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25 (목)

근대적 경성과 서울의 판자촌 ’시간의 역전’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한겨레S] 우진영의 한국 근현대 미술 잇기

그림 속 경성과 서울

1927년 ‘북악산을 배경으로 한~’

신식건물·신여성, 도시 내음 물씬

2020년 ‘~사라지는 풍경 531’

빌딩숲속 달동네에 따스한 시선


한겨레

1927년 김주경 작 <북악산을 배경으로 한 풍경>.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한겨레S 뉴스레터를 구독해주세요. 검색창에 ‘에스레터’를 쳐보세요.

한국 근대미술과 현대미술의 경계는 미술사에서 오래도록 풀리지 않는 난제다. 학계에는 여러 학설이 있고 매번 새로운 견해가 등장한다. 미술사를 공부하며 치열한 논쟁을 접했다. 경계를 구분 짓는 일이 중요한 이유를 고민했고 복잡한 한국 근현대사 흐름 속 무엇을 현대적인 변화로 인식할 것인지가 핵심 쟁점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과연 그게 무엇일지 독자와 함께 답을 찾고 싶어 연재를 시작한다.

일제강점기 변화하는 도시


“여긴 어디죠? 도시는 어디 있어요?” 스코틀랜드 배경의 시대극인 넷플릭스 드라마 <아웃랜더>의 1화에 나오는 대사다. 2차대전 참전 간호사인 클레어는 남편과 여행을 하던 어느 날 우연한 계기로 200년 전으로 되돌아간다. 낯선 사람들에게 끌려가며 주위를 둘러본다. 분명히 같은 장소인데 어제까지 보던 도시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도시는 시대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다른 얼굴을 한다. 이제 근 100년의 시차를 두고 같은 도시를 그린 2개의 그림을 소개한다.

‘그리 낯설지 않은데?’ <북악산을 배경으로 한 풍경>(김주경, 1927)을 처음 보았을 때 무심코 떠오른 생각이다. 현대식 건물의 등장을 알린 그림이기 때문이리라.

1920년대 경성에 일제는 신식 건축물을 세웠다. 1925년에는 남산의 조선신궁과 남대문 밖 경성역이, 1926년에는 조선총독부와 경성부청이 신축됐다. 경복궁을 시작으로 덕수궁을 지나 남산으로 이어지는 육중한 콘크리트 건물이 만들어내는 경관은 경성의 새로운 상징으로 자리 잡으며 근대적 도시의 탄생을 알렸다.

그림에는 20세기 초 변화하고 있는 도시 경성의 모습이 꽤 현실적으로 담겼다. 서울시청 옛 청사인 경성부청 건물이 화면 가운데 자리했고 오른쪽으로 돔형의 탑이 슬며시 드러나 있다. 건물의 뒤로는 북악산이 보이는데 이는 현재 북창동 부근에서 바라다본 모습으로 추정 가능하다.

문득 1920년대 말 옛 서울인 경성이 궁금해진다. 일제강점기라는 고된 시기를 견디던 때였다. 조선을 지나 근대의 골목에 이르게 된 공간은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까. 김주경이 도쿄에서 유학하던 중 여름방학에 귀국했고 서구적인 건축물들이 들어선 경성 거리에 자극과 낯섦을 동시에 느꼈으리라. 건물 사이로 양장을 하고 양산을 쓴 여성이 시청 쪽을 향해 걸어가는 모습을 보았고 그곳이 바로 소공동 부근의 남촌 입구가 아니었을까. 이 근처에 조선인이 운영한 최초의 카페 ‘낙랑파라’가 1931년에 문을 열었다. 이곳에서 시인 이상과 소설가 구보 박태원이 만나 시간을 보냈고 이상은 1934년 모던걸 변동림과 연애를 했다고 전해진다. ‘모던하다’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그림이다.

캔버스 안에서 단연 눈길을 끄는 건 여성의 뒷모습이다. 붉은 양산을 쓴 여성은 흰 원피스를 입고 길을 따라 걷고 있다. 경쾌함과 생동감이 느껴지는 ‘신여성’이다. 1920년대 ‘신여성’과 ‘모던걸’이라는 용어는 여러 갈래로 함께 쓰이며 근대성을 함의하는 상징이 됐다. 여성의 뒷모습을 따라가다 보면 1920년대 마스코트였던 명동의 미쓰코시 백화점에 도착할 수 있지 않을까. 그녀는 경성 거리에 들어선 양품점을 구경하고 외국영화를 보러 갈 것이다. ‘또각또각’ 소리가 나는 하이힐을 신고서 말이다. 김주경의 작품에서 아픈 시기에도 일상을 살며 변화에 겁먹지 않고 살아가는 근대적 도시인을 만나게 된다.

따스하고 고요하고 정다운


한겨레

2020년 정영주 작 <도시-사라지는 풍경 531>. 정영주 제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미술관에서 일하며 매일 작품과 관련한 업무를 하지만 정작 그림을 ‘감상’하는 시간은 없다시피 했던 지난해 여름이었다. 일터가 아닌 다른 곳에 있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점심시간을 이용해 근처 갤러리에 갔다. 정영주 개인전이 열리고 있었다. ‘어나더 월드’라는 전시 타이틀이 그저 별로라고 느껴졌다. ‘또 다른 세계는 무슨… 너무 진부한 거 아냐?’ 문을 열고 들어가 작품들을 감상했다. 불쾌지수의 최대치를 향하던 마음의 성난 불길이 한순간 식었다.

서늘하되 따스했고 고요하되 정다웠다. 정영주는 흔한 빌딩 숲이 아닌 그 사이에 자리 잡은 작은 판잣집에 주목한다. 방치돼 버려진 듯한 집들은 보면 서글퍼지기도 한다. 여러 인터뷰에서 작가는 말했다. “내 자신이 초라하다고 느껴지던 힘든 시기가 있었다. 그 때 허물어질 듯한 판잣집을 보았고 그 모습이 왠지 나와 비슷해 보였다.” 이를 계기로 2008년부터 정영주는 도시라는 공간과 그곳의 판잣집과 달동네를 떠올리게 하는 풍경들을 그려내고 있다.

<도시 사라지는 풍경531>은 2020년 작이다. 파란 판잣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저 멀리 끝없이 이어지는 지평선이 보인다. 촘촘하게 모여 있는 불빛들이 이내 도시의 밤을 환하게 밝히고 점점 가까이 다가와 마음에 내려앉는다. 자세히 살펴보면 회화임에도 부조 같은 입체감도 발견할 수 있다. 정영주는 한지를 잘라내어 캔버스에 구겨 붙여 형태를 만든다. 그 위에 한겹 또 한겹 쌓아 올린다. 구겨진 종이들은 자연스레 주름진 형태로 표현돼 흘러간 시간과 낡고 노화된 느낌을 자아낸다. 이렇게 집들을 하나하나 만들고 말린 뒤 마지막으로 아크릴물감으로 채색한다. 재료가 갖는 독특한 물성이 발색을 높여 불빛의 영롱함이 살아난다.

오늘의 도시는 ‘혼자’가 익숙한 시대다. 코로나를 겪으며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는 더욱 멀어졌다. 작가는 옆집의 이웃들과 가족들과 함께했던 과거의 도시 안 마을 풍경이 어느새 사라지는 것이 아쉬워서 그 세계를 그려내지 않았을까. 작가가 그려낸 공간이 무척이나 따스해 저절로 지친 마음에 위로가 번졌다.

김주경의 <북악산을 배경으로 한 풍경> 속 화면을 가득 채우는 콘크리트 건물은 1927년 당시 도시의 변화를 보여주는 낯선 풍경이었다. 2023년 한국의 도시에서는 그저 어디서든 볼 수 있는 익숙한 실재다. 동시대 작가 정영주는 오히려 위용을 자랑하듯 뻗어 있는 도시의 흔한 고층 건물들이 아닌 산동네 사이사이에 숨어 있는 판잣집을 그린다. 김주경은 반대로 그 시대가 맞이하고 있는 근대적 도시의 생생한 변화를 드러냈다. 일제강점기라는 특수한 시기를 지낸 근대화가 김주경은 변화하는 도시 경성의 새로움에 매료돼 이를 화사하게 드러냈다면 정영주는 반대로 도시의 시계추를 되돌려 스스로 상처를 어루만졌다.

새로움이 일어난다. 변화하고 움직인다. 지나가고 흘러간다. 머물고 떠난다. 잊히고 그리워한다. 도시에서의 삶은 그러하다. 치열한 도시 속에서 오늘이 괴로웠다면 지나간다고 다독여보고, 어제가 아쉬웠다면 새로운 날들이 다가옴에 기대를 걸어보기로 한다. 도시에서의 낮과 밤을 살아내는 모두에게, 그리고 한때는 전부였던 지금은 멀어진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다. “언제 어디서든 너의 안녕을 바란다”고.

미술 칼럼니스트



예술가가 되고 싶었지만 소심하고 예민한 기질만 있고 재능이 없단 걸 깨달았다. 모네와 피카소보다 김환기와 구본웅이 좋았기에 주저 없이 한국 근현대미술사를 전공했다. 시대의 사연을 품고 있는 근대미술에 애정이 깊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일하고 있다.



▶▶한겨레의 벗이 되어주세요 [후원하기]
▶▶한겨레 뉴스레터 모아보기▶▶한겨레 뉴스레터 모아보기

[ⓒ한겨레신문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