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스마트폰 화면으로 보는 만화가 일상인 세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가락 사이로 책장을 끼워가며 읽는 만화책만의 매력을 잃을 수 없지요. 웹툰 '술꾼도시처녀들', 오리지널 출판만화 '거짓말들'의 만화가 미깡이 <한국일보>를 통해 감동과 위로를 전하는 만화책을 소개합니다.하람 작가의 자전적 만화 ‘쉼터에 살았다’는 가정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쉼터의 문을 두드리게 된 과정을 솔직하게 담아냈다. 문학동네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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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언제 적 일인데 아직도 얘기해? 다 지난 일이잖아.”
슬픔에 오래 잠겨 있거나 트라우마를 호소하는 이들에게 세상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잔인하고 냉담하다. 과거에 그만 좀 얽매여 있으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라고. 다 마음먹기 달린 거 아니냐고. 트라우마에 대한 이해 부족 아니, 이해를 하려고도 않는 무관심의 소치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트라우마에 의해 인간은 꿰뚫린다. (…) 트라우마에 관한 한 우리는 주체가 아니라 대상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나는 트라우마를...’이라는 문장은 애초에 성립될 수 없다. 우리는 오직 ‘트라우마는 나를...’이라고 겨우 쓸 수 있을 뿐이다.”
‘내가’ 트라우마를 조절할 수 있는 게 아니라 트라우마가 ‘나를’ 붙들고 있는 건데 ‘그 얘기 듣는 거 이제 지겹고 불편하니까’ 알아서 잘 관리하든가 입 닫고 살라는 말은, 생존자를 더욱 고립시키고 고통스럽게 만든다. ‘그런가? 다들 잘 이겨내는데 나만 이상한 건가? 나 같은 건 역시 사라져야 모두가 편해질까?’
쉼터에 살았다(전 2권)·하람 지음·문학동네 발행·296, 300쪽·각 1만7,000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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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적 만화 ‘쉼터에 살았다’의 하람 작가가 오랫동안 혼자 되뇌었던 질문, 아니 절규다. 작중 나이 22세의 하람은 어릴 때부터 가정폭력에 시달렸다. 일찌감치 웹툰 작가로 데뷔하고 원하던 대학에도 들어갔지만 트라우마로 인한 우울증과 무기력증 때문에 학업도 일상생활도 제대로 해낼 수 없었다. 사과를 받길 바랐을 뿐인데 지난 일을 왜 계속 들추냐는 날 선 반응만 돌아온다. 폭력을 피해 세 번째로 가출해 고시원에서 위태롭게 살고 있던 중 청소년 보호시설 ‘쉼터’의 존재를 알게 된 하람은 용기를 내서 입소한다. 이 작품은 작가가 쉼터에서 보낸 3개월 동안의 일상을 진솔하고 담백하게 담고 있다.
상처를 건드릴까 봐 서로 묻지 않는 게 암묵적인 룰이지만 대화를 나누다 보면 쉼터의 아이들이 대개 엇비슷한 사정을 가졌다는 걸 알 수 있다. “집 나오면 개고생”인 걸 알면서도 나올 수밖에 없던 아픈 사정들. 아이들은 폭력과 폭언이 없는, 안전하고 따뜻한 쉼터에서 잠시나마 숨을 돌리는 중이다. 매일 정해진 규칙을 지키고 자신을 돌보는 법도 배운다. 가해자들이 반성하고 변한다면 다시 집으로 돌아가고도 싶다.
만화는 가정폭력 등으로 아이들을 쉼터로 내몬 가해 어른이 아니라 오히려 피해 청소년에게 부정적 시선이 집중되는 현실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문학동네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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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잘못을 인정하는 가해자는 극히 드물고 ‘가출 청소년’이라는 꼬리표는 이들을 계속 불안하고 두렵게 한다. 세상의 편견을 접한 하람은 쉼터에 대한 만화를 그리기로 마음먹는다. 도움이 절실한, 벼랑으로 내몰리는 아이들에게 쉼터라는 선택지도 있음을 알려 주고 싶어서다. 집이 나를 죽게 할 것 같으면 그 집을 나오라고, 집이 아니어도 갈 곳이 있다고, 또한 우리가 겪은 일은 가해자의 잘못이지 우리 잘못이 아니라고, 그러니 내일을 살아가자고 말이다. 같은 아픔을 가진 이들에게 힘이 되어주는 작품이지만 경험의 여부를 떠나서 모두가, 특히 어른들이 이 책을 꼭 읽으면 좋겠다.
미깡 (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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