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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친위 쿠데타 실패한 것 아니냐”… 9시간 만에 좌초된 민주당 혁신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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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에 부담”… 임명 9시간 만에

국힘 “이재명 직접 사죄해야”

李, 리더십 타격에 ‘2선 후퇴’ 검토

2023년 초부터 원내외 인사들 접촉

모두 비대위원장직 고사에 난항

이래경 과거 SNS 부적절 글 도마에

非明 “인선 논의조차 없었다” 반발

前 천안함 함장 “인선 철회하라” 요구

野 대변인 “무슨 낯짝”… 논란에 기름

‘돈봉투’ 등 국면 전환 시도 자충수

당내 “지도부 무능력” 비판 목소리

非明 박광온 원내대표에 힘 실릴 듯

더불어민주당 혁신작업을 주도할 기구 수장에 선임됐던 이래경 ‘다른백년’ 명예이사장이 이재명 대표의 인선 발표 이후 9시간여 만에 자진 사퇴했다. 이 이사장이 북한 소행으로 드러난 천안함 피격 사건에 대해 최근까지도 ‘자폭’이라고 주장하는 등 부적절한 글을 여러 차례 쓴 사실이 드러나면서 당 안팎에서 비난이 거세게 인 데 따른 것이다.

이 이사장은 5일 오후 7시쯤 사의 표명문을 내고 “사인이 지닌 판단과 의견이 마녀사냥식 정쟁의 대상이 된 것에 매우 유감스럽다”며 “이는 한국사회가 현재 처한 상황을 압축하는 사건이라는 것이 제 개인적 소견이지만, 논란의 지속이 공당인 민주당에 부담이 되는 사안이기에 혁신기구의 책임자직을 스스로 사양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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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경 다른백년 명예이사장(왼쪽),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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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표가 같은 날 오전 당 최고위원회의에서 “민주당 혁신기구를 맡아서 이끌 책임자로 이 이사장을 모시기로 했다”고 밝힌 지 한나절도 안 돼 사의를 밝힌 것이다.

이 이사장이 사의 표명문에서 ‘사인이 지닌 판단과 의견’이라 언급한 건 이 대표 인선 발표 직후 논란이 되기 시작한 ‘천안함 자폭’ 발언 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올 2월 페이스북에 “자폭된 천안함 사건을 조작해 남북관계를 파탄 낸 미 패권세력들이 이번엔 궤도를 벗어난 중국의 기상관측용 비행기구를 마치 외계인의 침공처럼 엄청난 ‘국가위협’으로 과장해 연일 대서특필한다”고 썼다. 지난 3월엔 우크라이나를 침공해 국제형사재판소(ICC)로부터 체포영장이 발부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전쟁고아들을 보호한 푸틴”이라며 옹호했다. ‘우크라이나군을 전범으로 체포해야 한다’는 내용의 글도 공유했다. 이 밖에도 이 이사장은 친중·러, 반미 성향을 드러내는 글을 다수 게재했다.

이날 하루종일 당 안팎에서 이 이사장에 대한 비판이 쇄도한 가운데 특히 현충일을 하루 앞두고 천안함 유족·생존 장병이 이 이사장 인선에 반발할 기미를 보인 게 이 이사장 사의표명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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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일 전 천안함 함장. 세계일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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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일 전 천안함 함장은 이날 이 이사장의 천안함 언급을 두고 “현충일(6월6일) 선물 잘 받았다”며 “해촉 등 조치 연락이 없으면 내일(6일) 현충일 행사장에서 천안함 유족, 생존장병들이 찾아뵙겠다”고 했다.

여당은 이번 사태에 대해 “이 대표가 직접 사죄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국민의힘 유상범 수석대변인은 이날 논평을 내고 “애당초 자격 없던 이 이사장의 사퇴만으로 성난 민심을 잠재울 수 없다”며 “이 대표도 천안함 관련 왜곡된 인식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밝히고 부적절한 인사와 막말에 대해 국민 앞에 사죄하라”고 촉구했다.

◆계파 갈등 봉합 서두르다… 검증 실패·구인난에 ‘인사 참사’

더불어민주당이 5일 혁신기구 수장으로 선임한 이래경 다른백년 명예이사장이 인선 발표 9시간 만에 사퇴한 배경에는 이재명 대표 측의 안일한 인식에서 비롯된 인사검증 실패와 구인난이 있었던 것으로 분석된다.

자신의 ‘사법 리스크’로 당내 비위 의혹에 단호하게 대처하지 못해 리더십에 타격을 입은 이 대표가 혁신기구 출범을 돌파구로 삼기 위해 성급히 낸 인사가 ‘참사’로 이어졌다는 비판도 당 내부에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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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5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혁신기구 위원장에 이래경 다른백년 명예이사장을 선임하는 발표를 하고 있다.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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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표가 이 이사장에게 혁신기구를 맡기겠다고 발표한 건 이날 오전 9시30분 열린 당 회의에서였다. 발표 직후부터 부적절한 인선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이 이사장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적은 ‘천안함 자폭’, ‘전쟁고아 보호한 푸틴’, ‘코로나19는 미국발’, ‘한국 대선에 미 정보기관 개입’ 등 글이 도마에 올랐다. 해당 글들은 ‘전체 공개’로 돼 있어 누구나 그의 계정을 검색하기만 하면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이 대표는 논란이 된 이 이사장의 SNS 글에 대해 “그 점까지는 저희가 정확한 내용을 몰랐던 것 같다”고 했다. 그러나 이 대표 측 한 관계자는 “어느 정도 사전에 인지하고 있었다”고 했다. 이 이사장이 음모론적 주장을 반복해 온 것을 알면서도 당 쇄신 작업의 전권을 맡기려 했다는 것이다. 이 대표 측은 “자연인 신분에서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왜 문제가 되는 일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오후 당 고위전략회의에서는 이 이사장 인선의 적절성을 두고 다양한 의견이 나온 것으로 전해졌다.

권칠승 수석대변인의 국회 발언은 인선 논란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됐다. 그는 최원일 전 천안함 함장이 인선 철회를 이 대표에게 요구한 것을 겨냥해 “천안함 함장은 무슨 낯짝으로 그런 얘기를 한 건가”라고 기자들 앞에서 말했다. “부하들 다 죽이고 어이가 없네”, “원래 함장은 배에서 내리면 안 된다”고도 했다. 권 대변인은 논란이 커지자 뒤늦게 “천안함 유족, 생존 장병의 문제 제기에 충분히 공감하지만 책임도 함께 느껴야 할 지휘관은 차원이 다르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해명했다. 최 전 함장은 권 대변인의 발언에 대해 고소를 검토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국민의힘 유상범 수석대변인은 논평을 통해 “막말에 막말을 더한 권 수석대변인도 대변인 직에서 물러나라”고 비판했다.

앞서 당내에서는 인선을 둘러싼 질타가 쏟아졌다. 5선 중진인 이상민 의원은 “당내 논의도 전혀 안 됐고 전혀 검증도 안 됐으며 오히려 이 대표 쪽에 기울어 있는 사람이라니 더 이상 기대할 것도 없겠다”고 했다. 친이낙연계 홍영표 의원은 “이 이사장은 지나치게 편중되고 과격한 언행과 음모론 주장 등으로 논란이 됐던 인물로 혁신위원장에 부적절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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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민주당 이상민 의원(왼쪽), 허영 의원.


반면 김근태계 허영 의원은 “따뜻한 가슴, 냉철한 현실 인식과 지성을 갖춘 사람”이라며 호평했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지난달 30일 의원총회에서 김근태계인 허 의원과 기동민 의원이 총대를 메고 상임위원장 후보 인선에 불만을 제기한 직후 김근태계의 ‘후원자’인 이 이사장이 당 혁신의 전면에 서게 된 점에 주목하고 있다. 원내 김근태계 좌장격으로 친이재명 행보를 이어 온 우원식 의원이 이번 인선에 관여한 것 아니냐는 뒷말도 나왔다.

한편 이 대표는 자신의 리더십에 대한 당내 반발이 갈수록 커지자 비상대책위원장을 선임하고 자신은 ‘2선 후퇴’하는 방안을 검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대표는 올해 초부터 원내외 인사들을 접촉해 비대위원장을 맡아 줄 것을 호소했다고 한다. 그러나 모두 고사하는 바람에 선임이 무산된 것으로 전해졌다.

이런 와중에 2021년 전당대회 돈봉투 의혹과 김남국 의원의 가상자산(코인) 투자·보유 의혹이 불거져 혁신 요구가 당 안팎에서 분출하자 이 대표가 구인난 속에 이 이사장을 ‘구원 투수’로 삼으려 했던 것 아니겠느냐는 분석이 나온다.

◆당 혁신기구 출범도 전에 좌초… 李 리더십 치명타… 내홍 재점화

돈봉투 의혹과 김남국 가상자산 투자 논란으로 위기에 빠진 더불어민주당이 내년 총선을 앞두고 국면 전환을 위해 띄웠던 당 혁신기구가 첫 단추부터 잘못 꿴 꼴이 됐다.

이재명 대표가 5일 혁신기구 책임자로 이래경 ‘다른백년’ 명예이사장을 모시기로 했다고 발표한 지 한나절도 안 돼 이 이사장이 막말 논란에 휩싸여 자진 사퇴하면서다. 당 혁신에 대한 이 대표 주도권이 명분을 잃게 됐다는 평가가 나오는 가운데 친명(친이재명)과 비명(비이재명) 간 계파 갈등이 더욱 격화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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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와 박광온 원내대표가 5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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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당내에서는 이번 사태를 두고 지도부의 무능력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민주당의 한 중진 의원은 이날 이 이사장 사퇴 발표 직후 기자와 만나 “×인지 된장인지 알아보고 천거를 했어야 하는데 그런 필터링이 전혀 없었다”며 “(이 이사장이) 국민 감정과 동떨어진 말을 너무 많이 했다. 오전에 사퇴할 줄 알았는데 오래 버텼다”고 말했다.

이 이사장을 친명계 인사로 간주하는 이들 사이에서는 이 대표가 “친위 쿠데타를 도모하다가 실패한 것 아니냐”는 비아냥도 나왔다. 이 이사장은 2019년 경기도지사였던 이 대표의 선거법 위반 대법원 판결을 앞두고 무죄 탄원을 요구했던 ‘이재명 지키기 범국민대책위원회’에 이름을 올린 인물이다. 한 비명계 의원은 “이 대표가 당내 혁신이 자기를 향할 걸 걱정해 제 입맛에 맞는 인물을 세우려다가 실패한 것”이라며 “앞으로 혁신을 얘기할 때 누가 이 대표의 말에 귀를 기울이겠냐”고 말했다.

민주당의 혁신 논의는 비명계로 분류되는 박광온 원내대표가 선출된 이후 점화됐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박 원내대표는 원내대표 선거에서 쇄신 의원총회 개최를 약속하고 실제 의총을 열어 새 혁신기구 구성의 뜻을 모아 냈다. 이 대표와 박 원내대표 간 당 혁신을 둘러싼 샅바싸움이 이어지고 있는 와중에 친명색이 짙은 이 이사장이 낙마하면서 박 원내대표에게 힘이 실릴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것이다. 실제 이 이사장 인선에 대해 박 원내대표는 이날 오전에야 인지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 초선 의원은 “이 이사장 논란으로 이 대표에 대해 신뢰가 사라질 수밖에 없지 않겠냐”며 “어찌 당의 운명을 맡길 수 있겠냐는 불만이 비주류에서부터 앞으로 계속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이 이사장 사퇴로 당 혁신기구 출범이 또 한 번 미뤄지면서 민주당 위기가 장기화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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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국 무소속 의원. 공동취재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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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기구가 들어설 경우 당장 당내 도덕성 기준을 쇄신하는 게 최우선 과제로 꼽히는 상황이었다. 돈 봉투 의혹·김남국 가상자산 논란 때 당 지도부가 늑장 조치한 게 일관된 기준이 부재한 탓이란 지적이 계속 나온 터다. 혁신기구 선례로 자주 거론되는 2015년 김상곤 혁신위는 △막말 등 해당 행위에 대한 제재 규정 마련 △부정부패 등으로 직위 상실 시 재보선 무공천 △부정부패 연루 당직자 당직 박탈 규정을 마련한 바 있다. 이 대표 ‘방탄’ 논란이 일었던 ‘부정부패 혐의로 기소 시, 당직 정지’라는 당헌 80조도 이때 마련된 조항이다.

‘개딸’(개혁의딸) 등 이 대표 강성 지지층과 친명계 인사들이 주장하는 대의원제 폐지에 대한 결론도 혁신기구 몫이 될 것으로 보인다. 구주류인 친문(친문재인)계는 대의원제가 숙의민주주의를 가능케 했다면서 존속을 주장하고 있다.

배민영·김현우·김병관·최우석·김승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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