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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6 (화)

이슈 '위안부 문제' 끝나지 않은 전쟁

'친일파' 하버드 교수 "위안부, 성노예 아닌 돈 위한 자발적 매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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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kimsphoto@hanmail.net)]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는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의사를 묻지 않은 밀실 합의였다. 그래서 끝내 실패로 막을 내렸고 두 나라 사이의 긴장만 커졌다. 2023년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한 제3자 변제 방안도 논쟁 선상에 있다. 피해 당사자들의 반발도 2015년 판박이다. 분명한 것은 둘 다 일본 쪽으로서는 정치적 승리, 그것도 대승을 거두었다는 점이다.

특히 2015년 '위안부' 합의는 '최종적·불가역적 해결'과 '국제사회에서 비난·비판 자제'라는 약속을 한국 정부로부터 받아냈기에 큰 문제가 됐다. 한국 박근혜정부의 어설픈 합의에 불만을 지닌 피해자 할머니들과 유족들의 입에 재갈을 물릴 수 있게 된 것은 일본으로선 엄청난 성과라면 성과였다.

그러면서 우려했던 일들이 벌어졌다. 일본 정부는 국제사회에선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부정하는 쪽으로 낯 두꺼운 모습을 보여 왔다. 한일 위안부 합의 바로 직후인 2016년 2월16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UN여성차별철폐위원회 회의에서는 일본 대표는 '위안부 강제연행 사실을 확인할 수 없다. 성노예는 사실에 어긋난다'라고 주장했다. 그 무렵 일본 외무성 홈페이지에는 일본군 위안부의 전쟁범죄적 성격을 아예 부정하는「위안부 문제」라는 이름의 문건이 실리기도 했다.

"위안부는 일본군과 계약 맺은 매춘부"

일본군 '위안부' 성노예를 비롯한 일본의 전쟁범죄를 둘러싼 한·일 역사전쟁은 쉽게 끝날 일은 아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내고, 또한 교과서에 어떻게 반영할 것인가를 비롯해 여러 사안들이 남아있다. 이 민감한 역사전쟁에 염치없이 끼어든 미국인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문제의 인물은 '위안부는 매춘부'라는 망언으로 논란을 부른 존 마크 램지어(하버드대 로스쿨교수, 회사법). 그는 2020년 12월 네덜란드 출판기업 엘세비어가 발간하는 학술지 <법과 경제학 국제리뷰>에 「태평양 전쟁에서의 성의 계약」(Contracting for Sex in the Pacific War)이라는 제목의 8쪽 짜리 글을 보내 파문을 일으켰다.

이 글에서 램지어는 "일본군 위안부는 강제로 동원돼 성매매를 강요당한 성노예가 아니다. 일본군 위안부 여성들은 사적인 이익을 위해 일본군과 계약을 맺은 공인된 매춘부"라고 주장했다.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부가 여성들에게 성매매를 강제한 것은 사실이 아니며, 모집 업자의 꾐에 넘어간 피해자들은 극히 일부"라고도 했다. 그가 내린 결론은 '위안부는 성노예가 아니라 전쟁터에서 높은 보수를 받기 위한 자발적인 매춘'이다. 학술지 웹사이트에 실린 램지어 논문 맨 앞에 실린 '요지'(Abstract)를 옮겨보면 아래와 같다.

[위안소(comfort stations)라고 불리는 전시 윤락업소를 둘러싼 한국과 일본 사이의 장기적인 정치적 분쟁은 그와 관련된 계약을 모호하게 만든다. 위안소 주인들과 매춘부 사이의 계약은 게임 이론(game theory)의 기본인 '신뢰할 수 있는 약속'(credible commitments)의 간단한 논리를 담고 있다. 위안소 주인들은 매춘부 직업에 대한 위험과 평판 손상을 상쇄할 만큼 충분히 관대한 계약을 맺었다. 그래서 (i)1년 또는 2년의 최대 기간으로 계약을 체결하고, (ii)충분한 수익을 창출하면 여성이 일찍 떠날 수 있도록 했다](International Review of Law and Economics, Volume 65, March 2021).

"전범기업 돈으로 딴 하버드대 교수 자리 이용했다"

일본 회사법 전공자인 램지어는 생뚱맞게 '게임 이론'을 들먹이며 문제의 망언을 펼친다. '위안부' 성노예로 끌려간 여성들이 마치 자유로운 계약관계를 맺고 자발적으로 매춘업 종사자('신친일파'들이 입에 달고 사는 용어로는 '성 노동자')가 됐고, 계약기간이 끝나면 언제라도 떠날 수 있다는 듯이 썼다. 진실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얘기다.

'위안부=성노예라는 이야기의 본질은 완전한 허구'라는 램지어의 주장은 일본 극우파들이나 한국의 '신친일파'들이 늘 해오던 것이라 전혀 새롭지 않다. 학문적 엄밀성의 잣대로 보면, '논문'이라 하기엔 수준이 떨어지는 미국인 친일파의 '망언록'이다. 문제는 하버드 대학교수라는 직함 지닌 자가 그런 글을 썼으니, '위안부는 성노예는 아니라 성노동자'라는 뒤틀린 신념을 지닌 일본의 극우파들에겐 너무나 반갑고 큰 힘이 됐다는 것이다.

램지어의 글은 지난날 '위안부' 성노예로 고통 받았던 희생자들을 2차 가해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기에 많은 국민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그의 공식 직함이 하버드대 '미쓰비시 일본법학 교수'(Mitsubishi Professor of Japanese Legal Studies)라는 것도 논란거리다. 미씨비시는 알고 보면 일제 강점기 시절에 강제노동을 강요했던 전쟁범죄기업이다. 강제동원 희생자들이 미쓰비시를 상대로 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여러 건 걸었다. 일본 전범기업이 낸 기금으로 교수직에 채용된 친일분자가 일본의 전쟁범죄 과거사를 부정·왜곡하는 앞잡이로 나선 모습이었다. "전범기업 돈으로 딴 하버드대 교수 자리를 이용했다"는 비판이 그래서 나온다.

프레시안

▲램지어 하버드대 로스쿨 교수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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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케이, "위안부가 성노예 아닌 사실이 밝혀졌다"

도쿄대, 와세다대 등에서 강의를 했던 이력이 있는 램지어의 전공은 역사학이나 정치학이 아니다. 일본 회사법 전공으로, '위안부' 연구와는 거리가 멀다. 그는 18살까지 일본에서 살았고 일본 경제와 사회를 홍보한 공로를 인정받아 2018년 일본 정부로부터 욱일중수장(旭日中綬章) 훈장을 받았다. 이런 이력은 그가 그동안 일본의 이익을 위해 일해온 '뼛속까지 친일파'라는 점을 뜻한다.

램지어의 '논문' 소식이 알려지자 일본 극우파들은 박수를 쳤다고 한다. "한 건 해냈다"는 분위기였을 것이다. 하버드대 교수란 직함으로 쓰인 그의 글은 일본 정부와 극우파들의 유용한 선전거리를 제공한 셈이다. 2021년 1월 '논문'을 썼다는 사실을 처음 보도한 극우 성향 <산케이신문>의 기사가 벌써 선전 선동에 가깝다. '미국의 저명한 회사법 학자이자 일본 연구 대가이기도 한 램지어 교수'의 글로써 '위안부가 성노예가 아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넷우익' 극우 유튜버들은 '마땅한 일감이 없었는데 잘 됐다'며 램지어의 망언을 퍼 나르고 재탕 삼탕하며 그들 스스로를 '위안'하는 모습을 보였다.

램지어의 '논문'이 인터넷 홈페이지에 게시되어 공개된 것은 2020년 12월 1일로, 2021년 3월에 인쇄본으로 발간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문제의 글은 학술지에 인쇄돼 실리진 못했다. 전세계로부터 그의 글이 실려선 안 된다는 항의가 쏟아졌기 때문이었다. 한국은 물론 미국의 연구자들, 램지어가 적을 두고 있는 하버드대 학생들, 국제적인 인권단체들은 램지어의 글이 터무니없다고 비판했다.

나라 안팎에서 램지어의 망언을 놓고 쏟아진 비판은 당연하고도 자연스런 반응이라 볼 수 있다. 이를테면, 2021년 2월 미국 조지아 주립대 로스쿨 교수 3명은 <미시건 국제법 저널>에 '성노예제 계약의 오류'(The Fallacy of Contract in Sexual Slavery)라는 제목의 논문을 통해 램지어를 비판했다. 작성자는 한국계 이용식 교수, 일본계인 나츠 사이토 교수, 그리고 조나단 토드리스 교수 3인이다. 논문 요약을 우리말로 옮기면 아래와 같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70년이 넘었지만, 인류 역사상 가장 잔인한 전쟁의 트라우마는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전쟁범죄에 대한 책임을 부인하고 역사를 다시 쓰려는 부당한 시도들이 이어지고 있다. 램지어가 쓴 글은 일본에 의해 강제된 성노예제의 피해자들이 상당한 보상을 대가로 자유롭게 성매매에 참여하는 계약을 맺은 것처럼 잘못 특징짓고 있다. 이는 일본 정부와 군대가 저질렀던 잔혹한 인권침해의 책임을 부인하는 것이다](Michigan Journal of International Law, Vol. 42, No.2, 2021).

<위안부는 사기극> 책 내는 램지어의 오만함

램지어의 글에 대한 비판이 쏟아지자 <법과 경제학 국제리뷰> 편집자는 '우려 표명'(expression of concern) 상태로 해놓고, 2021년 3월 인쇄본엔 싣지 않았다. 하지만 램지어 파문 2년이 흐른 시점인 2023년 1월 문제의 학술지는 논문을 철회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 2년 동안 램지어의 논문에 대한 이른바 검증 작업이 있었다. 학술지 편집자는 역사학자 6명에게 '위안부' 동원과 관련된 1차 사료에 대한 해석을 잘못한 게 없는지 검증을 요청했다. 이 가운데 2명은 검증을 아예 못 하겠다고 했고, 나머지 4명은 '램지어의 논문에 학문적인 결함이 있다'는 검증 의견을 낸 것으로 알려진다.

그럼에도 엘세비어와 학술지 편집자는 '통계 조작, 위조 같은 윤리적 문제가 없다'면서 논문을 철회하지 않기로 했다. 다만 논문에 대한 '우려 표명'은 계속 유지하기로 했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자, 세계적인 비판여론과 검증단의 지적을 무시한 데 대한 비판이 쏟아졌다. (현재 대학 도서관 등 <법과 경제학 국제리뷰>와 협약을 맺은 기관을 통해 접속하면, HTML본과 PDF본으로 램지어의 글 원문을 볼 수 있다).

문제의 당사자는 '위안부는 성노예가 아니며 공인된 매춘부'라는 자신의 글이 일으킨 파문을 돌아보며, 겸허히 비판을 받아들였을까. 아니다. 2023년 11월엔 <위안부는 사기극>이라는 제목의 책을 출판할 것으로 알려진다. '위안부' 관련 글로 전쟁범죄에 대한 일본인들의 죄의식을 덜어주고 '위안'해준 램지어는 마치 자신의 망언 파문으로 일본의 영웅이 된 듯한 착각과 오만함이 그의 다음 말에서 묻어난다. 2021년 4월 일본의 우익단체인 '국제역사논전연구소'가 개최한 토론회에 보낸 영상 메시지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나는 역사를 성실하게 전달했을 뿐임에도 '젊은 조교수들'이 '스탈린주의적 수단'을 동원해 학문의 자유를 완전히 무시하고 학자에 대한 '암살미수'와 같은 행위를 저지르고 있다"

램지어 지키기 나선 <반일 종족주의> 이우연

지난 주 글에서, <반일 종족주의>의 필자 가운데 한 사람인 이우연(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의 친일 행각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는 컴퓨터 앞에 주로 앉아 있는 다른 '신친일파'와는 달리, 몸으로 때우는 '직업적 친일' 행위를 거듭해왔다. 수요집회를 방해하는 맞불 집회에서 "소녀상을 철거하라"는 구호를 외치거나, 일본 극우파의 금전적 지원 아래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UN인권이사회에서 "일제 식민지 시기에 강제동원은 없었다"고 주장하는 따위다.

이우연은 램지어 논문 망언이 파문을 일으키자, 2021년 3월6일 일본 극우 성향의 <산케이신문>이 발행하는 해외 선전지 <저팬 포워드>(Japan Forward)에 램지어를 옹호하는 글을 실었다. 한국의 '신친일파'가 미국 친일파를 구하기 위한 나선 셈이다. 이우연의 '램지어 구하기' 요점은 아래와 같다.

"(위안부 여성에게 성매매를 강제한 것은 사실이 아니며, 일본군과 계약을 맺은 공인된 매춘부라는) 램지어의 주장은 역사적으로 객관적 사실이다. 사실이 아니라는 증거를 제시하면 되는데 반일 종족주의자들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 왜냐 하면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한국 기자들은 램지어의 글을 읽어보지도 않고 비판하는 것으로 확신한다. 전시 위안부가 전쟁 전 매춘부보다 더 나은 금전적 대가를 받았다. 미국과 독일도 위안소와 같은 시설을 운영했는데 왜 일본군에만 문제가 되는가."

이우연이 말하는 '증거'는 차고 넘치니 더 얘기할 것도 없다. 사실 이런 망언적 주장은 새로울 것은 없다. 이우연이 여기저기서 늘 해오던 말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했다. 진실과도 거리가 멀다. 일본군이 '위안부' 강제동원과 성노예 착취에 깊이 개입돼 있다는 사실은 그동안 여러 연구자들이 힘들게 발굴해낸 일본의 공문서에 명확하게 드러났다. 또한 이미 본 연재에서 그런 사실을 거듭 살펴보았기에 이 대목에 대해서 다시 논박할 필요도 없다.

이우연은 <저팬 포워드> 기고문에서 '위안부' 문옥주 할머니는 '자신을 팔아넘긴 부모를 위안소 관리자보다 더 증오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미국의 역사학자인 에이미 스탠리(노스웨스턴대 교수, 일본사)는 "문옥주 할머니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왜냐면 결코 팔려간 적이 없었기 때문"이라 반박했다(여성가족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구술자료 재정리 자료집> 2016년 문옥주 편 참조 바람).

"여성의 고통을 헤아리는 공감 능력 없다"

이우연이 일본 극우 매체에다 '램지어 구하기' 류의 글을 실었다는 사실이 바로 국내에 알려지진 않았다. 스탠리 교수가 <저팬 포워드>에 실린 이우연의 글을 보고 이틀 뒤(2021년 3월8일) 하루 동안 무려 10개의 트윗을 올리면서였다. 하루에 같은 주제를 다룬 트윗 10개라면, 그녀가 얼마나 이우연의 망언적 주장에 속이 상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스탠리 교수의 트윗을 모아보면, 이우연의 글에 매우 비판적임을 알 수 있다.

"램지어를 옹호하는 이우연의 기고문은 '대응해서 중요한 것처럼 보이게 만들 가치도 없는 글'이다. (일본의 전쟁범죄 역사를 부인 또는 왜곡·축소하려는) 역사수정주의 학자들이 생존자 증언을 혼동하거나 오독하는 이유는 피해자들에 관해 신경 쓰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여성의 고통을 헤아리는 공감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 그들은 자신이 발견한 것을 맥락과 연결할 역사적 기술이 없고 그러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스탠리가 말하는 '공감 능력' 대목에선 본 연재 20회에서 살펴본 수전 손택의 '타인의 고통'이 떠오른다. 일본 안에서 램자이어의 글이 가져올 역풍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없진 않았다. 한국인들의 분노를 떠올리면, 마냥 기뻐하며 박수칠 일은 아니라는 얘기다. 그럼에도 일본 정부나 기업들이 친일 지식인들의 입을 빌려 과거사를 왜곡 미화하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미국이나 유럽에 세워진 소녀상을 없애려는 움직임도 마찬가지다. 이와 관련, 램지어 사태를 비판적으로 분석한 김창록(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법사학)교수의 글을 참고로 옮겨본다.

['국제학술지'에 실린 '하버드대 교수'의 '영어 논문'을 통해 주전장(主戰場)인 미국에서의 대승을 내심 기대했던 일본군 '위안부' 부정론자들의 욕망은 (학술지 인쇄 보류로) 허무하게 좌절되었다. 그럼에도 일본군 '위안부' 부정론이 조만간 종식될 것 같지는 않다. 때마침 아베 신조를 이은 스가 요시히데 정권이 2021년 4월 27일 '종군'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 피해자들이 강제 연행되었다거나 군의 일부였다는 오해를 불러올 수 있다는 이유로, 그냥 '위안부'라고 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각의 결정했다.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등의 문제제기를 받아들인 우익 정치인의 질의를 발판 삼은 결정이다. 재야의 우익과 일본 정부가 결탁하여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지우려하는 또 하나의 기도인 셈이다.](김창록,「램지어 사태―일본군 '위안부' 부정론의 추가 사례」역사비평 135, 2021 여름호).

이렇듯 램지어 '망언 논문' 사태는 끝이 아니다. 1회성이 그치진 않고 앞으로도 비슷한 일들이 되풀이될 것이다. 그 때마다 우리 국민들은 분노를 조절해야 하는 상황이 걱정스럽다. 제2, 제3의 램지어가 '한·일 역사전쟁'에 염치없이 끼어들어 한국인의 분노를 자극하지 않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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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3월 17일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제1483차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 기자회견에서 한 시민이 마크 램지어 하버드 로스쿨 교수를 비난하는 내용의 손 피켓을 들어 보이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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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년 전 친일파 미국인의 죽음

램지어 관련 글을 마무리하려니 문득 친일 행각을 벌이다가 조선인들 손에 죽은 한 친일파 미국인이 떠오른다. 1908년 3월23일 샌프란시스코 기차역에서 전명운 의사와 장인환 의사가 권총으로 쏴 죽인 더럼 스티븐스다. 미국 변호사 출신으로 주일 미국 공사관에서 일하다가 친일파가 돼 일본 외무성 고문으로 자리를 옮긴 스티븐스는 일본 전권대사 이노우에 가오루가 한성조약(1885)을 맺으러 서울에 왔을 때 따라왔다[한성조약은 임오군란(1882)으로 서울의 일본공사관이 불타고, 김옥균 등이 주도한 갑신정변(1884년)으로 일어난 혼란 뒤 사후 처리 및 보상 문제를 다루었다].

스티븐스는 한성조약 체결에서의 공을 인정받아 일본 메이지 국왕으로부터 훈3등 욱일중수장을 받았다. 1902년엔 훈2등 욱일중광장과 훈1등 서보장을 잇달아 받았다. 1904년 일본의 추천으로 대한제국 외교고문이 됐지만, 그의 임무는 일제의 한반도 침탈을 돕는 것이었다. 스티븐스는 1908년 여객선 니폰마루(日本丸)를 타고 미 샌프란시스코에 들렀을 때 그곳 언론들과 인터뷰를 하면서 망언을 내뱉었다. "(1905년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은) 을사조약은 미개한 조선인을 위해 이루어진 조치다. 조선인은 독립할 자격이 없는 무지한 민족이다."

일제의 한반도 침탈을 옹호하는 스티븐스의 망언은 샌프란시스코 지역에서 철도 노동자로 일하던 전명운·장인환 두 의사의 결단을 불렀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20년 넘게 일본의 이익을 위해 애쓴 미국인 친일파가 일본으로선 얼마나 고마웠을까. 죽은 스티븐스에게 1등급 훈장을 주었고, 유족들에게 15만 엔이란 당시로선 거액의 조의금을 건넸다. 친일의 대가치곤 적지 않은 금액이라 해도 한 인간의 죽음을 돌이킬 수는 없다.

일본기업이 대는 연구비, 문제는 없는가

미쓰비시 기업의 돈으로 하버드대 교수가 된 램지어가 그렇듯이 일본의 돈은 친일파를 길러내는 에너지원이다. 한국의 '신친일파'도 마찬가지다. 지난 주 글에서, 일본 극우파의 금전적 지원을 받고 스위스 제네바 UN인권이사회 회의장에 나타난 이우연(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은 그저 드러난 한 보기에 지나지 않는다. 이우연의 은행 통장을 들여다보지 못하니 얼마만큼의 돈이 들어오는지 알 수 없지만, 그를 비롯한 '신친일파'들의 지갑을 일본 쪽에서 채워준다는 것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다.

가장 모양새가 좋은 것은 연구비 명목의 지원이다. 하지만 한일 근현대사와 관련된 학술연구에 일본쪽 지원을 받는다는 것은 신중할 필요가 있다. 오해를 받기가 십상인 탓이다. 오늘날 '한국형 뉴라이트'를 이끌며 '신친일파'로 분류되는 안병직과 그의 제자 이영훈은 낙성대 경제연구소(1987년 출범)의 구성원들과 함께 1989년과 1991년 도요타재단의 재정 지원을 받은 적이 있다. 일본인 학자들과 함께 '한국의 경제발전에 관한 역사적 연구'라는 이름 아래 공동 연구한 결과물이 <근대조선의 경제구조>(비봉, 1989)와 <근대조선 수리조합연구>(일조각, 1992)이다.

<근대조선 수리조합 연구>의 서문을 보면, '도요타재단의 지원이 없었더라면 이번의 공동 연구는 출발부터 불가능하였다. 특히 동 재단의 야마오카 요시노리(山岡義典)씨는 공동연구의 구상에서부터 출판의 단계에 이르기까지 관대하면서 헌신적인 도움을 주셨다'고 쓰여 있다. '공동연구의 구상'이란 표현에 눈이 더 가는 것은 왜 그럴까. 여기에 참여한 주요 한국 연구자들은 낙성대 경제연구소의 구성원들이다. 이들은 기업의 연구자에 대한 학술적 지원은 국적을 가릴 것 없이 고마운 일이고 일종의 관례라서 문제가 없다고 말한다.

"얼마 전에 도요타 연구비를 받은 것을 가지고 동아대학의 어느 교수가 우리가 마치 친일파라도 되는 양 시비를 걸은 적이 있습니다. 연구비를 받았으면 연구비를 준 사람 생각대로 연구를 해야 하는 줄 아는 모양이지요. 아니면, 연구비라는 것이 연구에 쓰이지 않고 개인 호주머니로 들어가는 돈인 줄 아는 겁니까?"(안병직 이영훈, <대한민국 역사의 기로에 서다> 기파랑, 2007, 71쪽)

위에 옮긴 글은 안병직과 이영훈이 대담집을 내면서 안병직이 했던 말이다. 말투가 거칠게 다가온다. 필자가 1970년대 후반 관악 캠퍼스에서 경제사 강의로 듣던 선생의 진중하고도 차분한 목소리는 아닌 듯하다. 안병직을 아는 사람들은 그가 돈에 관한 한 깨끗하고 사심이 없는 인물로 믿고 있다. 동아대 교수가 했다는 말의 핵심도 개인 호주머니를 챙겼다는 의심은 아닐 것이다. 논점은 하필이면 일본 기업이 댄 돈으로 일본 침탈과 뗄 수 없는 민감한 한국 근현대사 관련 연구를 하느냐는 데 있다. 연구비를 지원 받더라도 주는 쪽이 일본이라면, 오해를 받을 여지가 없는지 조심스레 살펴보자는 뜻이다.

"그들의 바뀐 모습 본다면, 가슴을 칠 것이다"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갈 대목이 있다. 199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안병직과 이영훈은 지금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오늘날처럼, 일제 강점기의 수탈과 '위안부' 성노예를 부정하고 독도의 한국 영유권에 시비를 걸지 않았다. '신친일파'로 분류되긴 어려운, 그 나름으로 비판적 성향의 학술 연구자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근대조선의 경제구조>(1989)와 <근대조선 수리조합연구>(1992)에 공동연구자로 참여했던 일본 학자들의 면면만 봐도 그렇다. 나카무라 사토루(中村哲, 교토대교수, 경제사), 가지무라 히데키(梶村秀樹, 전 카나가와대교수, 경제사), 미야지마 히로시(宮嶋博史, 도쿄대교수, 한국사회경제사), 마츠모토 다께노리(松本武祝, 카나가와대교수, 한국근대농업사) 등 일본인 학자들은 극우와는 거리가 멀다. 학계에서 인정받는 양심적이고도 진보적인 연구자들이다. 이들의 사정에 밝은 한 연구자는 필자와의 핸드폰 통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즈음 낙성대 연구소는 한국의 경제발전이 일제 식민지 통치 덕분이라는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의 이론적 산실이라 일컬어진다. 하지만 1990년 전후에 <근대조선의 경제구조>와 <근대조선 수리조합연구>로 결실을 본 한일 공동연구를 벌일 때만 하더라도 오늘날처럼 일본에 기울어져 논란을 일으키는 모습은 아니었다. 진보적 성향을 지닌 일본인 연구자들의 면면을 봐도 그렇다. 일본 학계에선 좌파의 이론적 중심인물들이다. 문제는 일본 연구자들이 학문적 일관성을 지금껏 지켜온 반면에, 안병직과 이영훈은 그렇질 못했다는 점이다. 진보를 버리고 친일 우편향으로 돌아섰다. 안병직이 먼저 바뀌고, 이영훈은 처음엔 반발하고 갈등하다가 스승을 따랐고, 갈수록 더 큰 역할을 맡았다. 일찍이 타계한 가지무라 히데키 선생이 오늘날 그들의 바뀐 모습을 본다면, 매우 놀라고 충격을 받은 나머지 가슴을 칠 것이다."

친일파 양산하는 '일본재단'의 돈줄

이즈음 '일본재단'(日本財團)이란 엄청난 자금줄이 전세계 곳곳으로 흘러들어가 친일파를 만들어낸다는 얘기가 많이 들린다. 연구비 지원과 로비, 환경 보호, 난민 지원 등 여러 명목의 자금 지원 규모는 매우 크다. 창립자 이름을 따 '사사카와 평화재단'(SPF)이라고도 불린다. 재단 창립자 사사카와 료이치(笹川良一, 1899-1995)는 일제의 침략전쟁때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를 찾아가는 등 극우 성향의 인물이다. 1945년 일본 패전 뒤 3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다가 1948년 12월23일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크리스마스 선물'로 풀려난 주요 전쟁범죄자 17명 가운데 하나다(본 연재 7회 참조).

사사카와가 여러 깨끗하지 못한 사업으로 번 돈을 좋은 일에 쓴다니 다행이지만, 전범자 출신의 이미지 세탁을 하는 게 아니냐는 뒷말을 들었다. '일본재단'은 한국의 여러 대학들을 지원했고 그로 말미암아 논란을 빚기도 했다. 일본의 해외 지원 분야에서 '일본재단'은 큰 몫을 하지만, 그래도 한 보기일 뿐이다. 그밖에 출판기업인 분게이슈주(文藝春秋)와 미쓰비시, 도요타를 비롯한 많은 일본 기업들이 돈의 힘으로 친일파를 길러내고 있다.

한국의 21세기 '신친일파'들에게도 '일본재단'을 비롯한 일본쪽 자금이 얼마나 현해탄을 건너 흘러 들어가는지는 확인이 어렵다. 강연이니 세미나 참석이니 하며 일본을 제집 드나들듯이 자주 오가며 친일 행태를 보이는 자들의 경우, 그들의 지갑을 누군가가 두둑이 채워주겠거니 하는 합리적 의심을 거두긴 어렵다. 다음 주엔 망언과 사과를 왔다 갔다 하는 '일본식 사과'의 실상과 문제점을 독자들과 함께 살펴보려 한다. (계속)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kimsphot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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