 전후 세대가 언제까지 지난날의 전쟁 때문에 추궁 받아야 하느냐'고 되묻곤 한다. 그러면서 일본의 전쟁범죄를 반성적으로 돌아보자는 양심적 지식인들의 자성(自省)사관을 자학(自虐)사관으로 몰아붙이기 일쑤다.
지난 8월15일 도쿄 야스쿠니 신사에서 만났던 일본 극우대원들은 이런 구호들을 외쳐댔다. "도쿄 재판으로 끝났다. 더 이상 사과할 일 없다." 이들은 나아가 히로시마·나가사키에 떨어졌던 원자폭탄을 들먹이며, '우리는 전쟁 피해국민'이라 주장했다. 일본이 전쟁 피해국이냐는 매우 논쟁적인 주제다. 일본이 저질렀던 가해의 무게에 견주면 작은 게 사실이지만, 터무니없다며 내칠 수만은 없다. '일본=전쟁피해국' 논리에 대해선 1945년 미국의 도쿄 대공습과 원자폭탄 문제를 다루면서 좀 더 살펴보려 한다. (계속)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kimsphot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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