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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튀르키예는 유럽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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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터키) 대통령이 지난 3일(현지시각) 수도 앙카라에서 열린 대통령 취임식에서 연설하고 있다. 앙카라/UPI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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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장영욱 |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

지금 직장에서 ‘유럽팀장’ 직함을 단 지 어언 1년이 됐다. 우리 팀의 연구 대상인 유럽 50여개 나라엔 제각각 특징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곳이 얼마 전 대선을 치른 튀르키예(터키)다.

튀르키예를 유럽팀이 담당하는 게 처음엔 이해되지 않았다. 정치체제, 경제체제, 민족 구성, 종교, 문화 어딜 봐도 튀르키예는 여타 유럽 국가와 다르다. ‘유럽’ 하면 흔히 떠올리는 국가 중에, 정치지도자가 헌법을 바꿔가며 20년 이상 장기집권하는 예는 찾기 어렵다. 인구 90%가 무슬림이며 이슬람주의가 정치, 경제에 강한 영향력을 미치는 국가 역시 유럽에선 튀르키예가 유일하다. 지리적으로도 튀르키예 영토 대부분이 서아시아에 속한다. 이스탄불이 있는 동트라키아 지역만 유럽 동남부에 살짝 걸쳐 있을 뿐이다.

물론 튀르키예를 유럽으로 분류할 만한 근거도 꽤 있다. 면적은 튀르키예 전체의 약 3%에 불과한 동트라키아 지역에 전체 인구의 15%가 거주한다. 경제 비중으로 따지면 30%를 넘어선다. 튀르키예의 가장 중요한 무역 상대국은 유럽연합(EU)이며, 유럽연합 입장에서도 튀르키예가 여섯번째로 큰 무역 상대국이다. 튀르키예는 1995년 유럽연합과 관세동맹을 체결했고 1999년 유럽연합 공식 가입 후보국에 올랐다. 튀르키예는 또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으로 유럽 동남쪽 전선의 방위를 담당한다. 튀르키예의 최고 인기 스포츠는 여느 유럽 나라들처럼 축구이다. 튀르키예는 유럽축구연맹 소속으로 월드컵 예선을 유럽 국가들과 함께 치른다.

유럽팀장으로서, 유럽에 속한 이질적인 국가 튀르키예를 연구할 땐 늘 골머리를 앓는다. 지난해엔 고물가 상황에서 정책금리를 지속해서 인하하는 바람에 물가상승률이 86%까지 치솟았다. 금리 인하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중앙은행 총재가 여러차례 경질됐다. 거꾸로 가는 통화정책에 리라화 가치가 폭락했고 경제전망도 부정적이다. 그럼에도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은 “고금리가 고물가를 야기한다”는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논리로 금리 인하 기조를 고집했다. 전통적 경제이론에 반하여 금리를 내린 배경에 이자 부과를 금하는 이슬람교 생활규범 ‘샤리아’가 있다고 한다. 학교에서 거시경제학을 공부할 때 코란을 배운 기억은 없다.

그런데도 에르도안은 얼마 전 대선에서 재집권에 성공했다. 선거 전엔 전망이 밝지 않았다. 장기집권 피로감에 경제 혼란이 더해진데다가, 올해 초 대지진까지 발생하며 민심이 돌아섰다. 지진 피해를 키웠던 내진 설계 부실의 원인이 에르도안 정부의 졸속 재개발 정책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며 지지율이 출렁였다. 여론조사에선 야당의 케말 클르츠다로을루 후보가 과반 지지를 얻는 것으로 나타나 정권교체가 예상됐다.

그러나 정작 선거에선 에르도안이 승리했다. 에르도안은 현직 프리미엄을 활용해 가스비 무상 지원, 연금 조기 수령, 최저임금 인상 등 포퓰리즘 정책을 대거 약속했다. 야당 후보가 쿠르드 반군을 옹호해 안보를 위협하고 성소수자그룹을 지지해 튀르키예의 가족 전통을 망친다며 음해했다. 편향된 언론 환경도 한몫했다. 대선 기간 중 튀르키예 국영방송은 에르도안 대통령에게 약 33시간의 보도시간을 할애했지만 야당 후보 보도엔 단 32분만 썼다. 역시나 유럽 여느 ‘선진국’에선 쉽게 보기 힘든 풍경이다.

유럽 국가로 분류되지만 유럽과 사뭇 다른 튀르키예를 보며 우리나라를 생각한다. 헌법 개정, 언론 장악, 안보위협 강조, 소수자 배척 등을 통한 장기집권은 우리나라에서 이미 옛이야기가 됐다. 경제성장을 위해 독재를 정당화하는 논리도 이제는 안 먹힌다. 우리 대통령은 자유의 본산 미국 의회에서 자유주의를 역설해 박수갈채를 받았으며, 주요 7개국(G7) 회의에 수시로 초청돼 “심리적 G8”로 불리기도 한다.

그런데 마음 한구석에 찝찝함이 남는다. 정권에 각을 세웠던 언론이 석연찮은 이유로 압수수색을 받는다. 고공농성을 하던 노동조합 간부가 경찰이 휘두른 곤봉에 맞아 피를 흘린다. 불법행위를 핑계로 집회의 자유가 후퇴할 조짐이 보인다. 유럽에 속했지만 이질적인 튀르키예와 같이, 선진국 반열에 오른 우리도 여전히 청산하지 못한 과거의 유산에 발목 잡혀 있는 건 아닐까. 우리나라를 연구하는 외국의 어느 연구자가, 튀르키예를 연구할 때 내가 갖는 이 이질감을 느끼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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