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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전세사기 피해자 79% “생활고 심화”…절반 이상 “야근·부업 늘렸다”[잃어버린 집, 타버린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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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下) 그들은 살기 위해 애쓰고 있다

경향신문

“특별법 지원받을 수 있을까” 서울 강서구 화곡본동 주민센터에 설치된 전세피해지원 상담 부스에서 5일 한 시민이 상담을 받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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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추홀구 피해자 393명 설문
“주 40시간 이상 더 일했다” 76명

정신건강 악화 직장 퇴사 사례에
응답자 58.7%가 “가정불화 증가”
바쁜 생계 속 피해증명까지 해야

인천 미추홀구 전세사기 피해자 성혜영씨(49·가명)는 지난 2월부터 월·화·수요일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1주일에 12시간 편의점에서 일하는 성씨의 본업은 따로 있다. 평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는 경기 부천시에서 사무직으로 일한다. 당장 퇴근 후에 할 수 있는 일을 구하다 생전 처음 편의점 포스기를 만지게 됐다.

성씨가 부천에서 퇴근해 아르바이트까지 하루 12시간 강행군을 끝내면 오후 11시다. “따로 저녁 먹을 시간은 없어요. 이전 시간대 직원한테 인수인계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얼른 가야 해요.” 지난달 30일 오후 6시30분 인천 동인천역에서 만난 성씨는 숨 고를 틈 없이 편의점을 향해 발길을 재촉했다.

어떻게든 살아보려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지만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듯한 기분은 지울 수 없다. 성씨는 본업으로 버는 200만원가량은 카드값 등 생활비로 사용한다. 부업으로 시작한 편의점에서 버는 40만원가량은 대출 이자를 갚는 데 다 들어간다. 전세사기 피해금으로 5840만원을 잃게 된 성씨 부부는 “한 달에 10만원이라도 모아보려고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는데 모이는 돈은 한 푼도 없다”고 했다.

“요새는 비참하죠.”

성씨는 이전에도 ‘투잡’을 해봤지만 지금은 그때와 상황이 180도 다르다고 했다. “전에는 열심히 모아서 전세로 갈 생각으로 했던 거죠. 근데 지금은 이렇게 힘들게 버는 돈이 다 빚 갚는 데 들어가요. 그것도 내가 진 빚이 아니라 사기꾼이 진 빚이잖아요.”

성씨를 비롯한 전세사기 피해자들은 갑작스럽게 재산을 잃고 빚더미까지 떠안았다. 이들은 조금이나마 경제적 어려움을 덜려고 평일·주말 가릴 것 없이 몸이 부서져라 일하고 있다.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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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이 미추홀구 전세사기 피해자를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전체 응답자 393명 중 78.9%는 전세사기 피해를 본 이후 ‘경제적 생활고가 심해졌다’고 답했다. ‘매우 심해졌다’고 답한 사람이 41.7%(164명), ‘심해졌다’고 답한 사람이 37.2%(146명)였다.

전체 응답자의 88.3%는 전세사기로 채무가 늘었다고 했다. 응답자의 58.5%(230명)는 전세사기를 당해 생긴 빚이 ‘5000만원 이상 1억원 미만’이었다. ‘5000만원 미만’은 18.6%(73명), ‘1억원 이상 1억5000만원 미만’은 9.7%(38명), ‘1억5000만원 이상’은 1.5%(6명)였다.

응답자 절반 이상(53.4%)은 전세사기 피해를 당한 이후 출근을 당기고 퇴근을 미루거나 부업에 뛰어들었다. 35.1%(138명)가 성씨처럼 부업을 갖거나 무직이었다가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 18.3%(72명)는 새로 시작한 일은 없지만 야근, 특근 등으로 일하는 시간이 늘었다고 답했다.

주당 노동시간이 ‘15시간 미만 늘어났다’고 답한 사람은 전체의 16.3%(64명), ‘15시간 이상 40시간 미만 늘어났다’고 답한 사람은 17.8%(70명), ‘40시간 이상 늘어났다’고 답한 사람은 19.3%(76명)였다. ‘노동시간이 주 40시간 이상 늘었다’고 답한 30대 남성 피해자 A씨는 “자영업 영업시간을 (하루) 16시간 풀근무로 늘렸다”고 했다.

피해자가 가장 많이 시작한 일은 배달대행과 대리운전 등 운전 및 배달 업종(48명)이었다. 물류센터를 새로 다니게 됐다고 밝힌 30대 여성 피해자 B씨는 “아이가 어려 돌볼 손길이 필요한데 돈 때문에 다시 일하게 됐다”며 “지난해 초 재계약하면서 전세대출을 겨우 다 갚고 신용대출로 보증금을 증액했는데 사기를 당했다. 평생 모은 8000만원이 한순간에 날아간 이 상황이 너무 억울하다”고 했다.

자영업을 하며 또 다른 일을 구하고 있다고 밝힌 30대 여성 C씨는 “구직활동을 위해 매일 구직사이트를 보지만 잘 안 된다”면서 “전세사기로 인한 우울증에 더해 일을 추가로 해야 한다는 압박감까지 든다”고 했다.

전세사기의 충격으로 다니던 직장을 그만둔 이들도 있다. 30대 여성 피해자 D씨는 “전세사기 피해 여파로 정신건강이 악화돼 다니던 직장을 그만뒀고 지금은 아르바이트로 최저생활비만 간신히 벌고 있다”고 했다.

생활고는 가정불화의 잠재적 요인이다. 절반이 넘는 응답자(58.7%)는 경제적 생활고를 겪으며 ‘함께 사는 가족과 불화가 늘었다’고 답했다. ‘동거가족과 불화가 늘었다고 느끼느냐’는 질문에 ‘그렇다’는 답변은 28%였고, ‘매우 그렇다’는 답변은 30.8%였다. 성씨는 남편과 불화를 겪고 있지는 않지만, 주고받는 대화가 ‘특별법 나오면 대환대출되는지’ ‘이사할 때 대출되는지’뿐이라고 했다. “평일에는 서로 일 끝나고 오면 얘기할 시간도 없으니까 그나마 주말에 이런 얘기를 해요.”

이 와중에도 이들은 전세사기 피해자임을 확인받기 위해 또 시간을 쪼개야 한다. 일 때문에 피해지원센터를 자주 갈 수 없는 성씨는 어떤 서류가 필요한지 같은 동네 사람들과 알음알음으로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는 “준비서류 낸 것을 보고 국토교통부에서 피해자인지를 결정한다고 하던데 기준이 뭔지 모르니 최대한 낼 수 있는 서류를 다 내려고 한다”고 말했다. 본업과 부업과 피해자 입증까지. ‘살아갈 고민’으로 가득 찬 성씨의 하루는 자정이 가까워진 시간에도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시리즈 끝>

김송이 기자 songyi@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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