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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살인 피해 유족들에 물었다... "가해자에 사형 선고된다면" [다시 쓰는 사형제 리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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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 사형제 폐지? 논쟁의 끝은
공정식 교수, 유족 13인 심층 인터뷰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고통 커
집행 기대 안 하지만 선고돼야 종결감
사형 미선고 땐 사법 시스템 불신으로
사적 복수 결심까지… 기저엔 공포감
"사건의 늪에서 장기간 벗어나지 못해"

편집자주

26년간 사형이 집행되지 않으면서, 한국은 실질적 사형 폐지 국가로 분류됐다. 그러나 사형수 59명은 여전히 수감 생활 중이다. 헌법재판소는 사형제에 대해 두 차례 합헌 결정을 내린 뒤, 이르면 올해 세 번째 판단을 내놓을 예정이다. 한국일보는 헌재 결정을 앞두고 사형제를 둘러싼 양자택일의 소모적 공방을 지양하고 더 나은 길이 무엇인지 고민해봤다.
한국일보

서울교통공사 역무원 스토킹 살인사건 발생 5일째인 지난해 9월 19일 오전 서울 중구 신당역 역내 화장실 앞에 마련된 추모공간에서 한 시민이 추모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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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 피해자 유족은 사형제 폐지 여부를 논할 때 핵심 당사자다. 이들 역시 범죄 피해자로 분류되는 데다, 세상을 떠난 가족의 심정을 대변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기 때문이다. 사형 선고가 유족에게 미치는 영향을 따져보는 것이 유의미한 분석이 될 수 있는 이유다.

하지만 살인 피해자 유족에 대한 실증적 연구는 국내외를 통틀어 전무한 수준이다. 그나마 2016년 살인 피해 유족 13명을 심층 인터뷰한 공정식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의 연구를 꼽아볼 수 있다. 표본이 많지 않다는 한계가 있지만, 사형 선고가 유족에게 미치는 영향을 짐작하는 데는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5일 한국일보가 분석한 공 교수 연구 자료에 따르면, 일부 유족은 가해자에게 사형이 언도되는 것만으로도 유의미한 종결감, 즉 형식적으로나마 사건이 마무리됐다는 후련함을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집행 예상해도, 일단 선고돼야 종결감"


살인 피해자의 아버지 A씨는 가해자에게 사형이 확정된 뒤 5년이 지나 공 교수 측과 가진 인터뷰에서 "(사형 선고 당시) 집행은 보나마나 안 될 것으로 생각했다"고 털어놨다. 다만 "사형 선고 후 시간이 지나면서 무거웠던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그 아이(가해자)가 꼭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야 한다는 생각도 굳이 (안 하게 됐다)"라고 말했다.

형벌상 최고형이 내려졌다는 사실만으로도 A씨는 '회복 의지'가 생겼다. 사형 선고로 가해자를 온전히 용서하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끔찍한 사건에 더 이상 매몰되지 않고 일상으로 돌아갈 각오를 다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한국일보

그래픽=신동준 기자


유족의 일상 회복 의지는 죄책감의 종결과도 연결돼 있다. 공 교수는 "유족들을 마지막까지 괴롭히는 감정은 죄책감인데, 가족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고통이 재판 과정에서 '사형 선고를 꼭 받아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어진다"고 말했다. 실제 집행까지 기대하지 않았던 A씨가 사형 선고만으로도 일상을 되찾을 생각을 품을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반면 사형 선고를 받아내지 못한 유족들은 공통적으로 사건의 늪에서 장기간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유족 B씨는 "선고가 났을 때부터 매일 가해자가 출소하는 꿈을 꿨다"며 "가해자 집에 딱 한 번 가봤는데, 꿈에서 매일 그 길을 찾아가 죽일 정도"라고 털어놨다. 가해자가 이미 출소한 사실을 알게 된 유족 C씨는 "사건이 발생한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잊히기는커녕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아'라며 가족들과 절망했다"며 "지금은 혹시라도 길에서 부딪힐까 봐 겁이 난다"고 말했다.

"사법 시스템 자체에 불신... 사적 복수 결심도"

한국일보

그래픽=신동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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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이 선고되지 않은 데에 대한 좌절감은 형사사법 시스템과 국가 전체에 대한 원망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많은 유족들이 수사 단계에서부터 느낀 불만이 재판까지 이어졌다고 토로했고, "법이 피해자를 갖고 논다" "검사님마저 (형량이) 잘 나왔다고 하는데, 돈 없고 빽 없으면 범죄를 당해도 아무것도 아닌 것 같다"는 등 사법체계에 대한 불신을 드러냈다. 유족 D씨는 "이사, 심리치료, 직장생활 등 일상으로 복귀하려는 과정에서 국가는 필요한 만큼 도와주지 않았고, 국회의원들은 사건 터졌을 때만 반짝 관심을 보이고 이젠 신경도 안 쓴다"며 "내 몸에 흐르는 피를 다 빼고 외국인 피로 수혈받고 싶을 만큼 한국이 싫었다"고 울분을 토했다.

상당수 유족은 '사적 복수'에 대한 의지도 드러냈다. "가해자가 출소한 뒤에도 계속 고통을 받도록 심적으로라도 복수하고 싶다" "직접 잡아서 정말 처참하게 죽이지 않으면 자책감을 견딜 수 없다" "끝까지 물고 늘어질 것" 등 강한 보복 심리를 표출했다. 공 교수는 "출소한 가해자에게 느끼는 복수심의 기저엔 공포도 깔려 있다"며 "국가가 가석방 등 출소 문제와 관련해선 유족들을 배려할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 다시 쓰는 사형제 리포트

<1> 죄와 벌, 그리고 59명의 사형수
<2> 사형제 폐지? 논쟁의 끝은
<3> 두 번의 합헌, 세 번째 결론은


이정원 기자 hanako@hankookilbo.com
박준규 기자 ssangkkal@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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