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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누가 한국전쟁을 일으켰나···‘대답할 수 없는 질문’에 대한 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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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스 커밍스 ‘한국전쟁의 기원’ 32년만에 완역

해방과 분단 다룬 1권 1986년 번역

‘북의 남침 부정’ 이유로 금서 지정

2권은 무단 발췌 논란으로 번역 중지

커밍스가 주장한 것은 ‘세 가지 모자이크’

‘누가 보다 어떻게 시작됐나’ 초점

경향신문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전쟁 상황에 대해 “서로 주도권을 다투는 강대국과 한국의 힘으로는 어떻게 하기 어려운 외부 힘의 소용돌이 안에 있었다”고 말한다. 사진은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 때 미 해병대 상륙 모습. 위키미디어 공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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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 1권-해방과 분단체제의 출현 1945~1947>은 1981년 미국 프린스턴대학 출판부에서 나왔다. 5년 뒤인 1986년 한국에서 번역 출간됐다. 그해 청사출판사와 일월서각이 내놓았다.

1권은 번역판이 나오기 전부터 논쟁과 논란의 대상이었다. 당시 전쟁 발발 이유를 두고 토지개혁, 친일파 문제나 38선 분쟁 같은 한국 내부 모순과 갈등 심화에 따른 내전 성격의 전쟁이라는 이른바 ‘수정주의’에 바탕을 둔 책 요지가 먼저 알려졌다. 전두환 군사 정권은 소련 사주에 따른 북한의 남침을 부정하고, 김일성 정권에 기울어졌다는 이유로 금서로 지정했다.

이후 1권에 대한 해금, 커밍스의 유명도, 화제성 덕에 1990년 미국에서 나온 2권 <한국전쟁의 기원-폭포의 굉음>도 금방 번역돼 나올 듯했다. 실제 당시 청계연구소가 미국 프린스턴대 출판부와 계약을 맺었다. 이 연구소가 1990년 ‘신동아’에 2권 일부 내용을 발췌해 실은 게 문제가 됐다. 커밍스가 “무단 발췌”라며 언론에 고발했다. 청계연구소는 프린스턴대 출판부와 정식 계약을 맺었고, 발췌는 책 홍보 목적이라고 반박했다. 커밍스는 “프린스턴대학 출판부가 본인과 상의 없이 청계연구소가 이 책을 번역하는 데 동의했다”고 했다. 이 논란 뒤 번역 소식은 사라졌다.

글항아리 출판사가 김범(국사편찬위 편사연구관)이 5년간 번역한 책을 지난달 말 내놓기 전까지 33년 동안 나오지 못했다. 1947~1950년을 다루는 제2권은 1권(글항아리 번역판 기준 701쪽)보다 두 배가량 많은 1286쪽(2-1권 621쪽, 2-2권 655쪽)이다.

출판사 표현을 빌리면 2권은 “번역되지 않아 소문만 무성”했던 책이다. 핵심은 18장 ‘누가 한국전쟁을 일으켰는가-세 개의 모자이크’다. 커밍스가 결론이라고 소개한 장이다. 34년 전 무단 발췌 논란 때 ‘신동아’에 실린 것도 이 18장이다.

<한국전쟁의 기원>이나 커밍스에 대한 고정관념 중 하나가 ‘남침설 부정=북침설 인정’이다. 커밍스는 2권에서 여러 차례 “누가 한국전쟁을 일으켰는가? 이것은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라고 말한다. “이 오래되고 끔찍한 (전쟁의) 책임이 어느 한쪽에 있다고 비난하는 데는 관심이 없다”고도 했다.

대신 “답을 찾으려는 독자들에게 필요한 일은 세 가지 모자이크를 검토하는 것”이라고 각 모자이크를 보여준다. 첫 번째 모자이크는 “소련과 북한이 극악하고 정당한 이유 없는 침공을 은밀히 준비했다”(남침), 세 번째 모자이크는 “남한이 38도선 전역에 걸쳐 정당한 이유 없이 기습했다”(북침)는 것이다. 커밍스가 가장 흥미로운 것으로 꼽은 모자이크는 두 번째로 “남한이 전쟁을 유도했다”는 것이다.

커밍스가 먼저 배제한 건 세 번째 모자이크인 ‘남한의 기습’, 즉 북침이다. 그는 “38도선 전역에 걸쳐 남한이 총공격을 감행했다는 증거는 당시 북한의 자료에서도 찾을 수 없다” “검토할 가치가 없다”고 했다. “‘훈련’하는 것으로 감지되었던 북한이 남한을 향해 38도선을 넘으면서” 침공이 시작됐다는 윌리엄 코슨의 분석도 “분명한 사실”이라고 했다.

그렇다고 남침을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커밍스는 “같은 시기에 한국군도 자국 영토 내부에서 38도선으로 급속히 이동한 사실을 무시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했다.

커밍스가 무게를 둔 건 ‘두 번째 모자이크’다. 그렇다고 이 모자이크로 결론 내리는 것도 아니다. 다시, 커밍스는 “‘누가 한국전쟁을 시작했는가?’라는 질문은 그 자체가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 내 판단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질문에 답변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대신 이런 답을 내놓는다.

“진실은 남한이라는 국가가 존재하는 것 자체가 북한에는 도발이었으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다는 것이다. 남북전쟁을 기억하는 미국인은 이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북한의 침공이 공식적 역사라고 해도 이 전쟁을 도덕적으로 정당화할 수 있을까”라고도 되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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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밍스는 한국전쟁이 내전이라고 단정적으로 정의하지는 않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본질적으로 내전 성격을 지니고 있었지만, 한국은 진공 상태가 아니었으며 서로 주도권을 다투는 강대국과 한국의 힘으로는 어떻게 하기 어려운 외부 힘의 소용돌이 안에 있었다.” 그는 건국준비위원회, 인민위원회, 노동조합, 농민조합 같은 ‘인민공화국’이라는 개념과 수많은 자치 조직의 실체가 나타난 ‘해방 체제’와 외국 세력이 본격적으로 개입하지 않은 이 기간의 충돌을 “한국적이고 내전적인 전쟁의 기원을 따질 때 핵심적 요소”로 꼽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당시 상황은 한국이 미국과 소련의 대립 구도에서 어느 한쪽을 선택했다기보다는 미국과 소련이 당시 한국에 이미 존재하는 균열들을 둘러싸고 서로 침해하면서 대립했다는 것이 좀더 사실에 가깝다.”

커밍스는 2023년 한국어판에 서문을 실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더 깊어진 두 가지 신념”을 소개한다. 첫 번째 신념은 “군대와 경찰에서 일본에 협력한 거의 모든 한국인을 다시 고용하기로 한 미군정의 결정이 무엇보다 가장 압도적이고 우선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1945년 한국인 항일 유격대를 추격하던 일본군 대좌 김석원이 1949년 여름 동안 38도선의 지휘관이 된 일을 예로 든다. 두 번째 신념은 “1945년에 등장한 인민위원회는 매우 중요했지만 한국전쟁 관련 문헌에서 거의 완전히 무시돼왔다는 것”이다. 3년 동안 평화롭게 존속된 제주도 인민위원회가 미국인들과 앞서 일본에 협력한 한국인 장교들 주도로 “수치스러운 유혈 사태”로 끝난 점을 예로 든다.

커밍스는 서문에 1967~1968년 서울에서 평화봉사단의 영어 교사로 일하던 시절 이야기, ‘케네디적 진보주의자’였던 자신이 왜 급진화됐는지에 관한 이야기도 넣었다.

책으로 커밍스나 <한국전쟁의 기원>에 대한 “무성한 소문”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다. “그 수준과 분량에서 제임스 B. 팔레의 <유교적 경세론과 조선의 제도들: 유형원과 조선 후기>와 함께 지금까지 산출된 해외 한국학의 근현대와 전근대 연구를 대표하는 저작일 것”이라는 옮긴이 김범의 판단에도 동의하게 된다. 1권은 미국 역사학회의 존 킹 페어뱅크 저작상, 2권은 국제연구협회의 퀸시 라이트 저작상을 받았다. 커밍스는 판단의 근거로 기밀문서 등 수많은 문헌을 제시한다. 책은 역사 서술 방법론과 이론적 고찰에 많은 양을 할애하기도 했다. 셰익스피어, 니체, 브레히트 같은 여러 문학과 철학 인용은 마르크스의 <자본>을 떠올리게 한다. 이 ‘학술책’을 보면, 그간 커밍스에 대한 비난이나 비판, 인식, 인상은 단순하고, 도식적이며 일면적이었다는 느낌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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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100주년 학술대회. 출처: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100주년 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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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한국 지식사회에선 찾기 힘든, 오류와 잘못을 인정하는 태도도 확인한다. 1990년대 중후반 이후 ‘남침설’ ‘스탈린 전쟁 승인’을 뒷받침하는 구소련 문서가 계속 나오면서 커밍스와 책은 비판을 받았다. 커밍스는 서문에서 2권 출간 뒤 소련이 전쟁 발발에 더 강력하게 개입한 사실을 보여주는 구소련 기밀문서를 두고 “내가 북한의 독립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것은 잘못이었다. 북한이 스탈린의 승인 없이 독자적으로 행동하기에 스탈린은 너무나 엄청난 인물이었다”고 적었다.

그는 머리말에 “이 책의 오류와 해석의 책임은 물론 모두 내게 있다”고 썼다.

2권 발간 시점으로 하면 32년 만에 완역됐다. 2권 번역은 일본이 2002년으로 한국보다 20년가량 빠르다. 김범은 “한국 현대사를 다룬 가장 중요한 저작 가운데 하나가 그 사건이 일어난 당사국이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 먼저 완역됐다는 사실은 우리 학계가 무겁게 받아들여야 할 일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나라와 일본의 학문적 태도一특히 번역과 관련해一의 한 측면을 보여주는 작은 창문처럼 생각되기도 했다”고 옮긴이 후기에 썼다.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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